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현 미스테리
어이고 제갈씨가 내 여가를 다 해먹네
<오서 제갈근전>
제갈근은 ... 낭야군 양도 사람이다. 한나라 말에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이주했다. 마침 손책이 죽었다. ... 노숙 등과 함께 빈객의 대접을 받았고 ...
(파성넷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190년대에 서주에서 난민이 발생할 만한 사건이란, 크게는 대략 셋 정도가 떠오른다. 193년, 194년에 각각 있었던 조조의 1, 2차 서주학살과 198년 여포 정벌이다. 1차 때는 대략 동해와 하비를 중심으로 서주의 남부가 박살난 듯하고, 2차 때는 북부의 낭야부터 아래로 치고 내려가는 형국으로 서주의 대부분 지역이 휩쓸렸다. 한편 여포 정벌 때 주로 전장이 된 곳은 하비다.
(일전에 삼갤의 모 님께서 학살이 일어난 과정과 시기, 지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일이 있다. 1차 때 하비가 박살났다는 기록은 여포 정벌 때 일어난 일이 시대를 혼동해 적힌 것일 가능성을 언급했던 것 같다. 나는 여러 사료를 교차검증하면서 신뢰도를 따지는 수준은 못 된다. 내가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그런 의견도 있더란 것만 적어둔다.)
제갈씨 일가가 190년대에 낭야 양도에 있었다면 1차 서주정벌이 끝난 직후 일찌감치 도망쳤거나, 어영부영하다 2차 때 남쪽으로 밀리면서 형주나 양주 방면으로 피난길을 택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때 양주 방면으로 갔다가 제갈현이 원술에게 걸려 예장에 가게 된 건지도 모를 일이고. 문제는 제갈근이다. 제갈현이 예장에 부임할 때 데려간 조카는 제갈량과 제갈균이었다. 195년 기준으로 이미 만 21살이었던 제갈근은 이때는 행동을 함께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갈근전을 보면 제갈근이 강동으로 넘어간 것은 손책이 사망한 서기 200년과 가까운 시간대라는 생각이 든다. (진수의 삼국지에 '마침'이라던가 '그때'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해서 꼭 바로 그 즈음 그 시기를 의미하진 않는다.) 즉, 제갈근이 "후한말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이주"하게 만든 사건은 198년 여포 정벌일 가능성이 높다. (199년 조조가 서주의 유비를 친 일도 가능성은 있는데, 당시 유비는 예주의 소패에 주둔했고 서주 하비에는 관우가 있었다. 원소를 앞두고 배후부터 정리하려 했던 조조는 속전으로 유비부터 패고, 관우는 투항시켰다. 이쪽은 난민이 발생하기엔 짧은 시간에 끝났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제갈근은 계속 서주에 남아있었다는 이야기. 그것도, 하비 어딘가였을 확률이 높다. 한편, 하비 남부에는 회수가 흐르는데 이 강을 건너서 조금만 내려가면 회남 지역이다. 193년부터 원술이 차지한 바로 그곳이다.
이쯤에서 취존실드의 가호 아래 망상을 전개해보자면, 내 머릿속에서는 제갈근과 제갈현이 피난길을 두고 다퉜을 가능성이 떠오른다. 제갈현은 무슨 이유에선지 원술이 지배하는 회남으로 가고자 했고, 제갈근은 그런 숙부에게 반대해 끝끝내 고집을 부려 서주에 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성인이었던 제갈근의 눈에는 벌써 원술의 싹수가 보였던 것일까...
뭐어, 그냥 아비규환의 난리 중에 이산가족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경우에는 제갈씨가 형주에 자리를 잡은 후 제갈근을 부르지 않은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제갈각이 태어난 게 203년인 걸 보면 제갈근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건 손권에게 사관한 200년 후의 일일 거란 생각이 든다. 그 전까지는 형주에서 부르려면 얼마든지 부를 수 있었으리라. 어차피 망상질이니까 망상에 망상을 더해 일전에 저지른 제갈현에 대한 망상추측을 끌어들여보자. 제갈현은 장조카 말을 무시했다가 창피를 당한 처지에 다시 만날 면목이 없어 앓아누운 채로 세상을 하직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제갈근은 제갈근대로 숙부가 당한 꼴을 알고 속이 상했는데 오비삼척인 처지라 동생들을 데리러 갈 수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형주로 가면 배고픈 입만 더하는 꼴인지라, 혼자 살아볼 길을 찾으며 서주에 눌러있다가 여포 문제로 하비에 난리가 나자 강동으로 넘어간 것일지도. 오, 망상이 뭉게뭉게 솟는다. 여기까지 망상을 전개하고 보니 내 안의 제갈근은 자기도 그 제갈씨라고, 고집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그러고 보니 일단 제갈근이 설득에 들어가면 손권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한 적이 없었던 듯. 실드에 실패한 건 우번 정도인가.
여담 하나. 제갈근이야 능력만 있는 게 아니라 훌륭한 인격도 갖추어서 그 손권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고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만, 자식들은 조조네가 그렇듯 아버지로부터 뭔가 한두 가지 특성만 특화한 형태로 물려받은 느낌이다. 그 댁의 잔망스런 집안 망칠 놈이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일 리는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