자료정리

三國志妄想 2011. 2. 2. 02:36

아놔. 연표정리만으로도 골 아픈데 관직정리까지 해야 하나. 어쩌다 이렇게 된 기야! 아오.. 일단 오늘의 문젯거리 정리.



1. 유대?

오서 유요전 :
유요는 ... 동래군 모평현 사람이다. ... 유요의 형 유대(劉岱)는 자가 공산(公山)이고, 시중과 연주자사를 역임했다.

무제기 :
-초평원년(190년) 봄 정월, 후장군 원술,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 연주자사 유대 (이하 안티동탁 명단)
-초평3년(192년) 여름 4월 ... 청주 황건의 무리들 백만명이 연주로 들어와 ... 유대가 이를 공격하려 하자 포신이 간언했다. ... 유대가 이를 따르지 않고 끝내 더불어 싸웠으나 과연 죽임을 당했다.


문제는 무제기의 다른 부분. 이상의 내용만 보면 유대는 후에 청주병이 될 황건적한테 죽었는데. 뒤에 같은 이름 같은 자의 다른 유대가 등장.


무제기 :
건안4년(199년)
12월 ... 유비는 동쪽으로 가기 전에 은밀히 동승 등과 함께 모반했었는데 ... 유대(劉岱), 왕충을 보내 이를 공격케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42]
[42] 위무고사 -유대의 자는 공산(公山)이고 패국 사람이다. 사공 장사로 정벌전을 수행해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다.


유요의 형 유대는 동래군 출신에 연주자사를 역임했으며, 192년에 죽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 유비한테 깨지는 유대는 패국 사람이라니 우연히도 이름과 자가 모두 같은 다른 사람인 듯. 좋아, 이건 패스.



2. 연주자사 유대??

후한서 공손찬전 :
공손찬은 휘하 무장들을 청주, 기주, 연주의 자사로 임명하고 ... 계교에서 원소와의 대결전을 행했다.

위서 공손찬전 :
엄강을 기주, 전해를 청주, 선경을 연주(자사)로 삼고

효헌제기 :
-초평3년(192년) 봄
정월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 원소와 공손찬이 계교에서 싸워 공손찬군이 대패했다.
-여름 4월 동탁을 주살하고 ... 청주의 황건이 동평(연주 동평국)에서 연주자사 유대를 공격해 죽였다.


-_-???;;;;;;;; 공손찬이 부하들을 여기저기에 임명한 건 계교전투가 있기 전이니 191년 말~192년 초 사이일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유대가 죽은 건 192년 여름이니 공손찬이 자기 부하를 연주자사로 삼았을 때 그 자리에는 이미 멀쩡한 연주자사가 있었다는 이야기.


무제기 :
초평3년(192년) 겨울, ... 청주병이라 불렀다. ... 공손찬은 유비를 고당에, 선경을 평원에, 도겸을 발간에 주둔하게 하여 원소를 핍박했다.


선경이 유대보다 오래 산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유대가 죽은 후에 연주자사로 임명되었다고 보긴 어렵지 싶다. 왜냐면 그 무렵부터 조조가 연주목 노릇을 하니까. 이 무렵에는 조조와 원소가 동맹이나 다름없었다. 이쯤에서 다른 연주자사를 찾아보자면,


무제기 :
-초평 원년(190년) 봄 정월, 후장군 원술, ... 동군태수 교모[19] ...
[19]영웅기 - 교모의 자는 원위이고 ... 일찍이 연주자사가 되었는데 ...

-유대와 교모가 서로 미워하여 유대가 교모를 죽이고, 왕굉으로 하여금 동군태수를 겸하게 했다.


....태수, 자사, 주목의 관위도 잘 모르겠다. 일단 자사에 좀 더 권한을 붙인 주목이 셋 중에서 가장 센 건 알겠다. 하지만 품계로는 태수와 자사가 같다는 말을 어디서 본 것도 같고? 아무튼 이놈의 관직이 나오는 부분은 어떻게든 안 건드리고 넘어가려 애쓰고 있다. -_-;; (사실 이렇게 따지자면 태수도 뭣도 아니던 공손찬 따위가 자기 부하들을 주자사로 세운 것 자체가 황당한 노릇임. 아무튼 공손찬이 이것도 개객기) 각설하고, 교모는 연주자사를 거쳐 동군태수가 되었다고 봐야지 싶다. 문맥상 교모가 살해당한 후 공석이 된 동군태수직을 왕굉이 차지했다고 읽힌다. 이 무렵에는 유대가 연주자사인 게 확실하겠지.

그럼 공손찬이 세운 저 선경이라는 자는 대체 뭐냐. 자사인 건 맞나? 엄강과 전해는 각각 자사가 되었지만 선경은 그냥 연주의 다른 관직을 받은 걸까? 선경이라는 인물이 언급된 건 후한서 공손찬전과 무제기 뿐이며, 그나마도 앞서 옮겨적은 부분 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선경의 관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관직 이야기로 가면 청주자사 전해도 묘하게 꼬였다. 나중에(193년) 원담이 청주자사가 되어 청주로 파견나가 전해를 쫓아내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원소는 이후 자식 원담을 청주자사로 삼아 파견하였으나, 전해는 그와 싸워 패하여 귀환하였다. -후한서 공손찬전)


아무래도 공손찬이 자사 만들어준 부하들은 말만 자사일 뿐 아직 재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떨려나갔다고 봐야 하려나 보다. 이 무렵 장안과 기주/유주의 연락이 어땠느냐면 헌제가 원소와 공손찬한테 그만 싸우라면서 8월에 파견한 칙사가 다음해에 도착할 지경이었으니까. 유우가 살해당한 것도 동탁이 죽은 일로 파견된 칙사가 그 다음해 겨울에야 도착하는 바람에 마침 유우를 포로로 잡고 있던 공손찬이 열폭할 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교통사정이 안 좋았나 보다. 게다가 지방의 군벌이 선 임명해서 공문을 올리면 헌제는 가타부타 못하고 그저 도장만 찍었을 테지. 생각해 보니 제갈량의 숙부인 제갈현이 바로 이 비슷한 경로를 타는 바람에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정말 말세 소리가 절로 나오는 시대였겠다.
그렇더라도 역시 선경이 문제. 아오 멀쩡한 연주자사가 있는데 자기 부하를 그 자리에 올리는 게 말이 되냐고. 결론은 공손찬이 개객기!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