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전에서 발췌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저 밑줄 친 부분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일단 일의 선후나 정리하자. 젠장할.
1.
유비가 원술과 대치하다 여포에게 당한 것은 196년의 일이다.(무제기) 자치통감의 경우 196년 여름 5월 무렵 동승이 낙양궁을 보수한 기록과 7월 헌제가 낙양에 도착한 일 사이에 이 사건을 정리했다. 그럼 사마광은 여포의 배반이 6월을 전후해 있었던 일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문제는 양봉과 한섬이다. 장안에서부터 헌제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낙양까지 온 양봉과 한섬은 그들의 전횡에 화가 날 대로 난 동승이 그때까지 꺼리던 조조를 끌어들이면서 쫓겨났다. 한섬은 196년 가을 7월 조조가 낙양에 도착하자 도망쳤고 다른 곳에 주둔하던 양봉은 허도로 가는 어가를 쫓아가다가 겨울 10월 조조한테 격퇴당해 원술한테 도망쳤다.(무제기) 그런데 선주전에서는 위 스샷에서 보다시피 여포한테 당하고 광릉에서 개고생하던 유비가 양봉과 한섬을 친 기록이 있다. 선주전에 두 사람이 언급되는 건 위에 스샷으로 올린 저 부분 뿐이지만 실제로 양봉이 유비에게 주살당하는 것은 197년의 일이다.(위서 동탁전에 인용된 영웅기 주석. 197년이라는 시간대는 자치통감에서 찾았다) 선주전에 적힌 부분은 대략, 196년 말 조조에게 당한 양봉과 한섬이 서주, 양주 사이에서 떠돌며 원술이 있는 회남으로 향하다가 그 길목에 있던 유비에게 걸렸다고 해석하는 게 무난할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둘은 197년 원술의 부하로서 여포를 공격하다 다시 배반하는 기록이 있으니까 여기서 죽진 않았을 것이다.(후한서/위서 여포전)
2.
그렇다면 196년 6월 이전(영웅기는 학맹의 반란이 있었던 196년 6월 여포의 치소가 하비였다고 적는다)에 하비를 잃은 유비는 최소한 10월까지는 광릉에서 고생했으며 그 후에 여포한테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원문사극 이벤트다. 후한서/위서 여포전의 기록을 보면
유비의 항복 받아들여 예주자사 만들어주고 소패에 주둔시킴 -> 원술의 장수 기령이 유비 공격하자 유비가 여포한테 구원 요청 -> 원문사극 -> 원술이 칭제한 일을 말하자 여포가 이전에 혼담을 주고받은 대로 딸을 보냄 -> 진규의 진언을 듣고 아직 길 위에 있던 딸을 데려와 파혼
의 순서로 일이 진행되었다. 원술이 칭제한 것은 197년 1월이니 원문사극은 그 전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여포가 항복을 받아준 이래 유비는 쭉 소패에 있었을 것이다. 광릉과 허도 사이에 하비가 있으니 광릉에서 고생하던 유비가 직접 조조한테 달려가 의탁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된다. 소패로 돌아간 후 몰래 사절을 보냈다면 모를까.
문제는 이것.
196년 ... 여포가 유비를 습격하여 하비를 차지하자 유비는 달아나 공에게로 왔다. 정욱이 공을 설득하며 말했다. "(생략) ... 빨리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공이 말했다. "(생략) ... 불가하오." (무제기)
그럼 이건 뭥믜? 심지어 선주전과도 좀 어긋나는 건 아닌가?;
자치통감은 무제기를 따랐는지 196년에 유비가 조조한테 가 예주목이 되었다고 적었다. 한편 위 스샷의 선주전을 따르면 조조가 유비를 받아들이고 예주목으로 만들어준 것은 그보다 뒤의 일이다. 사실 여포가 멋대로 만들어준 예주자사 자리를 조정에서 인정해주고 한술 더 떠 예주'목'으로 쳐주는 일이 196년 시점에서 일어나는 건 문제가 있다. 같은 시기에 여포는 서주자사를 자처했는데 197년 초엽에 정식으로 서주목을 인정해 달라고 진등을 보냈지만 허사로 돌아가 화를 낸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여포전. 그때 여포를 달랜다고 내준 자리가 좌장군, 진등이 내응을 약속하고 조조한테서 받아간 자리가 광릉태수였다) 쫓겨난 유비가 먼저 '목'으로 인정받으면 그를 쫓아낸 여포가 가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유비가 고순에게 깨지는 것은 198년 7월에서 9월 사이의 일이다.(무제기) 예주목이 되는 것은 그 전이고, 선주전의 기록대로 소패에서 군사 만여 명을 모았다가 여포한테 공격당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다. 여포가 항복을 받아들이고 소패에 주둔시킨 유비를 공격했다면 그것은 예주목 건과는 관련이 없다. 유비가 군사 1만명을 모았다가 여포한테 공격당한 시점이 언제인지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3.
197년 상반기, 파혼 건으로 분노한 원술은 자기 부하들을 양봉, 한섬과 함께 보내 여포가 있던 하비를 공격했다. 진규가 양봉, 한섬을 꾀어내자 그 둘은 여포의 편에 붙어 원술군을 대파했다. 그 후 양봉과 한섬은 하비에 머물며 서주, 양주 사이에서 노략질을 한다. 그런데 197년의 회수 근처는 가뭄으로 극심한 기근에 시달린다.(원술전) 식량이 없자 양봉과 한섬은 형주로 가고자 했는데 여포가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둘은 유비와 여포의 사이가 나쁜 점을 이용해 여포를 공격하자며 유비를 꾀어낸다. 유비는 허락하는 척 소패에 양봉을 불러들여 대접하다가 그 자리에서 주살했다. 한섬은 양봉이 죽자 기병 10여명과 병주로 돌아가다가 저추에서 장선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이상 동탁전에 인용된 영웅기)
자치통감은 양봉과 한섬이 패망하는 사건을 197년 11월 조조가 재차 장수를 공격한 일 다음에 기재했다. 사마광은 연말 내지 197년의 하반기에 일어난 일로 생각한 모양이다. 여하튼 197년의 어느 시점에서 유비는 분명 소패에 있었다.
4.
유비가 여포에게 항복한 것이 196년 말, 원술과 여포가 하비에서 싸운 것이 197년 상반기, 유비가 양봉을 주살한 것이 197년 하반기라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원술과 여포가 싸우는 동안 유비는 소패에서 착실히 흩어진 군세를 회복했고 그 결과 양봉과 한섬이 여포를 치는 데 유비를 이용하자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규모를 불렸다, 그것이 1만여명 정도, 양봉과 한섬이 유비한테 당해 일거에 패망해버리자 여포의 경계심이 발동해 소패를 공격했다, 그래서 유비는 197년 말 조조한테 의탁해 예주목이 되었다- 라고.
무제기의 196년자 끄트머리의 기록은 정확히는 그 무렵 있었던 하비 뒤치기를 기록하는 게 주된 목적이고, 그 결과가 쭉 이어져 결국 유비가 조조한테 귀부하게 된 훗날의 일(197년?)을 문맥상 같이 서술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다만 이 경우 진짜 짜증나는 것은 197년 9월 원술이 예주 진국까지 쳐들어오자 조조가 직접 나서서 격퇴한 기록이다.(무제기)
진은 영천 바로 동쪽이다. 영천의 허도에서 협천자를 명분으로 쥔 조조로서는 반드시 친정을 해서라도 원술을 물리칠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원술이 거기까지 들어가는 동안 이전까지 원술의 상대였던 유비는 예주 패국 소패에서 뭘 했느냐는 거다. 유비는 소패에서 여포 눈치만 보느라 꼼짝도 못했거나, 이때 이미 여포에게 공격당해 허도로 도망간 상황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느 쪽이든 197년 9월 무렵의 유비는 원술에게조차 무시될 정도로 약소한 세력으로 전락했다고 봐도 무방할 거라 생각된다. 아.. 촉빠로서 뭔가가 지금 막... 끓어오른다. -_-;
5.
한편 197년의 서주 바깥에서는 이런 일들이 있었다.
1월 원술이 천자 자칭. 조조는 완에서 장수에게 패배, 조앙 전사.
3월 원소가 조조의 양보로 대장군이 됨. 기주, 청주, 유주, 병주의 督이 됨.(공손찬은 아직 역경에서 농성 중)
5월 메뚜기 대란
9월 한수 범람. 원술이 예주 진국에 침범했다가 조조한테 격퇴당함.
(효헌제기+무제기)
무제기는 197년의 기록이 무척 간략하다. 1월에 완에서 삽질한 일이 비교적 자세히 적힌 다음 한참 공백이 있다가 9월 원술을 격퇴하고, 11월 재차 장수를 공격한 정도만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전반기에는 장수한테 깨진 것과 더불어 하북에서 공손찬을 거의 몰아넣은 원소를 견제하느라 바쁘지 않았을까 싶다. 조조는 장수에게 깨진 후 원소한테서 심사가 꼬이는 편지를 받고 버럭하다 순욱과 상담한 일이 있다. 내용을 보면 197년 상반기의 조조가 가장 염려한 것은 원소가 혹시라도 서량 쪽의 군벌들과 연합하고 더 나아가 촉까지 세력을 뻗는 경우였다.(순욱전. 이에 대한 순욱의 대답과 인선이 명안이라 역시 순문약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쪽과 북쪽의 일이 바쁜데 동쪽의 여포와 원술까지 신경 쓰려면 소모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다. 그래서 유비를 예주목으로 앉혀 소패를 지키게 하며 예주, 즉 허도의 동쪽 방위를 맡겼다는 게 일전에 서주 시리즈로 포스팅을 하면서 했던 망상이다.
게다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198년 봄에 유비의 군사들이 여포가 말 사러 보낸 사람들을 약탈한 일이 있다. 고순과 장료가 소패를 공격한 것은 이 일이 원인이었다.(선주전에 인용된 영웅기) 그러니 위의 스샷에서처럼 유비가 예주목이 된 후 조조의 원조를 받아 소패로 돌아간 것은 늦어도 198년 봄 전의 일이다. 역시 197년 하반기에 여포한테 공격당해 허도로 도망쳤으며 그때 예주목이 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선주전에 연도 하나만 적혀 있으면 끝날 일을, 그렇지 못해서 장문의 뻘스러운 망상잡담이나 늘어놓고 있다.-_-;
삼국지만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아 자치통감을 봤더니 더 혼란스러워졌는데, 유비가 예주목이 된 일은 196년이 아니라 197년으로 잡아도 누가 나한테 뭐라 하진 않을 것 같다. 왜냐면 정확한 시점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_-; 자치통감은 그 시점을 얼렁뚱땅 196년자 기록에 집어넣고 그 후 유비의 소재에 관한 공백은 침묵하는 걸로 넘어가던데 내가 사마광이라도 그렇게 쓸 것 같다. 선주전부터 이래서야, 추측과 망상 밖에 할 수 없지 않은가?;
6.
스샷의 빨간줄로 돌아가자. 저 시점에서 유비는 여포에게 항복하고 소패에 막 돌아간 때이다. 그때부터 하비는 여포가 차지했다. 196년 6월 학맹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비로 쳐들어가고 197년 원술이 하비로 군사를 보낸 것은 여포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우가 하비를 지키기 위해 보내졌다? 저 시점에서 유비는 여포의 객장 비슷한 위치로 떨어졌는데 어떻게 그 부하가 하비를 지키나? 파성에서 원문을 보니 그쪽에도 "先主遣關羽守下?"(물음표는 아마도 하비의 邳)라고 되어 있던데, 그럼 오역은 아닌 것 같다. 혹시 여포가 관우를 쓸만한 장수 겸 인질로 보내라고 하기라도 했나? 그렇지만 관우전에는 별다른 말이 없다. 설령 관우가 좋은 의도로 하비에 있었다 해도 이후 유비와 여포의 관계가 은근히 험악했던 걸 생각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탈출하던가 해야 했을 것이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인가. 저 시점에서 어떻게 관우가 하비를 지킨단 말인가?;;;
유비 패밀리 시절로 촉빠질 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곤란하다. 그만큼 멋대로 망상질하는 재미는 있지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