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욱, 순문약

三國志妄想 2011. 5. 20. 16:33
다른 블로그에서 역성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든 잡생각인데.
헌제가 "방벌"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은 그만한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제는 어릴 적엔 동탁 같은 자들에게 잡혀 사느라, 커서는 조조에게 잡혀 사느라 자신에게 직접 책임이 있는 뭔가를 할 기회가 없었다. 동탁이나 이각, 곽사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명백히 악당들이고, 문제는 조조다. 조조는 유능했으며, 자신이 다스리는 구역에서는 악정을 저지르지 않았다. 혹시 헌제에게 인격적인 문제가 있었다 해도 조조 같은 인물이 조정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이상에는 걸주 같은 '폭군'이 등장할 수 없다.
그리고 조조에게 헌제를 모시도록 제안한 사람은 순욱이다.


feat. 헌제를 각성시키기 위해 제 주군까지 이용해먹은 화봉요원의 진정한 복흑 천재


조조가 헌제를 모신 196년 무렵 헌제는 겨우 만 15세였다. 그 전에도 헌제는 이각 곽사 문제와 천재지변 크리가 겹쳐 먹을 게 없는 장안에서 백성들에게 가는 배급식량을 횡령한 자를 직접 찾아내 처벌하는 등 평균보다는 영민한 티를 내긴 했다. 그렇지만 애는 애다. 하다못해 동탁조차도 젊은 시절에는 악한이 아니었다. 나라는 쇠약해지고 황실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진 그때 장성한 헌제가 평균 수준의 천자로 군림했더라면, 혹은 조고 같은 진짜배기 간신에게 잡혀 실정을 저질렀더라면, 그때까지는 "한실을 위해" 라는 명분을 걸고 땅따먹기에만 열중했던 군웅들이 폭군의 "방벌"을 외치며 천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쳐들어갔을 것이다. 한나라가 헌제의 대에 멸망하는 것은 천명이 떠나간 폭군을 백성이 원해 처벌한 것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조가 있었기에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협천자를 통해 조조는 천자의 어명이라는 명분과 인재를 끌어당길 미끼를 갖췄다. 한편으로 헌제는 조조라는 '능신'에게 업혀 폭군이 될지도 모를 미래에서 벗어남으로써 "방벌"의 오명을 피했다. 그때문에 조조는 조정을 장악했지만 헌제와 한실을 타도할 수는 없었다. 조조가 유능할수록 한실은 타도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갔다. 방벌의 형식을 취할 수 없으니 선양의 형식을 택한 조비는 찬탈자로 욕을 먹지 않았던가. 순욱이 살아있을 때는 어쨌거나 한실이 무사했고, 그가 죽고 나서도 한실은 마지막 명예만이라도 보존했다.
협천자의 진정한 의도는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순욱은 처음부터 한나라의 충신으로서 조조를 이용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Posted by 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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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침향 2011.05.20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마지막 명예가 참으로 오래갔지요(......)
    그리 본다면 순욱은 진짜 결국 한나라 자체에 대한 충성의 방도로 조조를 이용한 셈이 되겠네요=.=그리고 조조에게는 가장 단단한 백그라운드를 제공한 셈이고...허나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진즉에 던져버린 조조로서는 순욱이 곱게 보일리가 없었...으니까 빈 찬합을 줘버렸겠죠?(............)

    그런데 뭐랄까, 그러한 생각 아래 순욱을 다시 보니, 연의에서 '그래도 순욱은 한의 충신(아니 이문열 평역 버전에만 나온 말인가)'어쩌고 하는 말이 좀 다르게 들리네요. 명예를 위해 한나라(와 헌제까지)를 일종의 박제 처리를 해버린 셈이 되니...

    ...야구를 거르니 심심하군요(휴우)

    • 양운 2011.05.20 1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생각에, 저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순욱은 정말로 한나라를 중흥시킬 생각이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실권자는 조조인 탓에 헌제가 상징일 뿐인 천자에 불과하게 되었지만, 한나라 자체가 이미 영제 이전부터 엉망진창으로 굴러갔던 걸 생각하면 극약처방이었을지도 모르지요. 헌제 때는 능력자 조조에게 양보하고, 일단 백성의 삶을 안정시켜 땅에 떨어진 한실의 위상을 회복한 다음, 헌제 다음 천자부터 멀쩡하게 한실의 실권을 되찾는다는 식으로요. 어쩌면 조조도 처음에는 순욱과 뜻을 같이 했을지도 모르지요. 원소가 은근슬쩍 천자를 우습게 여기는 행동을 하던 시절, 조조는 원소를 진심으로 증오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날 순욱 앞으로 누군가가 다 까먹은 도시락이 도착하는데...

      야구가..! 야구가 보고 싶어요 안선생님! 야구가..! 그러고 보니 롯데 쪽은 오늘부터 엘꼴라시코라면서요? 이쪽은 오늘 현진이 등판 예정이었습니다. 우리 마운드엔 서쟁이었으니 아마도 음... 싶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