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어즈 애니 10주년 기념으로 신곡 meet again이 나올 무렵, 내가 파악하고 수집한 슬레 노래는 60여곡 가까이 되었다. 나는 그 중에서 절반 이상을, 거짓말 안 보태고 진짜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워서 부를 수 있었다. 내가 중딩 때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익힌 것이 저 슬레 노래를 외워서 써보기 위해서였으니 말 다한 거지.
얼마 전, 별것 아닌 계기로 리나가 생각나서 모처럼 슬레 노래를 불러보았다. 그때 불러본 게 트라이 엔딩인 don't be discouraged였다. (somewhere를 트라이 엔딩으로 아는 분들이 많던데, 그건 정확히는 피리아의 이미지송이다. 엔딩은 이 곡이다) 아닛 그런데 이 폭발하는 신나는 곡을 잘 부르다 꺽꺽 막히는 것이다. 단어가! 가사가!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서! 이럴 수가?! 황당해서 기억나는 대로 다른 슬레 곡들을 불러보았다. 결과는 좀 비참했다. 다 기억하는 곡이 give a reason, secret, touch yourself, never die, breeze, don't be discouraged, somewhere 일어/영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버벅이지 않고 매끄럽게 기억해낸 건 never die와 breeze 뿐이었다. 맙소사. 내가 가장 좋아한 곡이 give a reason인데 왜 버벅거리는 거지? 두번째로 좋아했던 just be concious는? 전장의 마돈나는 어찌 됐어? 극장판 노래들은 왜 제목조차 생각이 아니 나는고!;;;
꽤 오랫동안 슬레를 잊고 살았구나 싶었다. 하기야, 레볼/에볼 때 타격이 컸다. 그때 의식적으로 '슬레 티비 시리즈는 트라이가 끝, 그대는 추억의 애니'라는 딱지를 붙여 흐리멍텅하니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그 후로는 슬레를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예전에는 홈페이지에 내가 수집한 슬레 노래들의 가사와 해석과 감상을 줄줄이 올렸더랬다. 재개장하면서 혹시라도 저작권 문제가 생길까봐 그 페이지를 내렸다. 지금 하드 한 구석에 처박혀있는 그 html 파일들을 둘러보니 아련하면서 씁쓰레한 맛이 난다. 씨디와 디비디는 모두 본가에 있어서 당장은 음원을 들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아마 넥스트 디비디를 샀다고 신이 나서 난리를 쳤던 2000년대 초반 무렵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사를 보는 것만으로 전주부터 서서히 기억이 살아나고 있다. 그때의 애정과 열기에 대한 기억도 같이 살아나고 있다. 나에게 있어 슬레이어즈는 여러 의미에서 참 난감한 녀석이다. 뭔가 간헐천 같다. 어느 시기에 미친듯이 끓어올랐다가 조용히 식어버기리를 반복하며 벌써 15년째 마음의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뭐 이런 녀석들이 다 있어. 하기야, 그러니까 리나 인버스가 내 마음의 신전에서 최상위에 봉헌되어 있는 거지만.



시끄러 인마. 지금은 삼덕질 할 거야. 너 인마 날 방해하지 마라 나 그 노래 아직 기억한다 요 녀석아!
Posted by 양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