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롤 압박이 좀 있을 겁니다.
파성이 없으니까 검색질 한번 하려면 푸념만 나오네요.
청주는 180년대부터 황건적의 난에 시달렸다. 190년대 초 유주의 공손찬이 황건적을 밀어붙이며 청주에까지 세력을 뻗는데, 그 땅은 원소 역시 노리던 곳이었다. 2년여의 접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청주는 두 세력이 "서로 백성을 약탈하였으므로 들이 황폐해져 풀 한 포기 남지 않(후한서 공손찬전)"을 지경에 처했다. 190년대 중반에 원소의 장남 원담이 청주자사 전해와 북해상 공융을 축출하면서 한때 청주의 전란이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관도대전을 앞두고 조조군의 장패가 청주를 공격해 다시 전장이 되었다. 청주의 전란은 204년 말 조조군이 평원을 점령하고 205년 초 원담을 참수함으로써 비로소 끝났다.
연주 역시 황건적의 난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2년 청주에서 100만명 이상의 황건적이 연주로 넘어온 일일 것이다. 이들과의 싸움에서 무려 두 개 국(國 : 임성, 제북)의 상(相)과 연주의 자사가 죽었으니 민간에 끼친 피해규모가 어떠했을지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당시 조조는 원소의 천거로 연주 동군태수가 되어 황건적의 한 갈래인 흑산적과 싸우고 있었다. 연주자사 유대가 죽은 후 제북상 포신은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해 황건적과 싸웠다. 192년 가을에는 마침내 황건적이 항복하고, 겨울에는 그들 중 정예를 병졸로 거두었다. 이들이 그 유명한 청주병이다. 그 후 연주에서 일어난 중요한 전란은 194년 진궁과 장막의 배반으로 조조가 연주를 거의 잃을 뻔한 사건과 200년을 전후해 벌어지는 관도대전이다.
예주는 곧장 낙양과 맞닿은 지역이다. 파성이 터진 고로 검색이 어려워져서 황건난과 관련해 예주에서 일어난 일은 잘 모르겠다. *추가 : 무제기에서 광화(178~183) 말 조조가 영천의 황건적을 토벌한 기록을 찾았다. 예주의 다른 지역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다시 추가. 무제기, 허저전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196년까지는 황건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것은 영천의 순욱이 기주로 피난을 간 이유가 황건난이 아니라 동탁의 전횡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영천은 사방에서 전쟁터로 변할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천하에 변란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군사들이 충돌을 했으므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래도록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순욱전)" 라던 순욱의 말은 얼마 안 가 동탁이 보낸 이각이 영천과 연주 진류군에서 벌인 만행으로 증명되었다. 그 후 조조가 여포로부터 연주를 되찾고 예주 공략을 시작하는 195년 말까지예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황건적이 날뛰고 원술도 살그머니 세력을 뻗친 것으로 보인다.(무제기, 허저전) 어찌 됐든 196년에는 헌제가 장안에서 도망쳤고, 조조는 헌제를 맞아 예주 영천군 허현으로 천도할 것을 권했다. 그 후에는 원술이 조조 또는 유비를 상대로 꾸준히 집적거리거나 여포가 패국 소패의 유비를 공격하거나 원소와 연합한 유비가 예주 여남군에서 거병하는 외에는 별다른 큰 전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적어놓고 보니 다 굵직한 사건이긴 하지만.;
서주는 낙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황해에 접하는 위치 덕에 다른 세 주에 비해 비교적 동탁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자치통감에서 "애초에 경(사례주 하남윤 경현), 낙(낙양)은 동탁의 난을 만나서 백성들이 떠돌아 다니다가 동쪽으로 빠져나가 많은 사람이 서주 땅에 의지하였"다고 기록했고 조조의 부친인 조숭 또한 서주 낭야국으로 피난을 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190년대 초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으려니 짐작된다. 황건적의 경우에는 서주자사로 부임한 도겸이 대파해 패주시키고 경내를 안정시켰다는 기록이 있다.(후한서 도겸전) 도겸의 관직변천을 보면 유주자사였다가 중앙으로 불려갔으며 한수를 토벌하러 서쪽에 갔고, 그후 서주자사로 부임했다.(위서 도겸전) 후한서 영제기를 보니 중앙에서 한수를 토벌하려 했던 게 187년의 일이다. 따라서 도겸은 180년대 초에 유주자사를 역임했고 180년대 후반에는 서주로 가 황건적을 물리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찌 됐든 위서 도겸전의 기록 순서를 따른다면 동탁이 낙양에 들어가기 전에 서주는 이미 안정되어 있었다.
그랬던 서주에 본격적으로 전란이 일어나는 것은 193년 조조의 출병 때부터다. 193년, 194년 두 차례에 걸쳐 조조가 도겸을 공격했고,195년에 손책이 장강 북쪽에서 발이 묶인 양주자사 유요를 공격했고수정: 웹에서 후한서 원술전을 찾아내지 못해 지금 확실하진 않은데 -_-; 효헌제기를 보니 유요와 원술은 강동, 즉 양주에서 장기간 싸웠고 194년에 손책이 유요를 공격해 양주 남부로 밀어냈군요. 그 과정에서 유요가 예장에 주호를 보내긴 했지요(195). 손책은 아직 서주와는 관련이 없군요. 아오 파성넷 컴백 플리즈! 196년에 원술이 유비를 공격했으며, 유비와 원술이 대립하는 틈에 여포가 들어왔다. 198년에는 조조와 유비가 여포를 공격했고, 199년에는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공격했고, 얼마 안 가 조조가 유비를 공격했다. 결국 200년에 조조가 예주 소패의 유비를 깨고 서주 하비국의 관우를 항복시키고서야 서주가 잠시 조용해졌다.
2. 시기별 각 지방의 세력 변화
192년부터 각 시기별로 중원 근처에서 네임드 군주들의 위치를 대충 짚어 보았다. 이런 건 자치통감을 참고하면 될 텐데 당장 수중에 그 책이 없어서 웹에 흩어져있는 진수의 삼국지를 중심으로 얼추 짜맞췄다. 오류가 있는 부분이 반드시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아낌없는 지적 부탁합니다.)
192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장연?(흑산적) / 유주-공손찬(유우는 군주가 아니므로 제외)
사례주 : 동탁→여포→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청주자사 전해, 평원상 유비) / 연주-유대→조조 / 예주-? / 서주-도겸 / 형주-유표vs.원술
장강 이남 : 양주-?
193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장연?(흑산적)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전해, 유비) / 연주-조조 / 예주-? / 서주-도겸 / 형주-유표
(이 무렵 여포는 이각, 곽사를 피해 도망쳐 원술→장양→원소→장양 순으로 유랑)
장강 이남 : 양주-?→원술
194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전해) / 연주-조조vs.여포 / 예주-? / 서주-도겸→유비 / 형주-유표
장강 이남 : 양주-원술(손책)
195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전해) / 연주-조조vs.여포 / 예주-원술, 황건적, 기타 등등 / 서주-유비 / 형주-유표
장강 이남 : 양주-원술(손책)
196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전해)→원소(원담) / 연주-조조 / 예주-원술->조조 / 서주-유비→여포 / 형주-유표(장수)
장강 이남 : 양주-원술, 손책
197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원소(원담) / 연주-조조 / 예주-조조(유비) / 서주-여포 / 형주-유표(장수)
장강 이남 : 양주-원술vs.손책
198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원소(원담) / 연주-조조 / 예주-조조(유비) / 서주-여포→조조 / 형주-유표(장수)
장강 이남 : 양주-원술vs.손책
199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원소
황하 이남 : 청주-원소vs.조조 / 연주-조조 / 예주-조조 / 서주-조조→유비 / 형주-유표
장강 이남 : 양주-원술→손책
200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원소
황하 이남 : 청주-원소vs.조조 / 연주-조조vs.원소 / 예주-조조 / 서주-유비→조조 / 형주-유표
장강 이남 : 양주-손책
3. 전란의 성질과 규모
190년대에 네 개의 주에서 일어난 전란은 그 성질과 규모도 제각각이었다.
청주는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던 시절부터 원씨가 황하 이남에서 완전히 축출될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쭉 전역 상태였다고 여겨진다. 황건적의 난까지 더하면 더 먼 시기로 소급될 것이다. 연주로 넘어간 청주 황건적의 규모와 구성까지 생각하면 원소와 공손찬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전부터 상당히 황폐해진 상태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연주는 청주 황건적의 침입과 진궁, 장막의 배반으로 주 전체에 걸쳐 큰 위협을 받았다. 관도대전 때는 전선이 황하 유역에 한정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주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주 전체가 전란의 영향권이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연주에서는 늘 전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터지면 규모가 어마어마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연주가 조조의 유일한 근거지였던 190년대 전반에는 조조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방어적인 전투가 주를 이루었고, 협천자를 한 190년대 후반부터는 천자가 있는 허도를 보호하기 위해 하북의 원소에 대한 방어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연주가 안정되는 것은 조조군이 황하를 건너 기주로 진격해 더이상 최전선 노릇을 할 필요가 없어진 후의 일이다.
예주는 196년까지 황건적 피해를 입은 듯한데 일단 조조가 들어온 후로는 유비 시절의 소패나 원술이 쳐들어간 진국처럼 특정한 지역에 전투가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전투가 벌어져도 단기적인 국지전으로 그친 것 같다. 여포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소패는 위치상 연주와 예주에서 서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전과는 신통치 못했지만 유비가 소패를 중심으로 예주와 서주 하비국 방면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원술과 여포가 회남 또는 서주에서 예주 안쪽으로 침범하진 못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속사정이야 어찌 됐든, 조조가 연주를 전장으로 만들어 예주를 지킨 것처럼 유비 또한 소패와 하비에서 싸워 결과적으로 예주 전역이 전장이 되는 것은 막았다. 북쪽에는 연주목 조조, 남쪽에는 예주목 유비를 거느리던 190년대 후반의 헌제는 좀 쩌는 듯. 헌제 본인이 잘나서 그렇게 된 건 아니지만. 갑자기 의대 사건 때 조조가 제대로 빡친 걸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_-;
서주 북부는 조조의 194년 출병 외에는 크게 위협을 받지 않은 듯하다. 물론 북부가 194년 외에 늘 조용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연주 태산군 출신의 장패는 작은 군벌들과 병력을 모아 낭야국 개양에 주둔하며 조조에 맞서 여포를 지원한 일이 있다.(장패전) 어찌 됐든, 북부는 대체로 조용했던 것 같다. 조조에게 항복한 후 낭야상이 된 장패가 관도대전의 백업을 위해 청주를 칠 때도 전장은 서주 낭야국이 아니라 청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남부는 193년부터 하비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 여러 세력이 어지럽게 뒤채는 전역 상태였다. 조조, 유비, 여포, 원술이라는 네임드 군주들이 모두 서주를 노리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청주의 전역이 안정된 두 세력간의 긴 힘겨루기였다면 서주 남부의 전역은 여러 군소세력간의 단기 단판승부의 연속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장기전략가가 없었던 유비, 여포, 원술은 모두 여기서 떨어져나갔다.
여담인데 장기전략가의 중요성은 순욱전의 기록 하나만 봐도 나온다. 연주를 턴 여포를 아직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도겸이 죽었을 때 조조는 여포는 내버려둔 채 서주부터 마저 정복하려 했다. 순욱은 서주학살의 기억으로 서주 사람들이 절대 쉽게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점 등을 지목하며 우선 연주를 회복하고 여포를 친 후 원술을 잡아야 한다고 진언했다. 조조는 순욱의 말을 따랐다. 도겸이 죽은 것은 194년 말이고 원술이 패망하는 것은 199년이니 순욱은 적어도 4, 5년 앞을 보고 조조가 취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
4. 193년의 서주와 조조에 대한 잡담
큰 강은 세력 간에 경계선 내지 방어선으로 삼기 좋다. 청주는 황하, 서주는 장강을 낀 지리적 위치 탓에 여러 세력이 충돌하면서 오랫동안 전역이 벌어졌다. 그런데 양쪽에서 벌어진 전쟁은 양상이 달랐다. 아마도 서주가 네 개의 주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평화로운 곳이었던 게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위치 탓이다.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십상시가 권력을 가졌을 때는 낙양이 중심지였고, 동탁이 권력을 가졌을 때는 낙양에서 서쪽의 장안으로 가는 동탁의 행보에 만인이 휘둘렸다. 동탁이 주살당하는 192년, 동탁의 뒤를 이어 장안에 들어온 이각, 곽사는 천자를 갈아치운 동탁과 같은 힘을 갖지 못했기에 더이상 사건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그 무렵에는 하북에서 벌어지는 원소와 공손찬의 다툼이 세간의 가장 큰 화제였을 것이다. 군주나 군주 후보들이 하북을 중심으로 움직였을 거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때까지만 해도 처지가 비슷했던 조조(원소 휘하의 동군태수)와 유비(공손찬 휘하의 평원상)는 천자가 있는 장안이 아니라 하북 또는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192년 유비는 평원상으로서 청주에 있었고 조조는 사실상 연주목을 대행하며 연주의 동쪽 접경인 청주를 경계했다. 여기서는 전란으로 청주가 황폐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서주는 청주의 동쪽 아래에 붙어있지만 원소와 공손찬의 세력이 직접 부딪치는 곳은 아니었기에 아직 조용했다.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난 위치였던 것이다.
193년 무렵에는 여전히 사건의 중심지가 하북이었다. 황하 이남에서는 슬슬 군웅할거시대의 낙오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 땅이 있었지만 패배해 밀려난 군주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원술과 여포다. 아직도 남의 밑에서 뜻만 키울 뿐 자기 땅을 갖지 못한 군주가 있었다. 유비와 손책이 그랬다. 기회는 탔지만 아직 세력이 작기에 더욱 세를 키우고자 한 군주도 있었다. 조조였다. 군웅할거시대의 초기에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다른 군주에게 밀려나 땅을 잃은 군주들에게는 빈번한 전란으로 엉망이 된 다른 지역과 달리 아직도 풍요로운 서주가 주인에게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덤벼들 가치가 있는 보물창고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동탁의 집권기 때 낙양으로부터 먼 거리 덕에 전란을 면한 것이 이 무렵부터 독으로 바뀐 것은 아닐까?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193년에 있었던 조조의 서주 출병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은 단순히 군주들간의 영토다툼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사건의 중심지를 하북에서 황하 아래로 끌어내림으로써 조조라는 인물이 사건을 만들고 주도하게 한 첫 계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조조가 서주를 공격한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본다. 2번에서 보았듯이 사방에는 적 뿐이고 기반은 빈약하며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연주 하나만을 가진 상태에서 조조가 쉽게 세력을 뻗을 수 있는 땅이 없었다. 서주의 풍요로움은 만성적인 군량부족에 시달리던 조조군에 크게 보탬이 될 것이다. 공손찬의 동맹을 공격하는 것이니 표면적으로 조조의 동맹인 원소에게도 득이 될 일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남과 북에 있는 원씨들이 연합할 길을 끊고 각개격파까지 노릴 수 있다. 어쨌든 원술은 예전부터 조조에게 간단히 박살나주던 고마운 상대였다. 서주가 가진 이점은 서주목 도겸이 이미 쥐고 있으며 군사적으로 아주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기에 조조로서는 절친한 벗이라 생각한 장막에게 가족을 맡겨가며 비장하게 출전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조조가 서주에서 양민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경작자를 죽여 없애고 주인 잃은 경작지를 청주병들에게 나눠주려 했다는 추측은 부족하게 들린다. 100만 청주병에게 땅을 나눠줘 그들의 충성을 사는 것이 낙양 등지에서 피난온 교육받은 인구와 서주의 문화적 인프라가 키워냈고 키워낼 인재들, 그리고 여태껏 조조가 쌓아온 명성을 잃는 것보다 이득이 되는 계산일까? 긍정하기 어렵다. 차라리 화봉요원에서처럼 일부러 학살된 양민의 수를 크게 부풀려 공포감을 조성함으로써 나머지 성에 무혈입성하려 했다는 설명이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두 차례에 걸쳐 서주에 출병할 때마다 살육이 일어났고 여포 문제로 연주에 돌아가면서 또다시 살육을 저지른 게 설명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물론 진모는 역사책 조까를 외치는 사람이니까 그런 해석도 맘대로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고.)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진 않다. 내가 궁금한 것은 조조가 왜 서주에서 학살을 벌였느냐가 아니라, 거기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다. 다른 분들도 지적한 것인데 서주학살을 다루는 사서 간에는 조금씩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서주에 출병한 것 자체는 저 시대에 문제삼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니 어디까지가 서주를 평정하기 위한 군사활동이고 어디서부터 양민학살이었는지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파성이 없으니까 검색질 한번 하려면 푸념만 나오네요.
1. 190년대의 중원
황하의 중하류에 위치하는 중원 지역은 당시 인구와 사회, 경제, 문화적 인프라가 집중된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청주, 연주, 예주, 서주의 네 개 주는 지리적으로 황하와 장강 사이에 끼어 있으며 낙양을 바라보는 위치이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이었다.
청주는 180년대부터 황건적의 난에 시달렸다. 190년대 초 유주의 공손찬이 황건적을 밀어붙이며 청주에까지 세력을 뻗는데, 그 땅은 원소 역시 노리던 곳이었다. 2년여의 접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청주는 두 세력이 "서로 백성을 약탈하였으므로 들이 황폐해져 풀 한 포기 남지 않(후한서 공손찬전)"을 지경에 처했다. 190년대 중반에 원소의 장남 원담이 청주자사 전해와 북해상 공융을 축출하면서 한때 청주의 전란이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관도대전을 앞두고 조조군의 장패가 청주를 공격해 다시 전장이 되었다. 청주의 전란은 204년 말 조조군이 평원을 점령하고 205년 초 원담을 참수함으로써 비로소 끝났다.
연주 역시 황건적의 난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2년 청주에서 100만명 이상의 황건적이 연주로 넘어온 일일 것이다. 이들과의 싸움에서 무려 두 개 국(國 : 임성, 제북)의 상(相)과 연주의 자사가 죽었으니 민간에 끼친 피해규모가 어떠했을지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당시 조조는 원소의 천거로 연주 동군태수가 되어 황건적의 한 갈래인 흑산적과 싸우고 있었다. 연주자사 유대가 죽은 후 제북상 포신은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해 황건적과 싸웠다. 192년 가을에는 마침내 황건적이 항복하고, 겨울에는 그들 중 정예를 병졸로 거두었다. 이들이 그 유명한 청주병이다. 그 후 연주에서 일어난 중요한 전란은 194년 진궁과 장막의 배반으로 조조가 연주를 거의 잃을 뻔한 사건과 200년을 전후해 벌어지는 관도대전이다.
예주는 곧장 낙양과 맞닿은 지역이다. 파성이 터진 고로 검색이 어려워져서 황건난과 관련해 예주에서 일어난 일은 잘 모르겠다. *추가 : 무제기에서 광화(178~183) 말 조조가 영천의 황건적을 토벌한 기록을 찾았다. 예주의 다른 지역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다시 추가. 무제기, 허저전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196년까지는 황건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것은 영천의 순욱이 기주로 피난을 간 이유가 황건난이 아니라 동탁의 전횡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영천은 사방에서 전쟁터로 변할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천하에 변란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군사들이 충돌을 했으므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래도록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순욱전)" 라던 순욱의 말은 얼마 안 가 동탁이 보낸 이각이 영천과 연주 진류군에서 벌인 만행으로 증명되었다. 그 후 조조가 여포로부터 연주를 되찾고 예주 공략을 시작하는 195년 말까지
서주는 낙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황해에 접하는 위치 덕에 다른 세 주에 비해 비교적 동탁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자치통감에서 "애초에 경(사례주 하남윤 경현), 낙(낙양)은 동탁의 난을 만나서 백성들이 떠돌아 다니다가 동쪽으로 빠져나가 많은 사람이 서주 땅에 의지하였"다고 기록했고 조조의 부친인 조숭 또한 서주 낭야국으로 피난을 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190년대 초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으려니 짐작된다. 황건적의 경우에는 서주자사로 부임한 도겸이 대파해 패주시키고 경내를 안정시켰다는 기록이 있다.(후한서 도겸전) 도겸의 관직변천을 보면 유주자사였다가 중앙으로 불려갔으며 한수를 토벌하러 서쪽에 갔고, 그후 서주자사로 부임했다.(위서 도겸전) 후한서 영제기를 보니 중앙에서 한수를 토벌하려 했던 게 187년의 일이다. 따라서 도겸은 180년대 초에 유주자사를 역임했고 180년대 후반에는 서주로 가 황건적을 물리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찌 됐든 위서 도겸전의 기록 순서를 따른다면 동탁이 낙양에 들어가기 전에 서주는 이미 안정되어 있었다.
그랬던 서주에 본격적으로 전란이 일어나는 것은 193년 조조의 출병 때부터다. 193년, 194년 두 차례에 걸쳐 조조가 도겸을 공격했고,
2. 시기별 각 지방의 세력 변화
192년부터 각 시기별로 중원 근처에서 네임드 군주들의 위치를 대충 짚어 보았다. 이런 건 자치통감을 참고하면 될 텐데 당장 수중에 그 책이 없어서 웹에 흩어져있는 진수의 삼국지를 중심으로 얼추 짜맞췄다. 오류가 있는 부분이 반드시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아낌없는 지적 부탁합니다.)
192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장연?(흑산적) / 유주-공손찬(유우는 군주가 아니므로 제외)
사례주 : 동탁→여포→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청주자사 전해, 평원상 유비) / 연주-유대→조조 / 예주-? / 서주-도겸 / 형주-유표vs.원술
장강 이남 : 양주-?
193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장연?(흑산적)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전해, 유비) / 연주-조조 / 예주-? / 서주-도겸 / 형주-유표
(이 무렵 여포는 이각, 곽사를 피해 도망쳐 원술→장양→원소→장양 순으로 유랑)
장강 이남 : 양주-?→원술
194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전해) / 연주-조조vs.여포 / 예주-? / 서주-도겸→유비 / 형주-유표
장강 이남 : 양주-원술(손책)
195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전해) / 연주-조조vs.여포 / 예주-원술, 황건적, 기타 등등 / 서주-유비 / 형주-유표
장강 이남 : 양주-원술(손책)
196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공손찬(전해)→원소(원담) / 연주-조조 / 예주-원술->조조 / 서주-유비→여포 / 형주-유표(장수)
장강 이남 : 양주-원술, 손책
197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원소(원담) / 연주-조조 / 예주-조조(유비) / 서주-여포 / 형주-유표(장수)
장강 이남 : 양주-원술vs.손책
198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
사례주 : 이각, 곽사→?
황하 이남 : 청주-원소(원담) / 연주-조조 / 예주-조조(유비) / 서주-여포→조조 / 형주-유표(장수)
장강 이남 : 양주-원술vs.손책
199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공손찬→원소
황하 이남 : 청주-원소vs.조조 / 연주-조조 / 예주-조조 / 서주-조조→유비 / 형주-유표
장강 이남 : 양주-원술→손책
200년
하북 : 기주-원소 / 병주-원소 / 유주-원소
황하 이남 : 청주-원소vs.조조 / 연주-조조vs.원소 / 예주-조조 / 서주-유비→조조 / 형주-유표
장강 이남 : 양주-손책
3. 전란의 성질과 규모
190년대에 네 개의 주에서 일어난 전란은 그 성질과 규모도 제각각이었다.
청주는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던 시절부터 원씨가 황하 이남에서 완전히 축출될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쭉 전역 상태였다고 여겨진다. 황건적의 난까지 더하면 더 먼 시기로 소급될 것이다. 연주로 넘어간 청주 황건적의 규모와 구성까지 생각하면 원소와 공손찬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전부터 상당히 황폐해진 상태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연주는 청주 황건적의 침입과 진궁, 장막의 배반으로 주 전체에 걸쳐 큰 위협을 받았다. 관도대전 때는 전선이 황하 유역에 한정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주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주 전체가 전란의 영향권이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연주에서는 늘 전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터지면 규모가 어마어마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연주가 조조의 유일한 근거지였던 190년대 전반에는 조조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방어적인 전투가 주를 이루었고, 협천자를 한 190년대 후반부터는 천자가 있는 허도를 보호하기 위해 하북의 원소에 대한 방어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연주가 안정되는 것은 조조군이 황하를 건너 기주로 진격해 더이상 최전선 노릇을 할 필요가 없어진 후의 일이다.
예주는 196년까지 황건적 피해를 입은 듯한데 일단 조조가 들어온 후로는 유비 시절의 소패나 원술이 쳐들어간 진국처럼 특정한 지역에 전투가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전투가 벌어져도 단기적인 국지전으로 그친 것 같다. 여포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소패는 위치상 연주와 예주에서 서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전과는 신통치 못했지만 유비가 소패를 중심으로 예주와 서주 하비국 방면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원술과 여포가 회남 또는 서주에서 예주 안쪽으로 침범하진 못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속사정이야 어찌 됐든, 조조가 연주를 전장으로 만들어 예주를 지킨 것처럼 유비 또한 소패와 하비에서 싸워 결과적으로 예주 전역이 전장이 되는 것은 막았다. 북쪽에는 연주목 조조, 남쪽에는 예주목 유비를 거느리던 190년대 후반의 헌제는 좀 쩌는 듯. 헌제 본인이 잘나서 그렇게 된 건 아니지만. 갑자기 의대 사건 때 조조가 제대로 빡친 걸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_-;
서주 북부는 조조의 194년 출병 외에는 크게 위협을 받지 않은 듯하다. 물론 북부가 194년 외에 늘 조용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연주 태산군 출신의 장패는 작은 군벌들과 병력을 모아 낭야국 개양에 주둔하며 조조에 맞서 여포를 지원한 일이 있다.(장패전) 어찌 됐든, 북부는 대체로 조용했던 것 같다. 조조에게 항복한 후 낭야상이 된 장패가 관도대전의 백업을 위해 청주를 칠 때도 전장은 서주 낭야국이 아니라 청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남부는 193년부터 하비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 여러 세력이 어지럽게 뒤채는 전역 상태였다. 조조, 유비, 여포, 원술이라는 네임드 군주들이 모두 서주를 노리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청주의 전역이 안정된 두 세력간의 긴 힘겨루기였다면 서주 남부의 전역은 여러 군소세력간의 단기 단판승부의 연속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장기전략가가 없었던 유비, 여포, 원술은 모두 여기서 떨어져나갔다.
여담인데 장기전략가의 중요성은 순욱전의 기록 하나만 봐도 나온다. 연주를 턴 여포를 아직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도겸이 죽었을 때 조조는 여포는 내버려둔 채 서주부터 마저 정복하려 했다. 순욱은 서주학살의 기억으로 서주 사람들이 절대 쉽게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점 등을 지목하며 우선 연주를 회복하고 여포를 친 후 원술을 잡아야 한다고 진언했다. 조조는 순욱의 말을 따랐다. 도겸이 죽은 것은 194년 말이고 원술이 패망하는 것은 199년이니 순욱은 적어도 4, 5년 앞을 보고 조조가 취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
4. 193년의 서주와 조조에 대한 잡담
큰 강은 세력 간에 경계선 내지 방어선으로 삼기 좋다. 청주는 황하, 서주는 장강을 낀 지리적 위치 탓에 여러 세력이 충돌하면서 오랫동안 전역이 벌어졌다. 그런데 양쪽에서 벌어진 전쟁은 양상이 달랐다. 아마도 서주가 네 개의 주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평화로운 곳이었던 게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위치 탓이다.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십상시가 권력을 가졌을 때는 낙양이 중심지였고, 동탁이 권력을 가졌을 때는 낙양에서 서쪽의 장안으로 가는 동탁의 행보에 만인이 휘둘렸다. 동탁이 주살당하는 192년, 동탁의 뒤를 이어 장안에 들어온 이각, 곽사는 천자를 갈아치운 동탁과 같은 힘을 갖지 못했기에 더이상 사건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그 무렵에는 하북에서 벌어지는 원소와 공손찬의 다툼이 세간의 가장 큰 화제였을 것이다. 군주나 군주 후보들이 하북을 중심으로 움직였을 거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때까지만 해도 처지가 비슷했던 조조(원소 휘하의 동군태수)와 유비(공손찬 휘하의 평원상)는 천자가 있는 장안이 아니라 하북 또는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192년 유비는 평원상으로서 청주에 있었고 조조는 사실상 연주목을 대행하며 연주의 동쪽 접경인 청주를 경계했다. 여기서는 전란으로 청주가 황폐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서주는 청주의 동쪽 아래에 붙어있지만 원소와 공손찬의 세력이 직접 부딪치는 곳은 아니었기에 아직 조용했다.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난 위치였던 것이다.
193년 무렵에는 여전히 사건의 중심지가 하북이었다. 황하 이남에서는 슬슬 군웅할거시대의 낙오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 땅이 있었지만 패배해 밀려난 군주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원술과 여포다. 아직도 남의 밑에서 뜻만 키울 뿐 자기 땅을 갖지 못한 군주가 있었다. 유비와 손책이 그랬다. 기회는 탔지만 아직 세력이 작기에 더욱 세를 키우고자 한 군주도 있었다. 조조였다. 군웅할거시대의 초기에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다른 군주에게 밀려나 땅을 잃은 군주들에게는 빈번한 전란으로 엉망이 된 다른 지역과 달리 아직도 풍요로운 서주가 주인에게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덤벼들 가치가 있는 보물창고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동탁의 집권기 때 낙양으로부터 먼 거리 덕에 전란을 면한 것이 이 무렵부터 독으로 바뀐 것은 아닐까?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193년에 있었던 조조의 서주 출병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은 단순히 군주들간의 영토다툼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사건의 중심지를 하북에서 황하 아래로 끌어내림으로써 조조라는 인물이 사건을 만들고 주도하게 한 첫 계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조조가 서주를 공격한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본다. 2번에서 보았듯이 사방에는 적 뿐이고 기반은 빈약하며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연주 하나만을 가진 상태에서 조조가 쉽게 세력을 뻗을 수 있는 땅이 없었다. 서주의 풍요로움은 만성적인 군량부족에 시달리던 조조군에 크게 보탬이 될 것이다. 공손찬의 동맹을 공격하는 것이니 표면적으로 조조의 동맹인 원소에게도 득이 될 일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남과 북에 있는 원씨들이 연합할 길을 끊고 각개격파까지 노릴 수 있다. 어쨌든 원술은 예전부터 조조에게 간단히 박살나주던 고마운 상대였다. 서주가 가진 이점은 서주목 도겸이 이미 쥐고 있으며 군사적으로 아주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기에 조조로서는 절친한 벗이라 생각한 장막에게 가족을 맡겨가며 비장하게 출전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조조가 서주에서 양민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경작자를 죽여 없애고 주인 잃은 경작지를 청주병들에게 나눠주려 했다는 추측은 부족하게 들린다. 100만 청주병에게 땅을 나눠줘 그들의 충성을 사는 것이 낙양 등지에서 피난온 교육받은 인구와 서주의 문화적 인프라가 키워냈고 키워낼 인재들, 그리고 여태껏 조조가 쌓아온 명성을 잃는 것보다 이득이 되는 계산일까? 긍정하기 어렵다. 차라리 화봉요원에서처럼 일부러 학살된 양민의 수를 크게 부풀려 공포감을 조성함으로써 나머지 성에 무혈입성하려 했다는 설명이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두 차례에 걸쳐 서주에 출병할 때마다 살육이 일어났고 여포 문제로 연주에 돌아가면서 또다시 살육을 저지른 게 설명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물론 진모는 역사책 조까를 외치는 사람이니까 그런 해석도 맘대로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고.)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진 않다. 내가 궁금한 것은 조조가 왜 서주에서 학살을 벌였느냐가 아니라, 거기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다. 다른 분들도 지적한 것인데 서주학살을 다루는 사서 간에는 조금씩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서주에 출병한 것 자체는 저 시대에 문제삼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니 어디까지가 서주를 평정하기 위한 군사활동이고 어디서부터 양민학살이었는지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양운/견습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