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1, 2차 서주출병 당시의 진격로에 관해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참고할 수 있는 사서로 후한서/위서 도겸전, 위서 무제기, 위서 조인전, 조만전 정도가 생각난다. 이상의 기록들은 언젠가 삼갤의 어느 능력자 횽이 지적한 것처럼 우선 등장하는 사건들의 시기가 1차인지 2차인지 불분명하고 지명에 대한 언급도 조금씩 충돌하는 데가 있다. 그 능력자 횽은 5세기에 기록된 범엽의 후한서가 이 대목에 한해서는 조만전 등을 그냥 베낀 2차 사료로서 신뢰도가 떨어질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으니 원. 나는 정리할 엄두조차 안 나니 그 부분은 손대지 않을 생각이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것은 조조가 193년, 194년 두 번 출병했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학살이 분명 일어나긴 했더라는 것 정도다.
서주출병이 이후의 중국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 쭉 생각해봤다. 진수의 삼국지를 보다 보면 서주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사관한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대개 '한말의 난을 피해서'라고 두루뭉술하게 언급할 뿐 어떤 시기, 어떤 전란을 만난 것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이 서주를 떠난 이유는 190년대 중반 조조의 출병과 학살 때문일 수도 있고, 190년대 후반 유비와 원술에 여포, 끝판대장 조조까지 끼어들어 난장판이 된 서주의 혼란상 그 자체 때문일 수도 있다. 진수의 삼국지만으로는 그것을 명백히 알기 어렵다.
그러니, 삼국지에 개인 열전이 있는 서주 사람들이 대략 어느 시점에 어떤 과정을 거쳐 어느 나라에 사관했는지 정리하는 작업을 해볼까 한다. 이것은 조조가 출병한 193년부터 유비가 쫓겨나는 200년까지 서주에서 벌어진 혼란상이 서주와 서주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대략적으로 추측해보기 위해서다. 일전에 190년대의 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한 것도 이 포스팅을 끄적이기 위한 밑작업이었다.
후한서와 진서까지 망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이다. 파성이 폭파되어 김원중 역 삼국지를 봤는데 하루 좀 집중했다고 머리가 아프고 눈이 괴롭다. 으아아아
괄호 안의 지명은 주, 군국, 현 순서다. 진수는 기본적으로 서진시대의 지명을 기준으로 썼기 때문에 지도 보기 혼란스럽다. 지금 살펴보려는 시대가 193~200년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때에는 아직 후한이 살아있었다. 따라서 주와 군국의 지명이 서진식으로 되어있으면 후한의 지명을 병기했다. 단 현 단위로 내려갈 경우 삼국시대 내지 서진시대에 새로 설치된 곳일 수가 있다. 그것까지 찾아보긴 힘들다. 중요한 것은 어느 '주' 출신인가이므로, 현은 진수가 쓴 그대로 썼다.
ex> 방통(형주 양양군 양양현→형주 남군 양양현) 화살표 왼쪽은 서진, 오른쪽은 후한 지명
이런 순서가 되는 것 같다. 익주와 교주는 한 명도 없다.
이중에는 원씨들이나 여포가 그렇듯 조위에 사관하는 것과 관계 없는 사람들이 있고, 서주 사람들의 경우에는 다음 포스팅에서 좀 더 살펴야 할 내용물이 있다. 대충 위나라와 관련해 열전을 남긴 사람들은 출신지 분포도가 이렇구나 정도로 생각해야 할 듯하다. 여하튼 결론은 더러운 영천 다단계(...)
양주 34 > 서주 10 > 청주 예주 5 > 형주 연주 3 > 유주 2 > 익주 사례주 1
양주 출신이 독보적이다. 그만큼 양주의 호족과 토박이들의 입김이 강했으려니 싶다. 하나같이 피난민 기록을 달고 있는 서주 사람들은 대부분 중용되거나 손씨와 가까운 자리를 차지했다는 게 눈에 띈다. 양주와 정반대방향인 기주, 량주, 병주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손견은 뭘 하고 다녔기에 저 북쪽의 유주 사람들까지 만난 건가.;
제갈각의 출신지 기록이 없는 게 은근히 골치 아프다. 이것도 다음 포스팅으로 넘긴다.
과연 촉나라는 형주인사와 익주인사가 먹여 살렸구나. 그 두 집단에 비하면 유비를 비롯한 올드비들은 다 합쳐도 소수라는 게 무척 신기하다. 은근히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구나 싶다. 여기까지 흘러간 서주 사람은 여포한테 뒤치기 당한 유비를 재산 털고 누이동생까지 맡기며 지원한 대인배 미축, 그리고 무후 뿐이다. 미축은 처음부터 유비를 따랐고 제갈량은 양주를 찍은 다음 형주로 갔으니, 다음 포스팅에서 좀 더 보겠지만 190년대의 서주 사람들은 역시 대부분 양주 쪽으로 피난을 간 모양이다. 양주, 교주, 병주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뭔가 외로워 보인다, 상산남자. 유비가 공손찬 시절까진 쭉 하북에서 일했고 관도대전 무렵에는 잠깐이지만 원소와 동맹이었던 적도 있건만 하북 사람이라곤 관장조 같은 골수분자들 밖에 남지 못한 건가. 특히 인구수가 제일 많은 기주. -_-; 기주 사람들이 잠깐 공손찬에 흔들렸다가 죄다 원소 따라가고 원씨가 망한 다음엔 조조 따라가던 시절에 혼자 꿋꿋이 유비를 쫓아간 상산남자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