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J. L. 본 (황금가지, 2009년)
상세보기

한 번 신청해본 렛츠리뷰가 어째선지 당첨되어 공짜로 책을 얻었으니, 그에 상응해 감상을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미리니름은 최대한 제하고.

나는 좀비물에 별 관심이 없다. 좀비가 다뤄지는 영화는 킬링타임으로 몇 편 봤지만 소설로 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좀비와 그것을 다루는 장르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찾아보니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정의는 나오지 않았다. 시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돌아다니며 산 사람을 물어뜯는다는 핵심만 유지된다면, 그 밖의 것은 온전히 창작자의 상상과 변용에 달린 모양이었다. 내가 접한 몇 안 되는 좀비 영화들에는 그 밖에도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었다. 발생(또는 발병) 원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주인공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좀비, 그리고 같은 인간들에 맞서며 살아남는 것 자체가 핵심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이 이성과 도덕을 걷어낸 짐승의 모습으로 변할지,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 죄책감 없이 인간 유사한 적들을 박살내며 시각적 쾌감을 선사할지, 세상에 오직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 같은 고독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끝없이 자문할지, 아니면 그저 무력한 희생물이 되어 목숨만 부지하고 쫓겨다닐지, 기타 등등의 행보는 창작자의 취향에 의존했다.
이 소설의 경우에는 그냥 생존에 대한 '일기'였다.
주인공이 살아오면서 익혀온 것들을 바탕으로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해치우는 걸 보면 재앙이 닥쳤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시 아무거라도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교훈(?)이 절절이 느껴진다. 미국이 좀비를 일소하기 위해 대도시에 핵을 퍼부었는데 생존자들만 박살내고 정작 좀비들은 더욱 상태가 좋아지는 아이러니는 재미있는 소재였다. 그 밖에는 그다지 눈여겨볼 거리가 없었다. 주인공이 군인이며, 일단 피보호자들을 보호하면서 생존해야 한다는 '임무'가 생기자 그 밖의 것들은 머릿속에서 치워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편이 당사자들의 정신건강에는 대단히 바람직하리라.) 그보다는, 이 이야기가 이제 시작에 불과해 보인다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5개월 정도 분량에 해당하는 일기는 좀 더 거대하고 복잡한 이야기가 얽힐 것 같은 기미를 보이면서 갑자기 끊겼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단지 생존하기만 하는 것 이상의 뭔가를 들려주고 싶은 듯한데, 이 책 한 권만을 손에 쥔 지금의 나에게는 더 이상의 정보가 없다.
좀비물은 일종의 장르 소설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좀비물이 그 장르의 팬들에게 어떤 코드를 써서 통용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팬이 아닌 사람도 읽어서 생각할 거리를 얻거나 이야기 자체로 재미를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내 경우가 그랬다. 별 것 없는 '일기'지만, 이 소설은 꽤 재미있었다. 주인공들이 그간 픽션 속에서만 다뤄지던 '좀비'라는 존재가 막상 현실화된 것 자체에는 전혀 놀라지 않는 게 우습긴 하지만, 그런 것을 접어두고 보면 급박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유지하며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멋진 남자의 이야기가 보인다. 주인공의 '일기'에 대한 전체적인 평은 후속작이 모두 나오고 나야 할 수 있겠지. 이 한 권만 놓고 보면 머리가 복잡할 때 우직하게 시간을 죽이는 데엔 더없이 좋아 보인다.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