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년대를 전후한 서주 사람들의 행보 上
서주의 군국 : 낭야국, 동해군, 팽성국, 하비국, 광릉군
3. 출생지? 본관?
우선 각 열전에 적힌 출신지가 태어난 고장인지 우리나라의 본관 개념인지 구분해야 할 것 같다.
삼국지를 보면 부자가 독립된 열전을 가진 경우가 있다. 조조-조비, 종요-종회, 제갈근-제갈각 등의 경우이다. 사촌, 숙질 등등의 가까운 친족인 경우도 있다. 하후씨들과 조씨들, 원소-원술(...), 최염-최림(사촌) 등의 경우이다.
저 조씨와 종씨 부자의 경우 각자의 열전에 출신지가 명기되어 있다. 조조와 조비는 패국 초현, 종요와 종회는 영천 장사다. 조비의 경우에는 아버지와 고향이 같은 것이 설명된다. 조조는 183, 184년 무렵 영천에서 황건적을 쳤고 그 공으로 제남상이 되었다. 잘 다스린 공으로 동군태수직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낙향했다. 조조가 다시 초현을 떠나는 것은 서원팔교위에 임명되는 188년의 일이다.(무제기) 조비는 187년생이니 본관 개념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아도 초현 출생인 게 거의 확실해 보인다.
종요와 종회의 경우에는 잘 모르겠다. 우선 부자간에 나이차가 70이 넘어서.(...) 종요는 위풍의 반란 때 관직을 박탈당해 잠시 낙향한 일이 있는데, 223년에 조비가 태위로 임명했으니 그 전에 이미 복직되어 허도에 불려갔으리라 생각된다. 224년 3월에는 허도에서 낙양으로 천도한다.(이상 문제기) 종회는 225년생이니 224년 내지 225년 종요가 있었던 곳에서 태어났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경우 영천이 아니라 낙양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종회전에는 영천이라 적혀 있다. 종요는 나이들어 몸이 불편한 탓에 일부러 수레를 타고 다녀도 되는 특권까지 있었는데 그런 몸으로 낙양과 영천을 왕복하며 출근했을 리는 없다. 이것 때문에 본관을 기록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버지 쪽의 열전에만 기록하고 아들 쪽에는 적지 않으면 그만인데 일부러 중복해서 기록한 게 묘한 일이다.
여기서 제갈각이 나를 미치게 한다. 제갈근은 손책이 죽기 전(200년) 강동으로 넘어갔으니 203년생인 제갈각은 서주 낭야 출생이 될 수 없다. 양주 어딘가여야 한다. 그런데 기록이 없다. 제갈근전과 제갈각전은 묶인 카테고리 자체가 다르고 거리도 먼데 위의 조비, 종회의 경우와 달리 적혀있지가 않다. 그렇다고 제갈각이 듣보냐면 절대 그렇진 않다. 제갈근, 제갈량 이후 세대의 네임드가 되면 됐지 듣보잡은 아니다. 오나라에서 차지한 관직도 거기서 사고친 내용도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기록이 없다니! 제갈각의 출신지가 나와있다면 각 열전에 적힌 출신지가 출생지인지 본관인지 한큐에 답이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신야에서 태어난 게 명백하며 일국의 황제까지 해먹은 유선도 출신지가 적혀있지 않은데, 참 여러 의미에서 어쩌라고 소리가 나온다. -_-;
그런 이유로, 열전에 기록된 출신지가 출생지인지 본관인지 개념이 잡혀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하 서주 사람들의 행보를 살펴보는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4. 190년대의 혼란상과 서주 사람들의 출신지
보다 보면 다른 사람의 열전에 이름과 출신지만 언급된 서주 사람들도 종종 등장한다. 그런 사람들까지 정리하려니 포스팅 분량이 두 배로 튀어버리기에 여기서는 개인 열전이 있는 사람들만 언급할까 한다. 청/적/녹 컬러링의 의미는 한번이라도 광영의 삼국지 게임을 해본 분들은 다들 아시리라 믿고,
낭야 출신 : 변황후, 서혁, 제갈탄, 왕부인, 제갈근, 서성, 제갈량
동해 출신 : 왕랑, 미축
팽성 출신 : 장소, 엄준
하비 출신 : 보부인, 보즐, 노숙
광릉 출신 : 장홍, 진교, 서선, 장굉, 여대
여기에 삼국지에는 전이 없지만 서주를 다룰 때 중요한 인물인 진규 진등 부자를 첨부한다. 이들은 하비 사람이다.
서주출병과 관련해 태산군의 비현, 화현이나 낭야국의 개양을 친 건 그러려니 싶은데 손나 뜬금없게도 청주 북해국의 즉묵을 친 기록이 나란히 적힌 위서 조인전 같은 것 때문에 속이 뒤집힌다. 도겸전과 무제기 중심으로 가겠다. 그렇게 보면 190년대 중반 조조의 1, 2차 출병을 통틀어 집중적으로 공격(일단, 학살이 아니라 공격)당한 곳은 동해, 팽성, 하비인 듯하다. 2차 때는 낭야, 동해가 공격당했다.
한편 190년대 후반 유비, 원소, 여포가 다툴 때 집중적으로 쓸려나간 곳은 하비다. 비슷한 시기에 양봉, 한섬이 분탕질을 치고 다닌 곳은 하비, 광릉, 구강이다. 그걸 생각하고 다시 보겠다.
-190년대 중반 1차 출병 때부터 피해를 입은 동해, 팽성, 하비 사람들은 대부분 오나라에 사관했다. 그렇지 않은 네 사람(왕랑, 미축, 진규, 진등) 중 한 명은 촉나라에 사관했다. 2차 출병 때 피해를 입은 낭야 사람들은 제갈량을 제외하면 위나라와 오나라에 반씩 갈려있다.
-190년대 후반 피해를 입은 하비, 광릉 사람들은 오나라 아니면 위나라에 사관했다.
하비는 교집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단 각 군국에 집중적으로 전란이 일어난 시기를 염두에 두고 190년대 이후 이들의 행보를 보겠다.
5. 190년대 이후 서주 사람들의 행보
<낭야>
변황후(?~231)
변씨는 조비의 생모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 예주로 간 것 같다. 본래 가기였다 하니 서주에 유력한 친정이 있었을 것 같진 않다. 조조가 변씨를 들이는 것은 패국 초현에 있을 때, 즉 180년대의 일이다. 변씨는 190년대 서주의 전란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서혁(?~?)
서혁전에는 "전란으로 인해 강동으로 피난을 갔는데, 손책은 예절을 다하여 그를 임명하였다. 서혁은 성과 이름을 바꾸고 간편한 복장으로 본군(=낭야)으로 돌아왔다. 조조가 사공으로 임명되었을 때 서혁을 불러 사공연속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조가 사공이 된 것은 196년 협천자 후의 일이다. 서혁이 강동으로 피난가야 했던 전란은 194년의 2차 서주출병일 가능성이 높으며, 사공연속 임명에 응한 것도 협천자 버프 덕일 가능성이 있다. 서혁이 이름을 바꾸고 가벼운 복장으로 도망친 이유는 손책이 싫었거나, 194년 당시 아직 손책이 부하 노릇을 해야 했던 원술이 싫었던 게 아닐까 싶다.(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 손책 or 원술이 싫다 + 어느 날 천자님이 부르셨어요 이런 이유로 중앙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조조의 행보에 호의적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서혁전에 묘사된 됨됨이를 보면 강직하고 엄격하며 직간을 잘한 모양이다. 조조와 조비 2대는 그런 점을 높이 평가했다.
제갈탄(210~258)
왕씨가 13살 이전에 임신했다는 식으로 가정할 게 아니라면 본 포스팅에서 언급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중에 태어났으리라 생각된다. 조조가 위왕이 되는 것이 216년이고 조비가 선양받는 게 220년이니, 210년생인 제갈탄은 거의 위나라 사람으로서 성장해 위나라 사람으로 죽었을 것이다.(제갈탄의 반란은 넘어가자) 선조와 출신지가 같은 동시대의 제갈씨들은 190년대의 혼란 중에 서주를 떠났지만, 제갈탄의 집은 계속 양도에 있었거나 피난했다가도 다시 돌아온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제갈탄 본인은 190년대의 서주를 경험하지 않았다. 제갈탄의 인생역정은 패스.
왕부인(?~?)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황무 연간에 손권의 총애를 얻어 손화를 낳았다(왕부인전) 라는 것은, 황무가 222~229년 사이니까 그 전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손화는 224년생이다. 그럼 딱 황무 원년이나 2년 쯤에 손권의 눈에 들었겠지 싶다. 그때 스물 안팎이었다고 치면 200년대생 이후가 된다. 나이는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다. 1800년전 관념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20대 중후반인 여성을 후궁으로 들여보냈을 것 같진 않다. 그럼 낭야 출신이라는 것은 왕씨 본인이 아니라 친정의 출신지인가 싶다. 친정에 대해서는 그 이상 알 수 없다. 대의황후 왕씨 본인의 열전에는 난을 피해 이주했다는 기록이 없다. 강동으로 간 서주 사람들 중에서는 유일하다.
제갈근(174~241)
제갈근은 한나라 말에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이주했다. 마침 손책이 죽고, 손권의 매형인 곡아 사람 홍자가 제갈근을 만나보고 매우 기이한 인물로 평가하여 손권에게 추천했다.(제갈근전) 일전에 제갈근에 대한 망상잡담에서 떠들었듯이 제갈근이 강동으로 넘어간 것은 190년대 말이라 여겨진다. 열전에 적힌 "난리"는 아마도 190년대 후반의 혼란인 듯하다. 그러니까 비교적 조용한 북녘 낭야 출신으로 숙부가 동생들을 데려갈 땐 움직이지 않았던 사람이 어쩌다 남녘 하비 근처의 난리에 휩쓸려 피난갈 생각을 한 것인지가 의문인데 그쪽은 망상의 영역이지 싶다. 혹시 190년대 후반에는 낭야도 하비 못지 않게 엉망진창이었나? 장패가 군벌을 규합해 버티고 있었던 것밖에 모르겠는데. 내가 기록을 못 찾은 것인가?;
제갈근에 대한 손권의 신뢰는 이 말 한 마디로 설명된다. "나와 자유는 가히 신령스런 사귐이라 할 수 있으니 바깥의 말이 틈새에 끼일 수 없소."(강표전) 이릉 직전 제갈근을 의심하는 말이 들릴 때 손권이 직접 실드를 쳐주며 한 소리다. 제갈근은 오나라에서 대장군까지 올라갔다.
서성(?~?)
"난을 만나 오군으로 옮겨와 살았으며 ... 손권이 일을 통괄하게 되자 그를 별부사마로 삼고 ... "(서성전)
서성은 손권이 집권하기 전, 즉 손책이 아직 살아있을 때 강동으로 건너왔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손책이 멀쩡하던 때에 서성에 대해 들었더라면 초청하는 말 한 번 안 해봤을 리가 없다. 그러니 제갈근과 비슷한 무렵일 거라 생각된다. 오나라의 장수로 살았고 황무 연간에 죽었다.
제갈량(181~234)
제갈량전에는 난을 만난 이야기 같은 것은 없고 그 대신 숙부 제갈현이 원술에 의해 예장태수로 임명되었을 때 제갈량과 제갈균을 데려간 기록이 있다. 제갈현이 예장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은 것은 195년의 일이다. 서주 북쪽의 낭야 사람이 어린 조카들까지 데리고 원술이 있던 회남으로 내려간 이유에 대해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4년에 있었던 조조의 2차 출병 때 낭야가 공격당한 것, 뒤에 장소의 행보를 살펴볼 때 다시 언급하겠지만 후한 말의 혼란 때 서주 사람들이 양주로 피난간 경우가 많았다는 것, 그리고 원술과 손책은 각각 회남과 강동에 버티고 있으면서 내려오는 서주 사람들을 열심히 낚았다는 것 등을 근거로 서주출병 내지 서주학살과 관련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추측된다. 촉승상 제갈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뭐,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동해>
왕랑(?~228)
위서 왕랑전에는 동탁이 헌제를 장안으로 끌고 간 무렵 서주자사 도겸이 왕랑을 무재로 천거한 기록이 있다. 그 전부터 왕랑은 이미 지방의 장으로 임명되거나 효렴에 천거되는 등 관직 경력이 있었다. 장안 천도 후 도겸은 왕랑과 낭야 사람 조욱의 말을 듣고 장안에 사자를 보냈다. 그 일로 왕랑은 회계태수가 되었다. 그 후가 눈물겹다. "손책은 장강을 건너 땅을 침략했다. ... 왕랑은 자신이 한 왕실의 관리이므로 응당 성읍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고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손책과 싸웠는데, 패배하여 ... (왕랑표류기는 생략-_-) ... 손책은 ... 문책만 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 ... 조조는 상주하여 그를 초빙하도록 했다. 왕랑은 곡아로부터 장강과 바다를 전전하면서 몇 년 만에 도착했다."(왕랑전) 190년대의 혼란 때문에 서주와 양주 해안에 해적이 발호해 저 고생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왕랑이라도 조조에게 출사하겠다.(...) 왕랑은 위나라에서 사도까지 올라갔다.
미축(?~220)
"서주목 도겸이 미축을 초빙하여 별가종사로 임명했다. 도겸이 죽은 후, 미축은 도겸의 유명을 받들어 소패에서 유비를 영접했다. 건안 원년(196)에 여포는 유비가 출정하여 원술에게 대항하는 틈을 타 하비를 습격하여 ... 미축은 이때 여동생을 유비에게 보내 부인이 되도록 하고, 노비 2천명을 보냈으며, 금은 재화를 주어 군자금에 보탰다. 그래서 그 당시 곤궁했던 유비는 이것에 의지하여 다시 떨쳐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조조가 상주하여 미축을 영릉태수로, 미축의 동생 미방을 팽성의 상으로 임명하도록 했지만, 모두 관직을 버리고 유비를 따라 전전했다."(미축전) 끝.
<팽성>
장소(156~236)
오서 장소전에는 "한말에 대란이 일어나, 서주지역의 사민들이 많이들 양주 지역으로 피난했는데, 장소도 함께 남으로 장강을 건넜다"는 기록이 있다. 장소전에서는 이 기록 다음에 "손책이 창업을 하고서는 장소에게 명하여 장사, 무군중랑장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따른다. 즉, 장소는 손책이 원술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이미 강동에 있었다. 장소의 출신지는 팽성으로 위서/후한서 도겸전에서 시체로 사수가 막혔다는 기록이 나온 바로 그곳이다. 위서와 후한서가 충돌하는지라 학살 여부를 가리기는 어렵지만 팽성에서 큰 전투가 있었고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분명한 듯하다. 나는 이때 장소가 서주출병 내지 학살을 피해 강동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손책은 죽음에 임했을 때 장소에게 손권을 부탁했다.(장소전) 즉 탁고대신이다. 말년에는 서로 꼬장 부리는 노친네가 되어 손권과 다퉜지만, 인생 전반에 걸쳐서는 손권이 가장 의지하는 중신 중 하나였다.
엄준(?~?)
오서 엄준전에는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가서 제갈근, 보즐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 우정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갈근과 보즐이 강동으로 건너간 시점을 생각하면 190년대 후반에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엄준은 노숙이 죽었을 때 손권이 그 후임으로까지 생각했던 사람이다.
<하비>
보부인(?~?)
오서 보부인전에는 "한나라 말에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데리고 여강으로 이주했는데, 여강이 손책에 의해 무너지자, 모두 동쪽을 향해 장강을 건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주 여강이 손책에게 공격당하는 것은 육강이 태수였던 195년 이전(손책전), 그리고 원술이 육강 다음 태수로 세운 낭야 사람 유훈을 친 199년 두 번이다.(오주전) 전자라면 1, 2차 서주출병 내지 서주학살 때 넘어온 것이 분명하지만 후자라면 그냥 190년대 후반의 혼란 때문이라 생각된다. 보씨는 손권이 가장 아낀 부인이었다. 생전에 정식으로 황후가 되진 못했지만 궁에서는 모두 황후로 불렀다 한다.
보즐(?~247)
오서 보즐전에는 "세상이 혼란스러웠으므로 난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강동으로 이주한 후 보즐은 오이를 키우며 주경야독했는데 당시 그가 머물던 회계 쪽 호족의 텃세에 무척 시달린 모양이다. 손권은 토로장군이 된 후 보즐을 부르는데, 이것은 200년~202년 사이의 일이다. 보즐은 200년 전부터 강동에 있었을 것이다. 보즐과 보씨가 일가친척인 걸 생각하면 보씨와 같은 이유로 피난했을 가능성이 높다. 보즐은 육손이 죽은 후 그를 이어 오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노숙(172~217)
주유가 곳간을 털어간 후(...) 원술이 노숙을 그의 고향인 동성현의 장으로 세운 일이 있다. 노숙은 거절하고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남쪽의 주유에게 갔다.(노숙전) 여기서 노숙전에 인용된 오서(삼국지 오서가 아님)의 주석에는 노숙이 강동으로 내려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중간에 "회수와 사수 사이에는 자손을 남길 땅이 없다"는 언급이 있다.
내가 가진 후한시대 지도는 서주의 이 부분이 접혀 있어서 보기 불편하다. 대충 비슷한 삼국시대 지도를 가져왔다. 사수와 회수 사이에는 보다시피 하비가 위치한다.
노숙이 강동으로 건너간 것은 주유가 거소현의 장이 된 후의 일이다. 주유가 거소에 가는 것은 198년이다.(주유전) 그렇다면 노숙이 언급한 하비의 전란은 가깝게는 198년 그 무렵 조조, 유비가 여포와 싸우던 것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단기전이 벌어진 지역을 두고 "자손을 남길 땅이 없다"는 말이 나올 것 같진 않다. 내 생각에는 193년부터 조조의 서주출병 및 학살, 유비가 예주자사일 때는 하비 / 예주목일 때는 소패에 근거지를 두고 원술과 하비 일대에서 싸운 일,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끼어든 양봉, 한섬의 약탈과 여포 문제 등등이 모두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결과라 생각된다. 서주 어딘가에 있던 제갈근이 강동으로 넘어간 것은 손책이 사망하기 전(200년)의 일이니 아마도 노숙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유로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놓고 보니 노숙이 장판파 무렵 유비 쪽으로 건너와 제갈량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자유의 친구요."라고 말한 것도 다르게 들린다. 제갈근, 엄준, 보즐이 강동에서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눈 걸 보면 양주로 피난 간 서주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나름의 인맥을 만들었던 모양인데, 노숙과 제갈근도 비슷한 과정으로 안면을 텄을지도 모른다. 제갈량이 출사한 직후라 아직 전국에 이름을 떨칠 뭔가를 하지 않은 시점에서 일부러 그에게 저런 말을 걸었다는 것은 1차적으로는 강동이 형주와 신야의 동향을 이전부터 주시해왔으며 유비 패밀리에 우호적이라고 넌지시 건네는 의미일 것이다. 좀 더 감상적으로 바라보면 제갈근이 같은 실향민인 노숙과 술 마시면서 고향이나 동생들 이야기를 자주 한 거라고 망상질할 수도 있다.
진규(?~?), 진등(?~?)
190년대 무렵 진규는 예주 패국의 상이었다. 원술과 여포 사이를 이간하는 한편 조조에게 아들 진등을 보내 적극적으로 여포 토벌을 권했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원술을 경계하고 끝내 회유당하지 않은 걸 보면 진규는 한나라의 신하라는 자각이 강했던 것 같다. 위서 여포전을 보면 원술과 여포가 사돈을 맺으려 하자 그것이 국가적인 재난이 되리라 여겨 여포를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190년대에는 쭉 패국에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여포가 패망한 후의 행보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선주전을 보면 도겸이 죽은 후 유비가 망설일 때 진등과 북해상 공융이 유비를 적극 지지하는데, 거기서 진등은 그냥 "하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195년이면 유비는 패국 소패에 있었다. 그 전에 진등이 아버지와 함께 패국에 있었는지 서주 하비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등은 진규가 조조에게 여포 토벌을 권하려고 보냈을 때 광릉태수에 제수되었다. 손권이 광릉을 공격했을 때 조조에게 복속되는 조건으로 원병을 요청했다.(진교전) 손권이 광릉을 공격한 기록을 찾지 못해서 이게 정확히 언제의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꿍꿍이야 어떻든 평원상 유비를 서주목으로 올리려고 열심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조조에게 의탁하게 된 경위는 좀 미지근한 감이 있다. 참고로 유비와 진등은 서로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유비에 대한 진등의 평은 위서 진교전, 진등에 대한 유비의 평은 위서 여포전) 아직 화타가 살아있을 때화타가 사망한 후(그러니까 208년 후)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회는 조심해서 먹읍시다.(화타전에 멀쩡한 기록이 있는데 왜 저렇게 잘못 적었지?; 수정합니다)
내 생각인데, 굳이 따지자면 진규는 조조에 좀 더 호의적이고 진등은 유비에 좀 더 호의적인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두 사람 다 조조에 대해 호감을 가진 듯하고.
<광릉>
장홍(?~196)
여기에 등장한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사망했다. 2년간 원소가 임명한 청주자사로 있었다. (공손찬의 청주자사 전해는 뭐가 되나 싶다. 그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군벌들이 멋대로 나라의 관직을 임명해댄 걸 보면 한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 후 동군태수가 되었는데 조조가 연주를 맡은 후 후임으로 간 게 아닌가 싶다. 이전에 재능을 인정하고 임용해줬던 장초가 조조에게 공격당하자 원소에게 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장홍이 올 것이라 믿었던 장초는 결국 자결했다. 이 일로 원소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1년을 싸운 끝에 생포당했다. 원소는 장홍을 살려주고자 했지만 본인이 죽음을 청해 처형당했다. 장홍의 행보는 서주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진교(?~235)
위서 진교전에는 "난리를 피해 강동과 동성으로 갔을 때, 손책과 원술의 초빙을 거절하고 본군(=광릉)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저게 손책이 아직 원술의 부하로 인식되던 시절이라면 190년대 중반에 넘어갔을 것이고, 손책과 원술이 각각 독자적으로 초청했다면 190년대 후반일 것이다. 광릉 사람이니까 내 생각에는 후자인 것 같다. 어쨌거나 원술이 개객기다.(...) 앞서 진등 부분에 언급했듯이 진등이 조조에게 복속되는 조건으로 원병을 요청했을 때 진교가 사자로 갔다. 그때 개인적으로 들어온 조조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했다. 그걸 받아들이면 고향이 전쟁 중인 때에 자기 한몸 편하자고 바깥으로 내뺀 꼴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등이 조조의 도움으로 손권을 물리친 후에야 진교는 허도로 가 사공연속이 되었다. 조조가 죽었을 때 진교는 속전으로 일을 처리해 조창 등을 따돌리고 조비의 즉위를 성사시켰다. 조예의 대에 사도가 되었다.
서선(?~236)
위서 서선전에 의하면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갔었는데, 손책의 초빙을 거부하고 본군(=광릉)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다음에 서선이 동향 사람인 진교와 함께 진등 밑에서 일한 기록이 이어진다. 진교가 광릉으로 돌아온 경위를 생각하면 서선이 돌아온 것 역시 원술 때문인 것 같다.(...) 진등이 조조에게 의탁했을 때 함께 사관했다. 조예는 "내가 보는 것이 복야(=서선)가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라며 서선이 손댄 문서를 보지도 않을 정도로 신임했다. 236년에 사망했는데 그때 나이가 거의 아흔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포스팅에 올라온 사람들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장굉(153~212)
오서 장굉전에 의하면 "난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 손책이 창업하자, 곧 그에게 투항하여 의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장굉은 본격적으로 손책에게 출사하기 전부터 그와 면식이 있었지만 그건 넘어가고, 출사하고 얼마 안 되어 단양 토벌에 참가한 것 같다. 손책이 대장임에도 전장에 직접 나서는 것을 주의하는 간언을 한 기록이 있다. 손책은 강동정벌 때 단양을 공격했고 그 후 회계태수가 되었다.(손책전) 손책이 단양군 말릉현을 공격한 게 195년이고 회계태수가 되는 건 원술이 칭제(197년)하기 전이니 장굉은 195년 무렵 이미 손책에게 출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조의 서주 출병이 서주의 남동쪽 구석에 있는 광릉에까지 미친 것 같진 않으므로 좀 의아하다. 손권에게 자주 간언을 한 중신이었다. 근데 손권한테 한 간언도 대장이면 부장처럼 날뛰면서 싸우지 마시져?(합비) 전쟁은 작작 하고 내정이나 하시져?(합비에 또 가려 할 때) 이런 종류인 걸 보면, 음.(...)
여대(161~256)
오서 여대전애 의하면 "군과 현의 관리가 되었지만 난을 피해 남쪽으로 건너왔다. 손권이 정권을 총괄할 때 여대는 막부로 가서 그를 알현했다"고 한다. 강동에 건너간 것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서성 때 언급했듯이 손책이 여대를 알았더라면 3, 40대 한창의 나이에 관리 경력이 있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뒀을 리 없다. 그러니 190년대 후반의 혼란 때 제갈근과 비슷한 시기에 넘어가지 않았을까 한다. 손권이 죽고 손량이 제위를 이은 후에도 벼슬에 있었다.
6. 종합하는 망상잡담
-이상의 목록에는 193년 이후의 혼란기 때 서주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 변씨, 제갈탄, 왕씨, 장홍이 그렇다. 전란을 겪고 양주로 피난갔다가 손책 내지 원술의 초청을 거절해 조조에게 간 케이스도 있다. 서혁, 진교, 서선이 그렇다. 왕랑의 경우는 수 년을 바다에서 표류한 이유가 서주의 혼란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손책에게 심하게 쪼인 과거가 있으니 양쪽에 다 해당될 수 있다. 진씨 부자는 기본적으로 조조에게 호의적이었으니 파란색을 칠하겠다. 이것을 감안하고 다시 출신지를 정리해봤다.
낭야 출신 : 변황후, 서혁(x), 제갈탄, 왕부인, 제갈근, 서성, 제갈량
동해 출신 : 왕랑(x)?, 미축
팽성 출신 : 장소, 엄준
하비 출신 : 보부인, 보즐, 노숙, 진규, 진등
광릉 출신 : 장홍, 진교(x), 서선(x), 장굉, 여대
........뽑아 보고 내가 놀랐다. 이것만 놓고 보면 190년대의 혼란을 겪은 서주 사람들은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고 처음부터 조조에게 사관할 뜻을 세웠던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되지 않는가. 뭐, 뭐지 이건. 이번 포스팅을 준비하면서 여러 차례 서주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나는 서주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조조에게 사관하지 않으려 했다는 식으로 전제하진 않았다. 분명 서혁, 진교, 서선의 경우처럼 경위야 어떻든 결국에는 자발적으로 조조에게 사관한 케이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이거 참, 뭐라 말을 해야 할지. 희대의 병크 원공로가 만약 회남에 없었더라면, 같은 가정은 무의미하겠지.;;;
-그리고 열전을 가진 서주 사람들의 연령대를 보다 보니 묘한 공백이 보인다. 언급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어린 세대가 왕부인과 제갈탄이고 다음으로 어린 세대가 제갈량인데 두 세대는 20에서 30년 가량 차이가 난다. 190년대와 200년대에 바로 출사할 수 있었던 세대와 비교한다면 1.5에서 2세대까지 차이난다. 190년대생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또 다른 제갈씨인 제갈서의 경우 출신지가 불분명하다. 일단 제갈씨니까 낭야 양도로 쳐보자. 제갈서는 등애 밑에서 263년 촉정벌에 참전했고 서진시대에 위위까지 오른 경력이 있다. 그러니 역시 제갈탄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나이가 적을 듯하다)
나에게는 이것이, 제갈탄 세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서주에서 나고 자라 위나라의 조정에 들어간 인재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인재풀을 채울 호족들과 선비들이 대부분 190년대에 서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진서를 참고할 수 없었기에 제갈량과 제갈탄의 사이에 들어가는 세대로서 서주에서 나고 자라 곧장 위진의 조정에 들어간 인물들을 놓쳤을 가능성이 있다. (혹시라도 오해 없도록 덧붙이자면 200년 이후의 서주는 쭉 위, 진의 영토였다. 그래서 위진의 조정이라 지칭한 것이다. 나는 위, 진의 치리 하에 있던 서주 사람들이 일부러 사관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203년생인 제갈각이 있다. 제갈각은 아버지 세대의 고향인 서주가 아니라 양주에서 나고 자라야 했다. 열전이 없을 뿐 제갈각과 비슷한 경로를 탄 서주 사람들의 후예가 드물진 않았으리라. 나는 이렇게 된 배경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삼국시대'를 기준으로 본다면 190년대의 혼란상이 서주에 준 영향은 한때 삼국을 통틀어 서주 출신 인재의 명맥이 끊겨버릴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