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감상 : 금년에 개봉한 걸 보러 간 영화 중에선 그래비티가 최고다.
'사이언스 픽션'이라 하면 현재는 불가능한 과학기술이 나와줘야 할 것 같고, 따라서 배경은 미래가 되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루는 사건들은 오늘 저녁에 당장 뉴스로 떠도 이상하지 않을 일들입니다. 바로 며칠 전 위성 궤도상의 데브리스를 제거하기 위해 청소 위성을 발사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나는군요. 빠르게 날아다니는 데브리스 때문에 우주에서 작업 중이던 우주비행사가 위험해지는 건 2013년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시간적 배경만 기준으로 생각하면 이 영화는 왠지 sf라 하기 미묘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sf를 많이 접하진 않은 데다 장르 자체가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동네인지라, 이 미묘한 기분을 중심으로 감상을 적었다간 저 자신도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채 끝나게 되겠지요. 저는 sf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릅니다. 다만 즐기고 나서 좋은 sf였다. 그냥 그랬다 정도로 감상을 남기는 정도가 가능할 뿐입니다. sf와 sf가 아닌 장르를 엄밀하게 분류하지도 못하면서 '좋은 sf'라고 생각하는 작품은 있다는 게 좀 웃기는 노릇입니다만, 뭔가 정리된 이야기를 하려면 통일된 줄기는 있어야 하니 이 주관적인 기준에 맞춰 보겠습니다. 저에게 있어 '좋은 sf'는 간단히 말해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는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픽션이라는 허구를 빌려 투영하고 언젠가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꿈을 꾸는 것입니다. 좀 당의정스럽긴 하지만 제 취향이 이러니 넘어갑시다.
영화로 돌아갑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위성 궤도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우주비행사가 부서진 위성 파편에 휩쓸리는 재난을 당하고, 거듭된 좌절에 생존을 포기했다가, 굳세게 일어나 결국 지구로 돌아옵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짊어진 어떤 내면적 갈등도 성장의 형태로 해소됩니다. 흔한 재난 영화 패턴이 현재의 우주로 옮겨진 것이죠.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일반적인 재난 영화와 다른 어떤 감동이 있습니다. 품고 있는 이야기가 삶에 대한 의지나 개인의 내적 회복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고를 당하고 표류한 끝에 동료의 희생으로 간신히 소유즈에 들어간 주인공은 도킹룸에서 우주복을 벗어던지고 둥글게 몸을 말지요. 뒤편에 걸려있던 호스가 묘하게 겹쳐지면서,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태아처럼 연출됩니다. 지구상에서는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서있을지 몰라도, 중력을 벗어난 곳에서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유인우주선을 쏘아올리고 우주정거장을 지었다 해도 아직 우주에서의 인간은 모체(지구)에서 수정된 세포 덩어리 정도의 상태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인간의 무력함에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지구로 돌아온 주인공은 물에 빠지고, 거기서 다시 우주복을 벗어던진 채 헤엄쳐서,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생물의 진화는 물에서 시작되어 뭍에 상륙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마치 진화에 대한 은유와도 같은 장면을 지나 지상의 중력에 익숙해졌을 때, 주인공은 두 발로 일어서서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무력하여 한 발짝 들이기도 힘겨운 세계입니다. 아마도 주인공 개인으로선 다시는 우주에 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류라면 어떨까요.
언젠가는 마치 진화의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중력을 떠나 저 세계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요.
감독과 각본가가 이런 의도로 쓰고 연출했는지는 모릅니다. 이 영화는 제가 생각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을 가진 서사를 상상하는 것은 sf라는 장르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비티>는 '현재'라는 시점에서 이 점을 훌륭하게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은 sf영화라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p.s. 산드라 블록ㅠㅠㅠㅠㅠㅠㅠ 으헝헝 언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
p.s.2 <플라네테스>의 주요 소재들은 레알 나 살아생전에 실현될 것 같은데. 목성까진 못 가도 데브리스 청소 용역업체 정도는 진짜로 출현하게 되지 않을까?
p.s.3 극장 나오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게 어째선지 스타트렉 ENT 인트로인지라;;; ENT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ENT의 인트로 영상에는 찐한 뭔가가 있기에 같이 올립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