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포스팅 : 조운의 계양태수직에 대한 망상잡담
참으로 간만에 이런 짓 해보는근영. 아무래도 트위터로는 한계가 있어 블로그에 메모 남깁니다. 핵심사건이 핵심사건인지라 언제나처럼 운별전을 100프로 신뢰하는 걸로 깔고 갑니다.
1. 최협의의 적벽대전은 208년 겨울 10월의 일.(효헌제기)
2. 적벽대전 이전의 형남 4군
196(완에서 장제 전사)~200년(조조와 원소가 본격 대치 시작) 사이 장사태수 장선이 유표를 배반했다. 장선은 이전에 영릉, 계양 지역의 현장으로서 장강과 상수 지역의 민심을 크게 얻었던 사람인데, 목이 어지간히 뻣뻣했던지 유표한테 잘 순종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유표는 그 사람됨을 천박하게 여겨 예우를 제대로 안 해줬고 이 때문에 자선이 원한을 품어 모반한 것이다. 유표는 수 년 간 장선을 포위하고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가 장선의 사후 아들 장역의 대에 토벌했으며, 이로 인해 유표는 북으로는 한수, 남으로는 영릉, 계양까지 병합하게 된다.(유표전 배주)
이상의 일이 관도를 끼고 조조와 원소가 대치하기 전에 일어났다. 유표가 형주에서 혼자 제사 지내며 왕 노릇 하던 걸 생각하면, 관도 이후의 형남 4군을 관장한 태수들은 유표가 자의적으로 태수 시켜줬을 공산이 크다 여겨진다. 즉 무릉태수 금선, 장사태수 한현, 계양태수 조범, 영릉태수 유도는 일단 유표를 따르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3. 계양과부사건(...) 무렵의 사건 시간대
"유비가 강남으로 달아나자 형, 초의 수많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그를 따라갓지만(장판파 이야기임), 유파는 북쪽의 조조에게로 갔다. 조조는 그를 초빙하여 속관으로 삼고, 그를 보내 장사군, 영릉군, 계양군을 귀순시키도록 했다(유파전). [영릉선현전] 조조는 오림에서 패배하고 북쪽으로 돌아갈 때, 환계를 장사 등 세 군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환계는 자신이 유파에게 미치지 못한다며 사퇴했다. 유파가 조조에게 '형주가 유비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라고 하자, 조조는 '유비가 만일 형주를 먹을려고 도모한다면, 나는 육군(六軍)을 이끌고 쳐들어 가겠소.'라고 했다."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을 정벌했다. 무릉태수 김선, 장사태수 한현, 계양태수 조범, 영릉태수 유도가 모두 항복했다. 여강의 뇌서는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계상(稽顙-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함. 투항함)했다. 유기가 병들어 죽자 군하(群下)들이 선주를 추대해 형주목으로 삼고 공안을 다스렸다.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을 시집보내 우호를 굳건히 했다. 선주가 경(京口)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고, 은기(恩紀)를 주무(綢繆)했다.(선주전)”
"건안14년(209년),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이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삼았다. 유비는 표를 올려 손권에게 거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하고 서주목을 겸임하도록 했다. 유비는 형주목을 맡아 공안에 주둔했다.(오주전)"
“강남을 평정하는데 종군하여 편장군이 되고 계양태수를 겸하여 기존의 계양태수였던 조범을 대신했다. 홀몸이 된 조범의 형수 번씨가 뛰어난 미모가 있었는데, 조범이 그녀를 조운에게 짝지어주려 했다.(운별전)”
“선주는 마침내 강남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를 거두어 군실을 채우게 했다(제갈량전). [영릉선현전] 제갈량이 이때 임증에 머물렀다.”
"마침 유비가 이 세군을 점령하였으므로 유파는 복명할 수 없어 그대로 멀리 교지로 달려갔다(유파전). [영릉선현전] 유파는 영릉에 갔지만, 임무를 성사하지 못했고, 교주로 갈 생각으로, 경사(京師: 수도)를 떠나 오고 있었다. 이때 제갈량은 임증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유파는 제갈량에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
209년에서 210년 사이, 형남4군의 태수들은 유표가 죽고 유종이 재빠르게 항복하고 적벽대전이 벌어지고 남군 대치가 일어나는 등등 형주에 조유손 세 세력이 모두 들어와 혼란스럽던 상황에 휩쓸렸을 것이다. 태수들은 조유손 중 아무한테나 간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유비가 가장 빨랐다. 209년 유비가 형남을 정리하는 동안 비슷한 무렵에 조조를 대표하여 들어와 있던 유파가 포기하고 얼른 교지로 도망갔더랬다. 그렇다면 209년 무렵의 형남4군은 유비가 들어오기 전이라 해도 조조한테 적극적으로 항복할 생각은 품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4군 중 양양 내지 강릉에 가장 가까운 무릉군을 다스렸던 금선은 유비한테 맞서다 죽었는데, 다시 말해 이들은 유비한테도 당장 항복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금선의 죽음이 나머지 3군 태수들의 빠른 항복을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고. 그럼 혹시 손권한테 항복할 생각은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됐든 209년의 유비는 시기적절하고 신속하게 움직였고 그 결과 형남4군을 먹은 거라 봐야 할 것이다.
4. 제갈량의 위치
"...은기를 주무햇다. 손권은 사자를 보내 함께 촉(蜀)을 취하자고 했다. 어떤 이가 의당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오(吳)는 끝내 형(荊) 땅을 넘어 촉을 소유할 수 없으니 촉 땅은 가히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형주 주부(主簿) 은관(殷觀)이 진언했다 ... 선주가 이에 따르자 손권은 과연 계획을 그만두었다. 은관을 올려 별가종사로 삼았다(선주전). [헌제춘추]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孱陵-무릉군 잔릉현)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기록들을 보면 제갈량이 형남의 3군을 관할하러 임증에 내려간 건 이 지역에 대한 무력 평정이 얼추 마무리된 후라 짐작된다.
한편 손권이 촉을 치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유비가 보인 대처에는 당초 형주주부 은관의 간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제갈량이 아니라 형주의 주부가 간언했다는 게 흥미롭다. 물론 제갈량이 모든 사안에 끼어들어 의견을 밝힐 필요는 없지만, 제갈량에게는 적벽을 앞두고 손권에게 파견되었던 경력이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제갈량은 손권을 직접 만나 유손동맹을 끌어냈던 사람인 것이다. 만일 제갈량이 공안에 있었다면 유비는 반드시 의견을 물어봤으리라. 즉, 당시에 형주의 주부로서 주목 유비를 따라 공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은관과 달리 제갈량은 공안에 없었기에 이에 대한 조언을 할 수 없었다고 상상해볼 수도 있다. 일전에 구글어스로 재봤듯이, 공안과 임증 사이의 거리는 장난이 아니다(조운의 계양태수직에 대한 망상잡담). 선주전에 인용된 헌제춘추에 의하면 나중에 유비가 무력으로라도 오군의 입촉을 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제갈량을 남군에 뒀다 했는데, 제갈량은 이 무렵에야 임증에서 돌아왔다고 생각해봄직도 하다. 단, 209년 말 결혼동맹 당시 유비가 오를 방문하는 건 제갈량이 반대했으니(방통전에 인용된 강표전), 제갈량이 임증에서 돌아오는 시기가 210년쯤이라고 무조건 단정할 수는 없다.
5. 방통과 조운 미스테리오
한편 방통 뇌양현령 시절이 언제인가가 또 은근히 골 때리는 문제이다. 방통은 주유 남군태수 시절 주유 밑에서 공조 벼슬을 지내다가 주유 사후 유비를 섬기게 된 듯하다(방통전). 주유는 앞서 입촉을 준비하다 210년에 사망했다. 손권이 손유군을 보내는 것은 물론 그 후의 일이다. 방통이 형주종사 겸 뇌양현령에 임명되는 것 또한 주유가 죽은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뇌양에서 띵가띵가 노는 방통을 잡을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을까?
뇌양은 계양군 소속이다. 계통으로 따지면 계양태수가 1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더하여 연의에서 방통 잡으러 출동하는 장비는 이 무렵 의도태수에서 남군태수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둘은 장강을 낀 공안 주변 지역이다. 장강에서 계양은 좀 많이 멀다. 합리적으로 따지자면 방통을 잡는 건 연의에서처럼 판관 장청천이 나설 게 아니라 계양태수 조운이 담당하는 게 보다 현실성 있어 보인다. 문제는 이 경우 209년부터 210년 사이에 조운이 어디에 있었느냐가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일단은 임증에 내려간 제갈량을 위한 군사전문가(편장군)로서 가능한 한 제갈량과 붙어 다니거나 제갈량의 명을 수행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근데 210년쯤 되면 그 제갈량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두 양반이 같이 돌아다녔는지 따로 다녔는지 애초에 조운이 계양까지 간 적은 있는 건지, 그것은 나도 모르고 진수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른다. 베라머글!
6. 결론 :
유비는 209년 형남4군을 평정하고 형주목이 됐다(오주전).
유파는 적벽대전 이후 형남으로 파견됐다. 그러나 영릉이 유비한테 먹히자 교지로 도망쳤다.
계양과부사건은 우짜던동 209년의 일이다.
유비는 형남4군 평정 후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형남에 보냈다.
제갈량은 임증에 있을 때 교지로 도망친 유파와 편지를 주고받은 일이 있다(유파전에 인용된 영릉선현전).
주유가 살아있었던 209년 무렵 방통은 아직 주유를 따라 강릉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210년 주유가 사망한 후 손권은 손유군을 파견했다가 유비한테 막혀 포기한 일이 있다. 이 무렵 제갈량은 남군에 있었다.
방통이 뇌양에서 니나노 세월을 보내다 잘린 건 어쨌든 주유가 죽은 210년의 일로 여겨진다. 아무리 늦어도 211년 유비의 입촉은 따라가야 하니 그 전의 일이다.
그리고 촉서의 부실함을 물어 진수를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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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04. 추가
"조공(曹公)이 형주를 점령하자 임시로 비장군을 대행하게 하니, 예전 임무에 종사하며 장사태수 한현에 속하게 되었다. 선주가 남쪽으로 여러 군을 평정하자...(황충전)"
황충은 원래 유표 생전에도 장사군 쪽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조콩이 들어오면서 소속을 유임시킨 전적이 있었네. 그렇다면 장사는 일단 조조 쪽에 미적미적 붙어있었다는 이야기다. 유파가 형남에 가서 들인 노력이 처음부터 헛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이 다음에 발견한 기록인데.
"...주유를 따라 적벽에서 조공을 막을 때 ... 무봉중랑장으로 배수되었다. 무릉의 오랑캐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읍을 공격하고 수비하자, 이에 황개에게 태수직을 맡겼다. ... 난리가 모두 평정되었고, 여러 유수(幽邃)의 파(巴), 예(醴), 유(由), 탄(誕)읍의 후(侯)와 군장들이 모두 지조와 절개를 바꾸어, 예를 받들어 알현하기를 청하니, 군의 경내가 마침내 깨끗해졌다. 후에 장사군 익양현이 산적들의 공격을 받자, 황개가 또다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황개전)."
...............손권이 장사군의 행정구역을 맘대로 바꾼 일이라던가, 황개가 무릉태수였다던가. 이런 기록들 볼 때마다 손권이 유비가 취한 형남4군을 마치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용병을 통해 취한 자기 땅처럼 여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를 테면 서주 시절 유비가 여포를 맞아들였는데 이후 여포가 바로 배신 때리지 않고 유비를 도와 어딘가를 함락시켰다, 같은 느낌인가. 여하간 제갈량이 유비군 보급을 뚫기 위해 영릉, 계양, 장사를 담당했는데 무릉은 맡지 않았던 것이 이걸로 설명이 되나 싶다. 무릉은 위치상 강동에 가깝기도 하고.
"건안 14년(209년),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이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삼았다. 유비는 표를 올려 손권에게 거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하고 서주목을 겸임하도록 했다(오주전)."
"손권이 거기장군으로 임명되었을 때, 전유를 장사로 삼았으며 계양태수로 옮겼다(전종전)."
이 경우에는 할 말이 없다. 운별전을 신뢰하면서 진수의 전종전과 맞추려면 좁은 계양에 태수가 두 명 있었다 또는 조운이 밀려났다 정도로 해석을 해야 할 듯한데. 어차피 조운의 계양태수직은 진짜로 태수 노릇 하라고 보냈다기 보다는 오랫동안 같이 고생한 심복한테 적당한 지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제갈량을 도울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준 거라 생각하므로, 편장군직이 중요한 거지 형남4군 평정에서 유비의 형주목 취임 사이의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그쳤을 계양태수 직함이 유명무실해지는 정도로 무슨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다만.
"이 때 유비는 관우에게 영을 내려 진수하면서 형주를 독점하고 있으니, 손권이 여몽에게 명을 내려 서쪽으로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楊) 3군으로 공취하라고 했다. 여몽이 2군에 편지를 보내 귀복해 올 것을 바랬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普)만이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다 유비가 촉에서 친히 공안으로 와, 관우를 파견 3군을 쟁취하도록 했다(여몽전)."
묘한 것은, 요 익양대치 무렵(215년) 손권이 무력으로 계양 등을 침범했다는 건데, 계양, 무릉 등의 태수가 다 손권의 사람이라면 이 난리를 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익양대치가 일단 유비, 제갈량 등은 입촉한 뒤인지라 형남4군 평정하던 시절로부터 몇 년은 지난 시기이다. 그 사이 별별 일이 다 일어나긴 했을 것이다. 이걸 감안해도 저 "형주를 독점"했다는 표현이 눈에 밟힌다. 전유 또한 유비가 보낸 다른 태수에게 금방 밀려났던 건 아닌지.(...)
아무래도 209~211년 사이의 장강 이남 지역은 태수 등 행정구역 관련 벼슬 직함이 실제 권한 내지 역할과 일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우선 유비 소속인지 손권 소속인지를 알 수가 있어야지. 그나저나 손권 덕분에 팬픽질할 꺼리가 하나 나올 것 같네. 전종전의 저 기록 덕분에 제갈량 임증 시절도 생각보다 단축되었을 가능성이 마구마구 떠오르거든. 그 경우 헌제춘추와도 맞아 떨어지고.ㅋㅋ 계양 키워드로 검색 돌려서 나온 성과가 이 정도고, 이제 영릉, 장사로 검색을 돌려야겠다.
결론 :
제갈량 임증 시절과 조운의 계양태수 시절은 백일천하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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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09. 추가
트위터에서 황개가 무릉태수 된 시점에 대해 잠깐 혼자 떠들었음. 황개전을 중심으로 맞춰보면 대략 두 시기 정도로 좁혀짐. 209~유비 새장가 시즌(209말)이거나, 관우 죽음(219)~손권 등극(229) 사이 정도. 후자일 가능성은 좀 낮다고 보는 것이, 황개 쯤 되는 네임드라면 전오가 동원되어 관우 잡으러 출동했던 그 시절 아무것도 안 했을 리 없는데 그 무렵 기록이 없어서. 또한 215년 익양대치 이후 담판에서 무릉은 유비 쪽으로 넘어갔기에, 215년~219년 사이는 절대 해당되지 않음. 심증은 209년 쪽인데 마땅한 근거가 없어 골골거리던 차, 곰님이 좋은 가설을 제시하셨음. 나중에 팬픽에다 써먹어도 된다는 허락 받고 가져왔슴다.
개인적으로는 입촉을 위한 교두보 차원이라는 설에 입맛이 끌립니다. 이 경우 황개가 장사 쪽에서 도적 토벌하러 금방 이동해버리는 걸 설명하기 어려워지지만, 어차피 210년 쯤 되면 주유가 죽고 유비 측이 무언의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손권의 입촉 의지를 한풀 꺾어버리게 되니...
언제나 제 두서없는 잡설들을 진지하게 대응해주시며 재미난 결론에 이르게 도와주시는 곰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