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기간이 다가오면서 바싹 마른 멘탈은 나날이 쿠크다스 가루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갈 데 없는 분노를 풀기 위해서라도 미리니름을 마구 휘갈길 겁니다. 영화 아직 안 본 분들은 주의하십쇼.
스타트렉은 쌍제이의 <비기닝> 이전에 무려 10편의 영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1편은 순수한 sf적 상상력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근데 그런 스토리로 나간 건 1편이 끝입니다. 2, 3은 뭐랄까 커크와 스팍 팬을 위한 서비스에 가까웠고 4~6편은 tos 배우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는 시트콤, 7~10편은 tng 배우들이 티비에서 보여주는 tng의 옴니버스 에피소드 하나를 뚝 떼어 영화에 옮겨놓은 느낌이었습니다. 2편부터는 스타트렉을 본 적이 없는 관객을 거의 배려하지 않는 스토리였던 거죠. 10편이라 할 <네메시스>의 성적이 워낙 처참했던 데다 마침 티비 드라마 쪽도 온갖 야유를 듣던 ent가 4시즌만에 빠르게 종결되고 더는 후속작이 나오지 않아, 다시는 트렉으로 영화고 뭐고 못 볼 거라 생각한 팬이 많았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타트렉이 '영화'로 부활할 수 있었던 건 쌍제이의 <비기닝>이 트레키가 아닌 관객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스토리와 형식을 갖췄던 덕이 클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비기닝부터 본 분들은 스타트렉이라는 sf계의 고전이 스타워즈 못지 않은 우주 활극 액션물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스타트렉은 물론 활극적인 요소의 비중이 크지만 기본적으로는 엔터프라이즈라는 우주선 (ds9의 경우에는 우주정거장 딥 스페이스 나인이겠죠) 안에서 수 년 동안 동고동락 아웅다웅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양반들이 우주의 미답지를 개척하고 인간이 아닌 종족과 만나 교류하는 틈틈이 시트콤 찍는 탐험담입니다. ds9의 경우 정거장이 우주에서 가장 전략적인 위치에 고정된 특성상 정치적, 군사적 드라마가 이야기의 메인스트림을 차지하지만, 그런 문제가 없을 때면 멤버들은 다른 시리즈의 인물들처럼 미지와 조우하고 sf적 상상으로나 가능한 사건사고와 마주칩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든 전쟁질을 하든 스타트렉이라는 이야기의 심부에는 언제나 현실에서 하려면 조심스러워지는 이야기를 상상의 틀을 빌려 고발하고 인간을 돌아보는 sf의 본질적 고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반 이상은 물론 시트콤이지만요.
스타트렉으로 영화를 찍는 건 그래서 무척 어려운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시리즈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과 시트콤에서 멀어지면 기존의 열성팬덤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원작 드라마 시리즈에 충실해지려 하면 영화로서 흥행하기가 어렵죠. 스타트렉이 구축해온 긴 역사와 방대한 분량과 거대한 열성 팬덤은 큰 진입장벽입니다. <비기닝>이 아예 패러렐 월드를 택함으로써 기존의 설정을 다수 리셋하고 시작한 건 여러 의미에서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괜찮은 포석을 깔고 출발했건만, 이번 <다크니스>는 쌍제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군요. 저는 <다크니스>에서 몇 가지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첫째로 이야기의 방향성이 <비기닝>을 보며 예상했던 것과는 좀 많이 달랐습니다. 섹션31이 언급되고 마커스가 '강한' 연방을 외칠 때부터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요. 클라이맥스에서 추락한 우주선이 스타플릿 사령부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쓸어버리는 장면에서 그게 뭔지 감이 오더군요. 인물들과 시간대의 배경은 tos인데 이 영화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건 ds9인 것 같습니다. 과연 지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연방이 그럼에도 이상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보호를 이유로 비윤리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될 것인가. 이것이 ds9의 메인스트림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 중 하나죠.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ds9은 스타트렉의 전통과 이상에 대해 무척 도전적인 시리즈입니다. 진 로덴베리는 tos와 tng를 통해 물질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진보한 긍정적인 인류의 미래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ds9에서는 로덴베리의 이상에 앞서 적은 것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주인공들이 그 이상을 스스로 엎어버리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번 <다크니스>에 언급된 섹션31은 ds9에서 처음 등장한 소재로, 커크의 시대(즉 tos)에도 이미 암암리에 존재했다던 설정을 갖고 있긴 합니다만 연방 대통령조차 존재를 모를 정도로 극비리에 이어져 내려오는 조직입니다.그런 걸 커크 앞에서 그렇게 쉽게 까발리다니 OTL 섹션31의 대단한 업적 하나를 소개하자면 전쟁을 끝낼 방법으로 치명적인 전염병을 만들어내 적진영의 지도자급 종족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어느 정치적 책임자가 허가하거나 한 게 아닙니다. 자기들 맘대로 그게 연방을 위한 길이라 판단하고 인종청소를 시도했던 거지요.
여기저 두번째 이질감이 느껴졌는데요. 첫번째 이질감에서 ds9을 떠올린 분이 한국 사람이라면, 스타트렉 시리즈를 거의 대부분 찾아본 팬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쌍제이의 영화 이전에는 트렉의 인지도 자체가 낮았던지라, tos의 바람둥이 커크나 tng의 대머리 피카드 함장의 얼굴 정도는 알아도 그 이후 시리즈는 뭐가 있는지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일 거라 생각됩니다. ds9을 검색하면 제 블로그가 주로 뜨는 게 매우 민망해서 하는 소리만은 아니굽쇼. 요는 트렉 시리즈를 모르는 사람도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던 <비기닝> 때와는 이야기 내의 균형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스팍이 왜 프라임 디렉티브인가 뭔가 이상한 규칙에 진짜로 자기 목숨을 거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분들 많으셨을 겁니다. 스카티가 스타플릿은 군대가 아닌데 왜 어뢰를 싣냐며 깜놀하는 것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분들 계셨겠지요. 스팍은 단지 규칙을 지켜야 하니까 프라임 디렉티브에 목숨을 걸었던 게 아닙니다. 스타플릿은 원래 군대가 아닙니다. 프라임 디렉티브를 위반하거나 적에 대한 호전성을 군사력으로 드러내는 연방이라는 게 트렉 세계관에서 얼마나 논쟁거리가 되는 사건인가는 tng 하나만이라도 본 팬이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는 마지막에 커크가 하는 연설의 내용도 무척 뜬금 없게 여겨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번째로, 트렉 시리즈와 관련된 문제를 떠나 영화 한 편을 구성하는 이야기의 흐름이 무척 산만하고 삐걱거린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서 귀염둥이 트리블은 왜 나오는 것이며, 클링온은 대체 왜 끌어들인 것인지? 클링온의 성깔을 생각하면 사건을 빌미로 바로 전쟁 선포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이쪽에 대한 처리는 어느 순간 사라졌죠. 칸어이쿠 미리니름! (>3')~이 분노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 영화 한 편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기존 영화 시리즈의 2편 <칸의 분노>나 복습해야 할 것 갘습니다. 결국에는 <칸의 분노>의 그 장면이 패러렐 월드이기에 가능한 버전으로 재현되는 게 셀링 포인트였던 걸까요? 로뮬란처럼 폭주하던 스팍이 커크를 위해서라는 한 마디에 미스터 스팍으로 돌아오는 것이 키 포인트였던 걸까요? 이걸 가지고 쌍제이를 비난하거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원래 tos가 그런 내용이니까. 다만, 기왕 '이야기'를 만들 거라면 좀 더 앞뒤가 맞아 떨어지게, 부드럽게 장면이 이어지도록 할 수는 없었던 건지 그게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 <다크니스>는 기대를 하고 간 것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럽진 못했습니다. ds9에는 장점이 많습니다. ds9의 그 반동에 가까운 자아비판이 있어줘야 tos, tng에서 추구하는 이상과 균형을 이루어 보다 완성된 트렉 월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뭣보다 어둠에다크하니까(...) 평화로운 트렉 월드에 아무렇지도 않게 정치적, 전투적, 극적인 주제를 끌어들일 수 있는 점 등등.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묘사되어 트렉 월드 안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ds9이 ds9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tos나 tng에 ds9의 색깔을 입혀야 할 이유도 없고, 사실 잘 섞이게 하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혹시 쌍제이가 세 번째 트렉 영화를 만든다면 tos는 tos답게 가줬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트렉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도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요.
p.s. 현실의 시대적 한계 아래에서는 어찌 할 수 없는 부조리를 sf라는 '허구'를 통해 고발한다 하니 당장 이게 떠오르는군요. ds9 6x13 Far Beyond the Stars 강추합니다.
p.s.2 미스 채플은 우리 가슴 속에 영원합니다!
p.s.3 근데 트리블은 대체 왜 거기서 갑툭튀한 거임? 그리고 쌍제이는 혹시 떡진 머리를 극도로 혐오하기라도 하는 거임? 저번엔 멀쩡한 로뮬란들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더니 이번에는 멀쩡한 클링온 머리를 스킨헤드 만들어 놓데. 클링온의 명예로운 전사라면 마땅히 청나라 변발을 풀어헤친 스타일로 풍성한 머리털을 나부낌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그리고 우후라의 클링온어 실력이 살짝 안쓰러웠음. 클링온 말은 완전 으르렁거리면서 음절 하나! 하나! 짓씹듯이 내뱉어야 제 맛이지엽.
p.s.4 까먹고 안 적을 뻔했는데 저 트레키 아닙니다.
p.s.5 영화 보다 허탈하게 빵 터진 그 장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 말입니다 이거.
쌍제이 진짜 뭔 생각으로 스토리 썼냐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