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치 선생님의 97년작..인 듯 한데 이제야 들어온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은;;; <진베>를 봤다. 아다치 선생 특유의 어른스러운 깔끔한 묘사야 언제 봐도 훌륭하지만 소재가 한국사람 정서에는 맞지 아니할 종류의 것이어서야.;;; 어쨌거나 보다 보니 여주인공인 미쿠의 대사 하나가 눈에 착 달라붙었다.

"게다가 나는 골키퍼를 좋아하거든 ...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포지션."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팍팍한가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분이 차고도 넘치는 관계로 나같은 일자무식이 떠들 수 있는 건 체감상 팍팍하더란 정도의 이야기일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소름돋게 무서웠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1등 뿐이다"라던 광고, 전 국민의 프로화,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최고가 되어라, 1등이 되어라, 이겨야 한다, 위너 테익스 올.

금주의 아이실드 연재분에 잠깐 언급된 그대로, 1등은 선택받은 한 명 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패배자같은 위치가 될 수밖에 없다. 1등이 없어야 한다거나 가장 좋은 보상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정신머리 똑바로 박힌 1등은 인류를 도탄에서 건져내고 그 재능으로 수억명을 먹여 살리니까 당연히 한 만큼은 받아야지. 하지만 그 사람 혼자서 세상을 움직이는 게 아니란 거다. 나는 자기 일을 다 했지만 1등이 아닌 이들의 공적을 싸그리 무시할 때의 위너 테익스 올이 굉장히 싫다.

이긴다는 건 싸움의 결과다. 중간과정에 무엇을 어떻게 했든 이겼다는 결과를 얻으면 인정되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훌륭하다. 도덕적인 평가 이전에, 목적한 것을 위해 애쓰고 희생한 것을 결국 이룩했다는 데선 훌륭한 것이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을 남기는 것이 금과옥조인 자본주의 논리 하에서는 가치평가를 최대한 배제해서라도 가장 효율적으로 결과를 쟁취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고리타분하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느니,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느니 같은 소리를 하면 패배자의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를 노릇이다. 시간은 없고, 세상은 너무 커졌고,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결국 가장 객관적으로 어떤 성취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건 결과니까. 어쨌거나 사람이란 자신과 상관없는 이의 '사정'같은 걸 헤아릴만큼 너그로운 품성을 가진 동물은 아니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기는 것을 추구하기보단 지지 않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다. 물론 이기는 편이 좋겠지. 얻는 게 보다 많으니까. 또 이기는 것과 지지 않는 것은 양립 불가능한 건 아니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기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땐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승부에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남의 눈에 보이는 게 큰 '결과'에는 못 미치더라도, 나 자신이 세운 어떤 소중한 선, 가령 최선을 다한다, 다른 이를 해치지 않는다 같은 규칙은 지킴으로써 지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 않을 수는 있다. 여기엔 '1등'이 없다. 자신에게 만족하고 자신에게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긍지있는 사람들이 있을 뿐. 나는 긍지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긍지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이기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렵겠지만.


그러고 보면, 아다치 선생님의 작품은 대박을 치든 지뢰를 밟든-_- 정말 꾸준하게 아다치스러운 이야기와 아다치스러운 분위기와 아다치스런 캐릭들로 이루어졌지. 이분의 작품이야말로 한결같이 지지 않는 길을 걸어왔구나.

Posted by 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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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르다 2007.08.23 0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다치 선생은 터치, H2, 러프 등에서 대작 소리를 충분히 들으셨죠. 반면 언제나 미소라라던가에서는 지뢰 소리를...(퍽) 최신작인 크로스게임은 수작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을 듯한데 과연 어찌될런지.


    그리고 히루마는 '승산이 없는 노력 따윈 의미가 없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결코 노력을 부정하는 캐릭터는 아니니까요. 오히려 '노력만 하면 승산따윈 얼마든지 있어'라는 타입에 가까울지도요. 지금 책을 찾아보기 귀찮아서 잘 기억이 안나는데(...), 그 카멜레온이던가 하는 팀을 대했던 태도를 보면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지 않나요.

  2. 견습기사 2007.08.23 0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기준이 슬램덩크였습니다.(...) 물론 터치같은 경우엔 1억부를 팔아치운 괴물이긴 하지만 그렇게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는 느낌은 크지 않네요. 크로스게임은 좀 더 봐야겠습니다. 저한테는 H2가 너무 커서요..
    조쿠토 말씀입니까? 세나와 몬타만 있던 시절에도 가볍게 이긴 팀이라 노력 이야기가 나올 틈은 없었던 듯 합니다.; 말씀대로 노력만 하면 승산은 키울 수 있다는 주의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그 녀석은 노력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사람이 백만번 날개짓을 해봤자 맨몸으로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처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요.. 그런 게 승산 없이 무의미한 노력이고요. 그렇지만 '그럼 하늘을 나는 기계를 발명해서라도 날아주마'라는 게 히루마식 해결법이고, 히루마식 노력이고, 히루마식 꿈이라 생각합니다.

  3. 견습기사 2007.08.23 0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그래도 역시 오해될 소지가 있긴 하군요..-_-; 그 부분 수정했습니다.

  4. 요르다 2007.08.23 0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제가 말한 조쿠토는 처음 겨뤘던 그때가 아니었습니다만;; 예를 들어 '아 히루마가 풀어줬어. 우리도 대회 출장에 대비해 연습해야 하니까. 히루마 녀석 미식축구에 대해서만은 관대하단 말이야'같은 장면이라거나, 혹은 조쿠토가 패배했을 때 '아직 승산은 있었는데, 너 말고는 모두가 포기함으로서 그 승산이 사라졌어'라는 식으로 히루마가 말해주었던 부분들... 뭐 그런 걸 말한 거였습니다.

  5. 견습기사 2007.08.23 0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 봄대회 오죠전 대사는 현실주의자로서의 녀석에 대해 말할 때 자주 인용해먹곤 하는지라. 히루마가 노력이란 걸 어떻게 보는지, 제 경우엔 신류지전 클라이맥스인 197th down에서 뼈가 저리게 느꼈습니다. 0.1초 줄이는 데 1년 걸렸다는 말은 바꿔 말해 1년 씩이나 노력해서 겨우 0.1초 줄일 만큼 재능이 없다는 건데, 기록이 좋아질지 어쩔지 전혀 기약없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1년을 달렸다는 거지요. 그 바보 자식.

  6. 사은 2007.08.23 04: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베, 실은 H2 등에 대해서 아 그렇고나- 하고 무심하던 제가 아다치 월드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바로 요 작품입니다. 순전히 우리나라 정서에 안 맞는 바로 저 구도 때문에- 부끄럽게도요. (웃음) 그러고보니 아다치 작품의 일관성은 아주 옛, 터치나 그 이전의 것들 때부터 굵고 길게 이어져오고 있군요. 그래서 편하기도 하고, 그런데 식상하지 않다는게 신기합니다. :)

    그래놓고 제 결론은 결국 멋지다 히루마, 힘내라 데빌배츠! 되겠습니다.

  7. 파렌 2007.08.23 0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바보인건지, 아다치 선생님이 누구신지는 몰라도 저 대사, 참 마음에 와닿네요.
    그래도 어찌되건 아이실드 애정애정 견습기사님께 무한 박수 /짝짝짝<<뭐야

  8. 견습기사 2007.08.23 1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은님/ <진베>는 제가 아직 인생경험이 까마득하게 부족해서 그런지 이해가 되면서도 안 되네요. 이럴 때면 제가 꽤 보수적인 편이란 걸 확인하는 것도 같고요. ^^;; 아다치 작품의 매력이 그거 아니겠습니까, 매번 비슷한 외형의 캐릭 비슷한 소재 비슷한 개그가 이어지는데도 '그러니까 아다치 만화'라며 즐겁게, 또는 감동하며 볼 수 있다는 것이..

    파렌님/ 아다치 미츠루라는 만화가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그분의 대표작인 <터치> <러프> <H2> 정도는 어느 책방에나 있으니 이 김에 그 세계를 맛보심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