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를 받았으면 밑작업을 해야지영.(...)
트위터에 브레인스토밍 겸해서 끄적인 메모, 그리고 마속과 관련된 기록 수집용 포스팅입니다. 의견교환 환영합니다.
이건 이거고 팬픽질은 팬픽질이라, 팬픽질에선 다른 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정사 기록
파성넷 폭파 이후 늘 그랬듯, 정사삼국지방(http://rexhistoria.net)에 신세를 졌습니다.
<마속전>
건흥 6년, 제갈량이 군대를 출정시켜 기산으로 향했는데 당시 숙장인 위연, 오일 등이 있어 논자들은 마땅히 그들을 선봉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나, 제갈량은 뭇 의견을 거스르고 마속을 발탁하여 대군을 통솔하여 선두에 서게 하였다.위의 장수 장합과 가정에서 싸웠으나, 장합에게 격파되고 병사들은 흩어졌다. 제갈량은 진군하려 해도 거점이 될 곳이 없어 군대를 퇴각시켜 한중으로 돌아왔다. 마속은 하옥되어 죽었다(物故). 제갈량이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마량이 죽을 때 나이는 36세였고, 마속은 39세였다.
<왕평전>
건흥 6년, 참군 마속에게 소속되어 선봉이 되었다.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왕평은 계속 마속에게 규간하였으나 마속이 이를 쓰지 못하여 가정에서 크게 패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위나라 장수 장합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왕평은 천천히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되돌아왔다. 승상 제갈량은 마속 및 장군 장휴, 이성을 주벌(誅罰)하였고 장군 황습 등의 병사를 박탈하였으나 왕평에게는 특별히 공적을 높이 드러내[崇顯] 주었으니[見], 참군에 제배하여 오부(五部)를 통솔케 하였고 겸하여 왕평에게 소속된 군영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토구장군의 작위로 승진시키고 정후에 봉하였다.
<제갈량전>
위 명제는 서쪽으로 장안을 진수하고 장합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선두에서 제군을 이끌게 해 가정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제갈량은 서현(西縣)의 천여 가(家)를 뽑아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다. 상소를 올렸다,“신이 미약한 재주로 외람되게 과분한 자리를 차지해, 직접 모월(旄鉞)을 잡고 삼군을 독려했으나, 능히 규율을 가르치고 법을 밝히지 못해 일에 임해 두려워하여, 가정에서는 명을 어기는(違命) 허물을 범하고, 기곡에서는 경계하지 못한(不戒)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함부로 임무를 준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이 명철하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휼사(恤事-일을 고려함)에 크게 어두웠으니, 춘추에서 통수자를 질책한다(責帥)라 함이 바로 신의 직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스스로 3등(等)을 깎아 그 허물을 꾸짖게 해 주십시오.”
...건흥 7년(229) ... 제갈량에게 조책을 내렸다. "가정 싸움의 허물은 마속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그대는 자신의 허물로 돌려 심히 스스로 폄억하니, 그대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그 청을 들어주었다.."
<상랑전>
...후에 왕련을 대신하여 승상장사를 겸임하였다. 승상 제갈량이 남쪽 땅을 정벌하였을 때 상랑은 남아서 후방의 일을 처리했다. 건흥5년(227)에 제갈량을 수행하여 한중에 도착했다. 상랑은 평소 마속과 사이가 좋았다. 마속이 도망칠 때 상랑은 그 상황을 알았지만, 검거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이점을 한스러워 했으므로, 관직을 박탈하여 성도로 돌아가도록 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좌장군으로 옮겼는데...
<상랑전 주석으로 달린 집해>
사사발복(四史發伏)에서 홍량길(洪亮吉)이 말하길, "이를 살펴본즉 마속은 군사가 패하자 도망하였고 후에 다시 잡아들이니 하옥되어 죽은 것이다. 마속은 말이 그 실제보다 지나쳐 본래 취할 바가 없었다. 또한 제갈량의 절도(節度)를 어겨 군사를 잃는데 이르렀으나 복죄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멀리 도망갔으니, 죄가 있으면 형벌을 피하지 아니하는 가르침을 어겼으매 제갈량이 그를 주륙한 것은 심히 마땅하거니와 습착치 등이 제갈량이 잘못 형벌을 내렸다라고 기록한 것은 지나치다." 라고 하였다.
<계한보신찬>
이영남(李永南)의 이름이 이소(李邵)이고 광한군 처현(郪) 사람이다.
<계한보신찬에 주석으로 달린 화양국지>
이소의 형은 이막(李邈)으로,자는 한남(漢南)이며,유장 때 우비장(牛鞞長)이 되었고, 유비가 익주목이 되자 그를 받들어 섬겼다. 정월 초하루에 유비가 이막에게 행주(行酒)를 명하자 그가 유비를 찾아가 말했다. ... 관리 하나가 그를 죽이려 했으나 제갈량이 간청하여 화를 면했다. 나중에 건위태수, 승상참군, 안한장군이 되었다. 건흥 6년 제갈량이 서쪽으로 정벌에 나서는데 마속이 그에 앞서 싸움에서 대패하자 제갈량이 그를 죽이려 했다. 이막이 이를 말리며 말했다. "진(秦)나라는 맹명(孟明)을 용서함으로써 서융(西戎)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초나라는 장군 자옥(子玉)을 주살함으로써 두 번 다시 천하를 다투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제갈량의 신임을 잃고 촉으로 돌아갔다. ... 건흥 12년에 제갈량이 죽자 후주는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소복을 입고 사흘간 애도를 표했다. 이막이 소를 올려 말했다. " ... ... 이제 제갈량이 죽어 일족은 온전함을 얻었고 서융은 모두 평정되었으니 모두가 경축해야 할 일입니다." 후주가 노하여 그를 하옥시키고 주살했다.
<곽회전>
태화 2년 (228) 촉나라 재상 제갈양이 기산에서 나와 장군 마속을 가정까지 파견하고, 고상은 열유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장합이 마속을 공격하였고, 곽회가 고상의 진영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켰다.
<장합전>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 장합에 특진(特進)의 지위를 더하고 제군을 이끌게 해 파견했고, 제갈량의 장수인 마속과 가정에서 맞붙었다.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은 그 급도(汲道-용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安定)이 모반해 제갈량에 호응했었는데, 장합이 이를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조진전>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자 남안, 천수, 안정의 3개 군이 모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다. 명제는 조진으로 하여금 제군을 지휘해 미(郿) 에 주둔케 하고, 장합을 보내 제갈량의 장수 마속을 공격케 하여 대파했다. 안정의 백성 양조(楊條) 등이 관원과 백성을 탈취하여 월지성(月支城)을 지키자 조진이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양조 등이 자신의 무리들에게, “대장군이 친히 왔으니 나는 일찍 항복하고자 한다”고 말하고는 스스로 몸을 결박하고 성을 나왔다. 3개 군이 모두 평정되었다. 조진은 제갈량이 기산에서 고전했으므로 이후에는 필시 진창(陳倉) 쪽으로 출병할 것이라 생각하고 장군 학소, 왕생을 보내 진창을 수비하며 다스리게 했다. 다음 해 봄, 과연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으나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이길 수 없었다.
<명제기>
태화 원년(227) ... 12월 ... 신성태수 맹달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표기장군 사마선왕에게 조칙을 내려 토벌하도록 했다.
2년(228) 봄 정월, 사마선왕은 신성을 공격하여 토벌하고, 맹달을 참수하여 그의 머리를 보내왔다. ... 촉나라의 대장 제갈량이 국경을 침입하자 천수, 남안, 안정 삼군의 관리와 민중이 위나라에 모반하고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명제는 대장군 조진을 파견하여 관우(關右)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일제히 군대를 진격하도록 했으며, 우장군 장합을 파견하여 가정에서 제갈량을 크게 격파시켰다. 제갈량이 패배하여 도주하자, 삼군이 평정을 되찾았다. 2월 18일, 명제는 순시하여 장안에 이르렀다.
<명제기에 주석으로 달린 위략, 촉에 대한 조예의 포고문>
...그러나 제갈량은 이웅의 어리석은 용맹을 본받을 뿐, 형감의 덕을 헤아린 깨우침을 생각지 않아, 관리와 백성들을 구략(驅略)하고 기산을 도둑질했도다. (그러나) 왕사(王師)가 바야흐로 떨쳐지자 마속, 고상은 (왕사의) 깃발을 보자마자 패주해 달아났다. ...
트위터 메모
올ㅋㅋ 위략에 실린 조예의 포고문이 나에게 일용할 떡밥을ㅋ "왕사(王師)가 바야흐로 떨쳐지자 마속, 고상은 깃발을 보자마자 패주해 달아났다" 마속, 고상이 밟힌 건 곽회전에서도 보인다. 근데 조운의 패배는 저 포고문은 물론 상대인 조진의 본전에조차
실리지 않았네? 음평, 무도를 먹은 공으로 제갈량을 승상 복직시키면서 후주가 내린 말에서도 그쪽의 패배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었지. 위략의 저 기록을 보건대 역시 조운전 본전에 적힌 그대로, 조진은 낚였고 그나마 크게 이기지도 못한 거라 해석함이 옳다ㅋ
조운전 본전에서는 기곡 패배와 관련해 어째선지 진수가 조운을 적극 변호하는 모습을 보이던데, 제갈량이 기곡에선 우리 수가 더 많았는데 졌고 어쩌고 같은 말을 했다 해서 조운전과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는지?
그나저나 월지(月支)가 어디 쯤인가. 조진전에 적힌 순서를 보면 조진은 장합의 승리 후 월지로 진군한 게 되는데. 기곡에 충분히 오래 낚여 있지 못했던 건 확실해 보이는데, 그거야 제갈량이 기산을 기습한 게 알려지면 당연히 낚시도 끝나는 거니(...)
그럼 조운전에서 "조운, 등지의 군사들은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에서 失利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적은 건, 조진이 낚인 걸 깨달은 후 어떤 방침을 취했느냐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닐까.
저기서 조진이 취할 수 있는 방침은 1) 기산 쪽에 가서 장합과 합류해 3군 평정 2) 3군은 장합에게 맡기고 한중 고고싱 아닐까 싶은데. 1)이라면 조진은 조운이 미에 올라오지 못하게 쫓아내는 정도면 족하고, 2)라면 적어도 조운이 가정 패배 때까진
잘 버텨 한중을 지켜낸 게 된다. 그렇지만 조운 역시 강등된 걸 보면 2)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지. 조진이 가정 건과 기산 쪽 주민들의 혼란상을 알았다 해도 장합 혼자 3군을 평정하게 둔 채 한중 쳐들어가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럼 역시 1)인가?
마속전에선 가정 패배 때문에 "제갈량은 진군하려 해도 거점이 될 곳이 없어 군대를 퇴각시켜 한중으로 돌아왔다"라 했고, 기산과 기곡은 방향이 정반대니, 한중이 침공당할 지경이 아니라면 조운 쪽의 영향 때문에 철군했다고 보긴 어렵겠지.
3군 백성들은 촉에 넘어가려 하고 관리급들은 위에 남으려 해서 어수선한 가운데, 가정, 열류의 패배로 분위기가 확 반전되어 더는 나가는 게 무리니까 돌아갔다고 봐야지. 조운이 강등당한 건 충분히 오래 버티지 못해서라고 보기 어렵다. 역시 공동책임설?
음 조예가 무지 빠르게 대응해서 장합, 조진이 즉시 파견된 걸 고려하더라도 걸리는 게 있는데. 특히 장합은 형주에서부터 달려간 듯하니. 제갈량이 3군을 안정적으로 진수할 경우, 그때부터 조운군의 역할은 뭘까? 기산 습격을 숨기는 낚시질 다음 말이다.
그나저나 운별전을 신뢰할 경우, 제갈량이 비단 나눠주려던 걸 조운이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문맥상 조운의 군에 남은 물자를 조운군 장졸들한테 주려 했지만 조운은 아무튼 우리(=기곡 낚시부대)는 졌으니까 상ㄴㄴ 했다는 건데.
이건 맡은 바 낚시의 소임을 다했기에 그 상을 주려 한 걸 반대한 게 되는데. 1차 북벌 자체가 실패한 분위기를 염두에 둔 건가, 낚시질 이외의 다른 임무가 있었는데 그걸 못했다는 건가, 그냥 이 양반이 존내 fm이라선가? 근데 왕평은 승진했쟝.
왕평은 가정 쪽이니 별론이긴 하지만서도. 그러고 보니 같이 기곡 간 등지는 상벌 이야기가 전혀 없었지? 역시 공동책임설?(.......) 아오 내가 조운빠 제갈빠에 골수까지 趙孔분자인데 스스로 사상검증을 하려니 힘들다.
왕평이 승진한 건은 뭐 1차 북벌 실패가 촉에 가져온 상징적 후유증이 엄청났을 테니 공을 치하할 겸 영웅 만들어준 거라 생각할 수 있고. 왕평전에선 "마속 및 장군 장휴, 이성을 誅罰하였고 장군 황습 등의 병사를 박탈하였으나"라 했는데, 이 사람들이
누구 휘하, 어디 방면이었는지 좀 찾아봐야겠다. 분명한 건 조운의 경우엔 그냥 관직이 까였을 뿐 주벌, 병사 박탈 같은 건 당하지 않았다는 거다. 게다가 저기서 승진한 왕평과 비교되는 처벌 리스트에 적히지도 않았다. 앗 잠깐만 이게 중요한 것 같은데?
달리 말해 조운이 강등된 건 마속, 장휴, 이성, 황습 등이 받은 처벌과 급과 내용 양면에서 다르다는 이야기 아닌가? 역시 공동책임설?(.......)
그럼 이제 셀프 사상검증에서 가장 큰 장벽은 제갈량전 본전이 되는데. "가정에서는 명을 어기는(違命) 허물을 범하고, 기곡에서는 경계하지 못한(不戒)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함부로 임무를 준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속이 違命한 건 제갈량전 뿐 아니라 마속전에도 적힌 내용인데, 조운이 不戒했다는 이야기는 조운전에조차 없는지라. 어쩌라고 싶어지네. 아오 진짜 조운은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죽어서 -_-;;;;;;
아까도 적었지만, 후주가 승상 복귀시켜 줄 때 "가정 싸움의 허물은 마속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그대는 자신의 허물로 돌려 심히 스스로 폄억하니, 그대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그 청을 들어주었다"라고 했지 기곡 얘기는 안 한 것 역시 해석의 여지가 있고.
후주가 조운한테도 시호를 줬고 그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영광스러워 할지언정 나쁜 말은 안 한 걸 보면 기곡 건이 마소쿠의 경우처럼 조운의 커리어 전체를 엎을 정도로 심각한 오점으료 여겨졌을 리는 없고. 다만 그 기곡 건으로부터 동시대에 간접적으료 영향
을 받은 강유가 무장한테는 순한(...) 시호를 지어 바친지라, 이것도 하려고 들면 해석의 여지가 있지. 아무리 진수가 조아와 같은 맹장 소릴 하고 계한보신찬에서도 후덕한데 맹장 같은 말을 적어놨다지만 강유한텐 그런 인상이 아니었던 모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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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새벽 타임라인에 테러를 가하던 중 언급했던 왕평전의 그 기록 말인데. 마속, 장휴, 이성, 황습은 1차 북벌 실패에 직접 책임이 인정되어 처벌된 사례로 거론된 거지 싶다. 이성, 황습은 다른 열전에서 보이지 않고, 張休는 동시대에 동명이인이 셋은
있었던 것 같다. 위촉오 골고루 하나씩 나온다.(...) 여튼 촉의 장휴는 계한보신찬에 진수가 단 주석에서 다시 이름이 보인다. 장완이 대장군 하던 시절 장휴에게 한가군 출신 중 왕모라는 인물에 비견될 만한 인재가 없나 물은 일이 있다.
장휴의 대답은 "“왕원태에 이르러서는 주(州) 안에서 이을 만한 자가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군에서야" 였다. 장완 대장군 시절이면 제갈량이 죽은 때로, 이 장휴가 그 장휴라면 여전히 군에 남아 있었으며 장완이 군부 쪽 인사와 관련해 한 마디 물어볼
정도는 되는 위치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1차 북벌 때 뭘 잘못해 주벌된 건지는 여전히 불명이지만, 사형은 아니었다는 게 된다. 사실 사형에 처해진 건 마속 하나 같은데.
제갈량 본인이 언급한 不戒가 존내 거슬리긴 하지만, 기타 기록들을 보면 공동책임설이 맞는 것 같은데.(...)
마속은 왕평전에서 북벌 실패에 책임을 진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고 있는데, 정작 같은 시기 열류성에서 곽회한테 깨진 고상은 다른 기록을 못 찾겠네. 조예가 마속, 고상을 직접 언급한 걸 보면 중요한 역할이었을 텐데. 그보다 열류성은 대체 어디인가.
오! 이엄탄핵표문에 고상의 이름이 올라가있네? 당시 지위가 독전부 우장군이었으면 230년 인사이동 때 같이 승진했다는 거잖아. 한진춘추에선 231년 제갈량이 위연, 고상, 오반을 보내 사마의를 깨부순 기록이 있고. 호오............
그럼 고상이 곽회한테 깨진 건 마속 정도의 실패는 아니었다는 건가? 조예의 포고문에 위나라가 박살낸 상대로 마속, 고상은 언급하면서 조운이 빠진 건 조진이 그쪽 낚시에 제대로 걸렸으며 자기들 생각에도 제대로 깬 건 아니었다는 식으로 해석해도 되겠지?
열류성 패배가 가정 패배와 더불어 3군 상실에 영향을 끼친 걸 생각하면 고상의 실패도 가볍진 않은데 처벌 이야기가 없었고, 이엄을 깔 무렵 고상은 오히려 우장군이 되어 있었단 말이지. 또다시 공동책임설이 강화되고 있는데.(.......)
트위터 메모 추가(14.12.23.)
저 두터운 진령산맥을 뚫고 돌아다니는 일이 겨우 한 달 가량 안에 일어난 사건사고란 걸 생각하면 조진은 일단 낚였다가 낚인 사실을 비교적 빨리 알아차리고 즉시 움직인 게 되는데. 아무튼 마소쿠 나쁜놈...
조예의 포고문에서 마속, 고상이 깃발을 보자마자 달아났네 어쩌네 한 것도 좁은 의미에서의 1차 북벌 때 전투다운 전투는 가정, 열류 정도에서만 벌어졌고 나머지는 대체로 낚시질과 주민들 민심 이반이 중심이었다는 것이겠지.
잠깐만 이거 왠지 제갈량이 남정 떠나기 직전 마속한테 들은 말을 연상시키는데? 설마 1차 북벌의 핵심 입안자도 마소쿠인 건 아니겠지 하하하(...)
명제기대로라면 맹달이 반란 일으켰다가 바로 진압되는 게 207년 12월~1월의 일이고, 제갈량이 기산에 출병하는 게 1월, 조예가 한번 뒤집혔던 삼군을 직접 방문하는 게 2월이라. 맹달이 좀 더 버텼거나 사마의가 반응이 늦었다면 재미있게 돌아갔겠지.
맹달, 조운으로 최소한 두 번은 낚시질을 하고 기산을 기습한 건데. 주민들 민심 이반을 보면 확실히 207년 한 해 동안 저쪽으로도 밑작업을 한 게 아닌가 싶은데. 그걸 다 엎어버리다니 마소쿠 나쁜 놈
한편으론 1차 북벌이 저렇듯 낚시질과 뒷작업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경우 성격상 피끓는 전투를 갈망했을 위연이 어지간히 왱알왱알을 할 법도 하지 싶고.
아니, 일단 월지가 어디인지부터 찾아야 한다니까. 그러면 조진이 기곡에 얼마나 낚여 있었는지 추산이 가능할 것이다.
조진전을 보면 일단 안정 쪽인 듯한데. 조운의 낚시질 → 조진이 미에 주둔 → 장합이 등산가 격파 → 조진이 안정으로 이동 이런 순서가 되는 것 같은데, 안정의 위치상 경로가 완전 평지인 걸 생각하면 이동속도가 엄청 빨라도 놀랄 일은 아니겠네.
"...마속을 공격케 하여 대파했다. 안정의 백성 양조 등이 관원과 백성을 탈취하여 월지성을 지키자 조진이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그럼 그때까진 미에 계속 있었다는 이야기지ㅋㅋㅋㅋㅋㅋ 뭐야 조진은 그냥 그때까지 미를 지키고 있었던 건가?
그럼 조운의 낚시는 대성공이었다는 이야기 아닌가ㅋㅋㅋㅋㅋㅋㅋㅋ 등산가 이 나쁜 놈아
정리 : 기산 쪽 본대 입장에서 배드 시나리오는 낚시 실패로 장합과 조진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인데, 조진전의 기록 대로라면 적어도 가정 패배로 촉 본대가 물러날 때까지 조진은 미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속이 잘못했네.
"조운, 등지의 군사들은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에서 失利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조운전)" 이건 초전은 졌지만 계속 들어올 것처럼 버티고 있자 조진이 어디 못 가고 붙잡혔다는 걸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