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저는 삼국지를 소재로 만들어진 세 편의 중국 영화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용의 부활>은 삼국지를 기대하고 간 탓에 실망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꼭 상산 조자룡이어야 하고 배경은 삼국지여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감독의 주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대신 유덕화의 조자룡과 안지걸의 등백묘를 건졌습니다.) <적벽>은 감독의 주장이 더 이상한 방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양조위 탓이 아니라 감독의 취향 탓에 영화 속 주유의 캐릭터가 재미없게 묘사된 데다, 결정적으로 시리즈의 맨 마지막에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사를 쳐 여태까지 벌어진 이야기를 주인공 스스로 부정하는 황당한 시츄가 벌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대신 금성무의 제갈공명과 장진의 손중모를 건졌습니다. 손권이 마음에 들기는 처음일세ㅋㅋ) 두 영화는 그래도 '삼국지'로부터 떨어져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재미있었습니다. <삼국지 : 명장 관우>라는 타이틀로 들어온 <관운장>은 최악이었습니다. 망탁조의라며 역적으로만 기억되는 조조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조조에 맞서 평생 싸운 유비의 입장이 전혀 조명되지 않은 탓에, 정작 주인공인 관우는 조조로부터 등을 돌리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가 되어버렸습니다. 감독이 조조나 유협을 통해 말하려 한 것은 역사 속의 위무제나 헌제가 아니라 현대 중국정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삼국지는 실제 1800년 전 중국땅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작품 안에 든 인물의 언행에서 작품 바깥에 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느껴진 순간, 창작이 지켜야 할 선을 넘어 '역사'마저 왜곡된 것처럼 몹시 불쾌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초한지>에 대해서도 저는 극장에 가기 전 약간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초한지-천하대전>, 포스터는 평범하게 서초패왕 항우와 한중왕 유방과 기타 등등이 멋없이 늘어선 모양새, 하나뿐인 아가씨는 높은 확률로 우희. 이전에 본 몇몇 기분 나쁜 중국영화처럼 하나의 중국, 하나의 패권 아래 평화를 외치는 내용으로 흐르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단순한 무협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감독이 <용의 부활>의 그 감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런 의심을 일단 보류했지만 대신 어떤 영화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오늘 오후에 외출할 일이 없었다면 늦잠을 자고 말지 극장에는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 영화를 보러 가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이하, 미리니름이 7할쯤 들어가리라 생각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영화의 원제목이기도 한 홍문의 연입니다. 장수들의 기싸움으로 시작해 책사들의 명분 다툼으로, 포로의 목숨이 걸린 대국으로, 그리고 홍문연다운 진짜 칼부림으로. 이렇게 긴장되면서도 품위 있는 홍문연이라니! 그리고 그 자체가 긴 호흡을 안배하고 꾸며진 이중, 삼중의 속임수였다니! 홍문연의 긴장감과 몰입도가 너무나 대단했던 탓에 그 다음부터는 약간 템포가 처지는 느낌이지만, 꽉 짜인 거대한 틀 안에서 정연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는 또 다른 유장한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줄거리에 대해서는 긴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이 영화는 직접 봐야 합니다.
캐릭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저는 표를 사면서 1995년에 나온 <서초패왕>이라는 영화를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영화를 본 때는 초등학생이었군요. 그럼에도 네 장면 정도가 아직도 인상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재물 욕심으로 지체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가족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수레에서 직접 시어머니를 떨쳐내는 여치, 영웅호걸다운 순정남 항우와 공사다망하게 찌질한 유방을 비교하며 공으로나 사로나 속을 앓는 킹메이커 여치, 음. 여후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있네요. 나머지 둘은 사면초가의 밤 큰북을 두드리며 사납고도 슬프게 해하가를 부르짖던 항우, 그리고 맨 마지막에 단 한 컷 출연했는데 너무 번쩍거리는 차림 때문에 천박해 보이던 한신입니다. 그 영화에 대해서는 항우와 여치가 실질적으로 투탑 주인공이고 두 사람의 히로인은 우미인이었던 것처럼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한신조차 한 컷 등장하고 말 정도로 이야기는 그 셋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유방의 경우에는 어찌나 음흉하고 찌질한지 그가 죽은 후 여치가 직접 정권을 잡은 게 이해가 갈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비중도 셋에 비하면 낮았고요.
<초한지>의 경우에는 인물구성부터 다릅니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물론 항우와 유방이지만 항우에게는 범증, 항백, 항장, 용저가 있고 유방에게는 소하, 장량, 한신, 하후영, 번쾌가 있습니다. 캐릭터 해석도 비교됩니다. 해하에서부터 반전을 드러내는 유방은 이 사람이 바로 그 한고조구나 싶은 조용하고도 섬뜩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400년 후의 후손인 한소열 유비를 두고 진수가 한고조의 풍모라 평한 것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은, 그야말로 영웅이었습니다. 그 대신 여치는 후계자를 묻는 단 한 컷으로 등장한 그 냉정한 여인이 그 사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중이 없습니다. 항우의 경우,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도 역발산기개세의 그 서초패왕처럼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들끓는 격정을 해하가로 토해내지도 않습니다. 이 항우는 외양만 얌전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어딘가 약한 느낌입니다. 유방에 비하면 애송이 같은 느낌조차 있었습니다. 우희는 여기서도 항우와 유방 모두에게 사모받지만 그 의미가 <서초패왕>과는 다르게 다가옵니다.
<서초패왕>에서 역전된 것 같은 <초한지>의 해석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분명해진 것은 결말의 토사구팽 때였습니다.
항우와 유방을 앞세워 범증과 장량이 둔 대국은 단순히 천하를 걸고 패권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얻고 잃는 것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홍문의 연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뒤집혔습니다. 그때까지 승자였던 항우는 변한 것이 없지만 죽음 직전까지 떨어진 유방은 살아남아 천하를 쥐기 위해 자신의 인간적인 부분을 버렸습니다. 항우는 천하를 잃고 패자로 죽었지만 우희의 순수한 사랑과 범증의 버림받으면서도 저버리지 않는 충성을 얻었습니다. 유방은 천하를 얻었지만 함깨 해온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정리를 모두 잃고 쓸쓸히 죽었습니다. 유방이 사모했던 우희는 끝내 항우를 택했고 유방의 아내인 여치(로 추정되는 여인)는, 아아, 단 한 컷 출연해 단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이 여자에게서는 이미 척부인을 발 아래에 둔 여태후가 보입니다. 홍문연에서 극한의 충정을 보였던 소하, 장량, 한신은 토사구팽 당하고, 번쾌는 변한 유방을 성토하며 자결했습니다. 유방이 죽은 후 여씨가 축출될 때까지도 멀쩡히 살아남아야 할 하후영이 유방 생전에 전사 처리되는 건 이런 흐름에서 필요한 연출이었다 생각합니다. 어찌 됐든 이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토사구팽 당하지 않은 사람은 하후영과 번쾌 뿐입니다. 소하는 살아남았지만 남은 생애를 전전긍긍했고, 장량은 신선이 되겠다며 스스로 떠났으며, 한신은 정말로 처참히 살해당했습니다. 초한지보다는 차라리 삼국지에 어울리는 스산한 무상(無常).
그를 위해 자결한 우희의 시신을 두고 단기로 한군에 돌진하면서 항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천하를 얻은 그때부터 매일같이 반란을 두려워하며 수족 같던 공신들을 잘라낸 유방은 제위에 오르고 7년 만에 사망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장량은, 홍문의 연이라는 전투에서 지고 초한쟁패라는 전쟁에선 이겼다고 생각했던 장량은, 범증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던진 마지막 수로 군신의 정리라는 대국에서 패한 장량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감독은 2000년도 전에 치열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고, 느낀 그대로 담담히 풀어낸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이 어떤 주의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 사람들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사람들의 삶을 조용히 관망하는 기록자에 가까웠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원제 그대로 "홍문연"으로 옮겨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여담인데, 한신을 연기한 배우는 <용의 부활>에서 열혈남아ㅋㅋㅋㅋㅋㅋ 등백묘를 연기한 그 안지걸이었습니다. 어쩐지 나부끼는 장발과 불손한 눈초리에서 익숙한 스멜이 나더라니ㅋㅋ
p.s. 초한지는 삼국지만큼 파지 않아 대강의 줄거리 밖에 모릅니다. 영화 속에서 어느 부분이 픽션이고 어느 부분이 실제 사실인지 구분할 자신은 없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도 픽션과 사실이 마구 섞여 있을 겁니다. 유의해주세요.;
p.s.2 사실 항우는 인간백정 취급당해도 할 말 없는 인물인데 왜 천하의 개객기가 아니라 패왕별희 같은 비극의 영웅으로 중국 민중의 기억에 남은 건지 잘 모르겠음. 실패한 영웅이기 때문인가? 어쨌거나 백성과 지배층 모두에게 미움받은 진나라를 부정하고 일어섰기 때문인가? 조조는 이런 데선 좀 억울해할 것 같음.그러니까 빈찬합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
p.s.3 이런 영화 보면 항상 내 입에서 나오는 타령인데 1차 북벌 영화화 플리즈(...) 이인항 감독님 이제는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거 용의 부활은 잊고 다시 한 번(...) 물론 조운과 등지는 캐스팅 유지해주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