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촉과 관계 없이 오나라 쪽 사람들만을 각잡고 정리한 적은 없고 앞으로도 어지간한 일이 없으면 일부러 찾아볼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명색이 삼국의 한 세력인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번 포스팅은 멋진 연성을 선물받은 답례로 리퀘를 받았으니 시작하는 거지만, 이제 슬슬 다른 세력도 천천히 공부를 해야지 싶긴 하다. 현실로긴 탓에 영 요원해 보이지만...OTL
제목에 '관계'가 아니라 '만남'이라 적어놓은 것은 말 그대로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났고 어떻게 나중에는 주유가 손책의 세력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는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번 메모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예전에는 티스토리에서 더보기 기능으로 접힘글을 쓸 때 편집화면에서 테이블 안에 들어가는 활자가 검은 글씨였는데 언젠가부터 엄청 흐릿한 회색 글씨가 됐다. 별장에 올리는 팬픽질이야 한글에서 작성한 걸 메모장 거쳐 cccv하는 거니 별 문제 없지만 블로그에서 바로 작성하는 건 역시 괴롭구만. 눈 아파서 못 써먹겠구마안...
1.
남의 족보를 따지는 건 그리 재미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후한 무렵의 중국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역을 중심으로 호족이 되고, 인맥을 쌓고, 관리로 천거됐으니, 어떤 인물의 배경을 알려면 일단은 선대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봐둘 필요는 있다. 이 출신지와 관련해서 손책과 주유에게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는데, 조상 대대로 살던 지역과 본인들이 태어난 지역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을 가능성이 있다. 우선 손책부터.
손견의 집안은 대대로 오군에서 벼슬살이 했는데, 그 집은 부춘에 있고, 조상들은 성 동쪽에 장사지냈다. (손견전에 인용된 오서)
회계의 요사스런 도적인 허창이 구장에서 봉기하여, .... 손견이 군의 사마로서 정용한 자들을 모집하여 ... 이들을 토벌해 격파하였다. 이해는 희평 원년(172)이다. 자사 장민이 그의 공적을 열거해 올리니, 조서로써 손견을 염독(鹽瀆)현의 현승(丞)으로 제수하였고, 여러 해 만에 우이(盱眙)승으로 옮겨갔다가 또 하비승으로 옮겨갔다. 중평 원년(184년),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위군에서 봉기하여... (손견전 본문)
삼국지 손책전에는 손책의 출신지가 적혀있지 않다. 이것은 손책과 7살 차이나는 동생 손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손견전에는 양주 오군 부춘현 사람이라는 말이 있으니 손책도 일단 오군 부춘현에 뿌리를 뒀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다른 포스팅에서 몇 번이고 의문을 제기했듯이 그게 실제 손책의 출생지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의 본관 개념 비슷한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손책은 175년생이고 손견이 172년부터 184년 사이 서주 남부의 여러 현(서주 광릉군 염독현, 서주 하비국 우이현, 서주 하비국 하비현)에서 현승을 지낸 걸 생각하면 손책이 태어난 곳은 서주 어딘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손책전에 출신지가 적히지 않은 것은, 양주 어딘가에서 태어난 것은 분명한데 조상은 서주 낭야 사람들인 제갈각과 비슷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찌 됐든, 손견 윗대로는 오군 부춘 지역에 선산을 두고 쭉 살았던 듯하다. 그 손무의 자손이라는 말도 있으니 손씨는 어지간히 유력한 지방 호족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손견의 아버지 손종은 소싯적에 가난해서 오이 농사로 어머니를 부양하며 먹고 산 일이 있는 걸 보면(손견전에 인용된 유명록) 유비는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이었지만 숙부뻘 되는 집안 어른은 유비를 당대의 석학인 노식에게 유학보낼 정도의 재력은 있었던 것처럼 가정별로는 집안 사정이 좀 달랐나 보다 싶다. 손견 자신은 17살 전에 이미 현의 관리가 된 것 같은(손견전) 뉘앙스의 기록이 있다. 역시 손씨라는 가문 자체는 손견의 대까지 확실히 세력이 있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한편 주유의 경우에는 본전에 양주 여강군 서현 사람이라 적혀 있다. 그런데 골 때리는 것이, 주유의 할아버지 대 및 아버지 대 집안 어른 중에는 태위를 지낸 사람들이 있고 주유의 아버지 주이는 낙양에서 현령을 지낸 기록이 있다. 주유전에서 집안 어른들 소개 다음에 나오는 기록이 이거다.
처음에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주유는 집을 (양주 여강군) 서현으로 옮겼다. (주유전)
반동탁연합이 결성된 것은 190년의 일이다(무제기). 동탁은 낙양에 불을 지르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집안 어른들의 경력까지 같이 고려하면 그 무렵의 주유의 가족들은 낙양 근처에 있다가 반동탁연합이 결성되어 손견이 1착으로 도착하던 무렵 본적지나 다름없는 양주로 피난한 게 아닐까 싶다. 즉, 주유 자신은 만나이로 15살 무렵까지 양주가 아니라 사례주에서 서울 사람으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는 이야기다. 새침한 서울 깍쟁이 도련님 주공근을 상상하니 뭔가 어울리는 것도 같고 깨는 것도 같고, 기분이 좀 미묘하긴 하다.(...)
2.
손견이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손책은 모친을 데리고 서(舒)현으로 옮겨가서 살면서, 주유와 서로 친구가 되었고, 사대부들을 거둬 모으니, 장강과 회수 사이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손책전)
손견이 주준이 올린 표에 의해 (그의) 좌군(사마)이 되자, 그의 일가는 남겨두어 수춘에 정착하게 했다. 손책의 나이 10세 때, 이미 교우관계를 맺어 이름이 알려지고 그의 명성이 자자하였다. 주유라는 자는 손책과 동년배였는데, 또한 영달하고 숙성하였는데 손책의 소문을 듣고, 서현에서 조언(造焉)으로 찾아왔다. 바로 우호관계를 맺으니, 그 우의가 쇠붙이도 끊을 만 하였다. 손책에게 서현으로 이주해 살 것을 권하니, 손책이 이 말을 따랐다. (손책전에 인용된 강표전)
중평 원년(184년),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위군에서 봉기하여, ... 한(漢)에서는 거기장군 황보숭과 중랑장 주준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격파하게 했다. 주준이 표를 올려 손견을 좌군사마로 삼을 것을 청하니, 향리의 젊은 사람들로 하비에 따라와 있던 자들은 모두 손견을 따르기를 원했다. (손견전)
손책전에서는 손책이 본래 살던 곳에서 주유가 있던 서현으로 곧장 옮겨간 것처럼 적고 있지만 강표전을 보면 이야기가 약간 자세해진다. 손견은 190년 동탁 문제가 있기 이전에도 이미 거병한 일이 있었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다. 그렇다면 손책은 만나이 9살, 음력 나이 10살이 되던 184년에 양주 수춘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손견이 3현(서주 광릉군 염독현, 서주 하비국 우이현, 서주 하비국 하비현)의 현승을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칭송이 있어서, 관리와 백성들이 친근히 귀부하였다. 고향의 옛 친구들로 어린 시절부터 사이가 좋았던 사람들이 왕래하는 자가 항상 수백 명이나 되었다. 손견이 그들을 접대하고 봉양하는 것이, 마치 자제(子弟)들에게 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손견전에 인용된 강표전)
강표전이야 워낙 오나라 중심으로 오나라를 찬양하는 관점에서 기록된 책인지라.(...) 손책이 10살 꼬꼬마 때부터 명망이 있었던 것처럼 적어놨지만, 겨우 10살짜리 꼬마가 아무리 똑똑해봤자 자력으로 명성을 얻었을 것 같진 않다. 그보다는 손견이 서주 남부의 승으로 지낸 시절 남긴 행적과 여남, 영천 같은 중원 한복판에서 주준과 함께 황건적을 쓸어버리며 얻은 명성이 그 장남에게 후광으로 둘렸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요는, 손책은 손견이 아직 서주에 있던 시절에도 이미 큰형님 같은 명성을 떨치는 것을 옆에서 보았으며, 또 손견이 황건적 토벌을 나간 후에도 멀리서 그 명성을 듣고 자랐을 거라는 점이다. 그것이 주유와 만난 시기부터 손책이 스스로 장강과 회수 사이 지역에서 사람들을 모으게 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외지에서 명성을 높이는 아버지처럼 장남인 자신도 집에서 세력을 굳혀야 한다는 어떤 책임감, 또는 뭔가 해내고 싶다는 포부 같은 것을 얻은 것은 아닐지.
여기서 다시 손책전으로 돌아가자. 손책과 동갑내기인 주유가 기껏 10살 나이 때 손책을 보러 수춘까지 찾아간 것 같진 않다. 주유가 여강으로 이주한 것은 만나이 15살 때의 일로, 그 전까진 낙양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황건난으로 온 동네가 죽자 사자 난리가 났는데 서현(아래)에서 수춘(위)까지 저 거리를 10살 꼬마가 가자고 조르면 보내줄 어른이 있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그나저나 저 두 성의 직선거리에서 딱 중간 쯤에 박힌 합비가 무쟈게 눈에 뛰네.(...)
그런 고로 주유의 가족이 동탁과 관련된 난을 피해 여강으로 이주한 이후, 즉 190년 이후 만나이로 15살이 되고 나서야 손책과 주유가 만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손책이 주유의 권유로 서현에 옮겨가 살았던 시절은 그리 길지 못했다.
3.
손견이 죽자(薨), 돌아와 곡아(曲阿)에 장사지냈다. (장례가) 끝나자 이내 장강을 건너 강도(江都)에 거처했다. (손책전)
초평 3년(192), 원술이 손견을 시켜 형주를 정벌하게 하니, 유표를 공격했다. ... 손견이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한수를 건너 마침내 양양을 포위했는데, 단마(單馬)로 현산을 가다, 황조군의 군사에게 활을 맞아 죽었다. (손견전)
손견이 초평 4년(193) 정월 7일 죽었다. (손견전에 인용된 영웅기)
신의 나이 17세 때(191년) 부친을 잃게 되자... (손책전에 인용된 오록)
본전에는 손견이 초평 3년(192)에 죽었다고 했다. 손책은 건안 5년(200)에 죽었다고 했는데, 손책이 죽을 때 나이는 26세로, 손책이 사망할 때를 계산해 보면, 손책은 응당 18세가 되는데, 여기 표에서는 17세라 했으니,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장번의 『한기』 및 『오력』에는 모두 손견이 초평 2년(191)에 죽었다는 했으니, 아마도 이것이 옳고 본전이 틀린 것 같다. (손책전 배송지 주)
-_-;;;;;;
손견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시기에 대해서도 말이 갈린다. 손견이 죽은 시기를 배주에 따라 191년으로 볼 경우, 190년 주유가 서현으로 이주한 이후 만난 두 사람이 한 동네에서 산 기간은 1년여 밖에 되지 않는다. 손책이 곡아에서 손견의 장례를 치른 후 강도로 이주하기 때문이다. 시기가 가장 늦는 영웅기를 따라 손견이 193년에 죽었다고 보더라도 3년이다.
내가 가진 후한시대 양주 지도(왼쪽)에서는 강도의 위치가 나오지 않아 같은 시대의 서주 지도(오른쪽)을 첨부했다. 파란 네모칸을 친 서주 광릉군 해릉현을 기준으로 보면 대강 위치가 잡힐 것이다.
양주 오군 곡아(왼쪽)와 서주 광릉군 강도(오른쪽)는 사이에 장강 하나가 있는 정도의 거리다. 이 무렵 서주목이었던 도겸은 손책이 강도로 건너오자 대단히 불편해했다(손책전). 아마도 손견이 서주 남부에서 현승을 지내는 동안 얻은 명성과 손책 자신이 성장함에 따라 얻은 명성이 합쳐지고, 더해서 190년대 초반에는 조조, 원소, 원술 등등 주변의 군벌이란 군벌은 모조리 노리던 땅이 서주였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손책은 다시 가족을 곡아로 이동시켰다. 이 다음의 행보가 약간 복잡해서 정리가 필요하다.
손책이 지름길로 가서 수춘에 당도하여 원술을 뵙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 이 손책은 선인들의 오랜 은의에 감복하며, 직접 기대어 의지코자 하니 ..." ... 원술이 손책에게 이르길 “내가 원래 그대 외숙을 단양태수로 삼았고, 백부인 백양(손견의 형인 손분의 자)은 도위로 삼았는데, 거기는 정병이 가득한 땅이니, 돌아가 그 땅에서 (병사를) 모아보게.” 라 했다. 손책이 마침내 단양으로 가서 외숙에게 의지해, 수백 명을 얻었는데,... 다시 원술을 가서 찾아뵈니, 원술이 손견의 잔여 병력 1천여 명을 손책에게 돌려주었다. (손책전에 인용된 강표전)
오경은 항상 손견을 따라 정벌하여 공이 있었기에 기도위를 받았다. 원술은 오경을 올려 단양태수를 겸하게 했다. 오경은 전 태수 주흔을 토벌하고 그 군을 근거했다. 손책이 손하·여범과 함께 오경을 의지하니 ... 때마침 오경은 유요에게 핍박을 받아 다시 북쪽으로 원술을 의지했다. (오부인전)
초평 원년(190년) ... 2월, 동탁은 (원소 등이) 군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천자를 옮겨 장안에 도읍했다. ... 태조가 ...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 질책하며 계책을 제시했다. 장막 등은 이 계책을 쓸 수 없었다. 태조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하후돈 등과 함께 양주로 가서 모병하니 (양주)자사 진온, 단양태수 주흔이 군사 4천 여 명을 주었다. (무제기)
유요가 양주자사가 되었는데, 양주의 옛 치소가 수춘이었다. 수춘은 원술이 점거하고 있기에, 유요는 이에 장강을 건너 곡아에서 다스렸다. 이 때 오경이 아직 단양에 (태수로) 있었고, 손책의 종형인 손분은 단양도위로 있었는데, 유요가 이르자 모두 그를 쫓아냈다. (손책전)
조정에서는 유요를 ... 양주자사로 임명한다는 조서가 내려왔다. ... 유요가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려고 하자 오경과 손분이 그를 영접하여 곡아에 있게 했다. 원술은 황제의 칭호를 참칭하려고 기도하면서 여러 군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유요는 번능과 장영을 파견해 장강가에서 주둔하며 원술에게 대항하도록 하고 오경과 손분은 원술로부터 관직을 받았기 때문에 강제 쫓아냈다. 그리고 원술은 곧 자신을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오경 손분과 힘을 합쳐 장영과 번능등을 공격했지만, 1년이 지나도 승리하지 못했다. ... 손책은 장강을 동쪽으로 건너 장영과 번능등을 격파시켰다(손책의 강동평정). 유요는 단도로 달아났다가... (유요전)
동탁이 한창 득세하던 190년 무렵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단양태수는 주흔이었다. 그렇지만 이후 원술이 자기 맘대로 오경을 단양태수로 올리자 오경은 주흔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취임했다. (이후 주흔, 주앙, 주우 3형제가 모두 원소(+조조)의 편에서 원술과 싸우게 되는 것이 공손찬전에 보인다) 오경은 194년에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양주자사 유요가 내려오자(효헌제기), 원술이 자의적으로 임명했다는 한계 때문에 쫓겨났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양주 예장에서는 역시 원술이 멋대로 임명한 예장태수 제갈현이 정식 예장태수 주호에게 밀려 조카들을 데리고 형주로 망명한다. 캬 역시 꿀공 자기 열전 있는 사람 중 몇 명의 운명에 영향을 준 거냐ㄷㄷㄷ) 효헌제기에 따르면 손책이 유요를 곡아에서 쫓아낸 것이 194년의 일이니, 손견의 부곡을 돌려받기 위해 원술에게 귀부하자마자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그때 손책은 만나이로 19살이었다.ㄷㄷㄷㄷ
손책이 오경을 찾아간 것은 194년 전의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에 앞서 손책은 손견의 장례를 치르고 잠깐 강도에 건너갔을 때 장굉을 만난 적이 있다.
“나(손책)는 비록 어리석고 나이도 어리지만 작은 뜻이나마 있기에, 원양주(袁楊州=원술)를 따라가 선군의 남은 병사를 얻고, 단양의 외삼촌에게 가서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해, 동쪽으로 오회(吳會)에 웅거하며 선친의 치욕을 갚고, 조정의 바깥 울타리가 되고자 합니다. 그대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 장굉은 감복해서 “... 그 공업은 제환공이나 진문공과 같을 것인데, 어찌 다만 외번(外藩)에 그치겠습니까?...” ... 손책이 말하길 "...바로 가야하니, 노모와 어린 동생을 그대에게 맡기며, 이 손책에게는 다시는 되돌아 볼 걱정이 없습니다.” ... (손책전에 인용된 오력)
오력을 고려한다면 손책은 강도에서 장굉을 만나고 바로 원술을 찾아간 것이 된다. 그렇지만 배주에서 손책의 표에 적힌 손책의 나이를 근거로 191년이라 제시한 설도 무시하기가 어렵다. 손견이 죽은 시기와 손책이 원소에게 귀부한 시기 사이의 공백이 이렇게 복잡하다. 그런데 시기가 꼬이는 게 이 부분만이 아니다.;;;;;
4.
이 해(194), 양주자사 유요가 곡아에서 원술의 장수 손책과 싸웠는데 유요군이 대패하고 손책이 마침내 강동을 점거했다. (효헌제기)
오경이 아직 단양에 (태수로) 있었고, 손책의 종형인 손분은 단양도위로 있었는데, 유요가 이르자 모두 그를 쫓아냈다. ... 손책이 이에 원술을 설득하여, 조경 등을 도와 강동을 평정하도록 요청했다. ... 역양에 도착할 즈음에는 5~6천명을 얻었다. ... 장강을 건너 전전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격파되어 감히 그 예봉을 당해내는 자가 없으며, 군령은 엄숙하니, 백성들은 그를 따랐다. ...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군의 태수들도 모두 성곽을 부수고 달아났다. (손책전)
주유의 당부 주상이 단양태수로 있었는데, 주유는 그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마침 손책이 역양까지 있었으므로 급히 편지를 써서 주유에게 알렸다.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손책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를 얻었으니, 순조로울 것이오." 주유는 그래서 손책을 따라 ... 곡아로 진입하자 유요는 달아났으며... (주유전)
손책이 장강을 건너 유요의 우저(역자 주 : 『후한서 당고열전』에 주석에 의하면 “우저는 산 이름이다. 장강 중에 돌출되어 있는데, 우저기라 부르며, 선주 당도현 북쪽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한서 군국지』에는 양주의 단양군 내 말릉 현 남쪽에 있다고 합니다)에 있는 진영을 공격하여, 창고의 양곡과 군수품을 모두 얻으니, 이해가 흥평 2년(195)년이다. (손책전에 인용된 강표전)
효헌제기와 강표전이 맞지 않고 삼국지에는 이 시기에 대한 별다른 연도 언급이 없으니 혼란스럽다. 그래서 유요가 곡아에서 나간 건 언제고 완전히 강동에서 쫓겨난 건 또 언제냐?;;;;;;; 아무튼 강표전 대로라면 유요가 곡아에서 쫓겨난 것은 195년의 일이 된다.
한편 주유가 쫓겨난 오경의 뒤를 이어 단양태수가 된 집안 어른을 찾아갔던 그 시기에 손책이 근처의 역양까지 군사를 끌고 내려와있었다.
역양 바로 동쪽을 흐르는 굵은 물줄기가 장강이고 이 강의 동부가 강동이다. 손책이 강을 건넜다는 말은 역양에서 나와 저 장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역시 손책과 주유가 재회하는 것은 195년일 가능성이 높지 싶다. 효헌제기에 194년 운운하는 기록이 적힌 것은 12월자 기록 바로 뒷부분으로, 그 자리에 들어가는 기록은 그 해에 일어나긴 했는데 정확히 어느 달에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데다 사건이 당해년도로 끝나지 않아 다음 연도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에 진수를 욕한 190년대 후반 유비의 행보 포스팅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다. 크앙!) 여기서는 강표전을 신뢰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진다. -_-;;;;;;;
아무튼, 주유의 친척 어른이자 신임 단양태수인 주상은 손책의 입장에선 주유와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일단 박살내야 할 적이었을 것이다. 위치상 단양은 강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니 여길 제압하지 못하면 강동을 조속히 평정하기 어려워질 테고, 그럼 원술로부터 벗어나 제환공, 진문공 같은 춘추전국시대 패자들처럼 되고 싶어 하던 손책의 바람도 요원해지는 것이니까. 주유가 이 점을 재빠르게 판단하고 친척 어른을 찾아간 것인지, 우연히 그냥 인사를 간 그 시기에 마침 손책이 군사를 끌고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주유의 능력을 생각하면 전자일 거라 믿고 싶긴 하다. 역양에서 오경, 손분 등과 함께 군사를 규합하던 손책은 주유가 단양에 있다는 걸 알자 서둘러 편지를 보냈고, 주유가 군사를 끌고 귀순하자 "너를 얻었으니, 순조로울 것이다"라며 매우 기뻐했다.
5.
만일 주유가 단양에 없었다면 손책은 무력으로 단양을 박살내 주유와 원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주유가 단양에 있었더라도 손책의 편지에 화답하지 않고 정식으로 조정에서 임명한 양주자사인 유요의 편을 들었다면 역시 손책과 주유는 싸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집안이 대대로 태위까지 지낼 정도로 한나라 조정의 중심에 있었던 세력가임에도 불구하고 주유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상상의 여지가 있다. 동탁이 낙양에서 전횡을 일삼던 시절을 직접 경험하며 느낀 바가 있을 수도 있고, 16살 때 손책과 처음 만나 단금지교를 맺으면서 이미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나라에서 한실에 대한 순수한 충심을 놓고 말하자면 최후의 충신이라 해도 좋을 손견이 그간 더 높은 벼슬을 청해주는 식으로 뒤를 봐준 것에 대한 의리 때문인지 뭔지 원술을 위해 싸우다 어이없이 죽고 나서 손책이 느끼고 경험했을 것들도 상상의 여지가 무궁하다. 그리고 그런 결정들을 내릴 때 이 사람들은 겨우 약관 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다.
190년대는 그 시절을 실제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길 바랄 끔찍한 시절이었겠지만, 그 시절을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접근하면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정말 매력적인 부분이다. 비록 연도, 시기, 사건의 선후 같은 게 엉망진창인 데다 기록도 부실해서 뭐 하나 짜맞춰 보려면 무지하게 짜증나지만 말이다. 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