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점에서 여제만 37화는 유료 연재분이니 공개분을 보는 분들께 자칫 미리니름이 되리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여제만이 어떤 만화냐고 묻는다면 여제만 37화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다 끝날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에피소드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과 작가의 생각과 그것에 대한 표현방법을 포괄적으로 관통하는 힘이 있다.
37화의 소재는 유엽이 아버지의 첩을 살해한 사건이다. 삼국지 유엽전에서는 유엽이 7세일 때 어머니가 유엽과 유엽의 두 살 위 형에게 남편의 첩을 죽여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한 것, 유엽이 13세가 되었을 때 그 일을 실제로 행했다는 것, 유엽의 아버지 유보가 노해서 사람을 보내 추격하자 유엽은 어머니의 유언을 실행한 것이니 "감히 함부로 주살하는 징벌을 받을 수 없다"고 항변한 것,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진수는 서술자인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런 사건이 있었다 라고 간결하게 적는 선에서 끝냈지만, 이 일화에는 진수가 적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넘쳐 흐른다. 남자가 첩을 들이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풍경, 남자에게 사랑받는 첩이 횡포를 부릴 수 있는 풍경, 본처가 아직 10세도 되지 않은 어린 자식들에게 그 첩을 살해해달라고 유언할 정도로 걱정과 증오를 품는 풍경,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벌할 때 "주살"까지 할 수 있었던 풍경, 살인이 일어났지만 죽은 사람의 신분이 "시비"에 불과하기 때문인지 관이 개입하지 않아 살인자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처벌을 받지 않은 풍경 등등. 37화에서는 이렇듯 문자로 적히진 않았지만 행간에서 서성거리는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유엽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첩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재구성한다.
1) 본처와 첩, 그리고 남편
작중에서 유엽의 아버지와 처첩 사이의 관계를 대비시켜 드러내는 장치가 경제권이다. 2세기의 중국에서는 여자의 경제활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도, 보호받지도 못했다. 여자가 생계를 꾸리려면 결혼해서 처첩 중 하나가 되거나, 수입은 적고 노고는 큰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엽의 아버지는 본처가 생활비 및 자식 교육비처럼 가족의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지출을 위해 돈을 요청할 때는 싫은 소리를 하면서 첩이 사치품에 쓸 돈을 요청할 때는 곧 들어주는 모습을 보인다. 가족의 생활을 위한 지출에 들어가는 돈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사치품에 지출한 돈은 쉽게 주목을 끈다. 본처의 생활비 지출보다는 첩의 사치품 지출에서 자신의 재력과 위신을 "과시"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출에 더 만족한 것이다. 작중에서 유엽의 아버지가 보인 태도의 차이는 그런 것이다.
이런 시대에 여자가 생계를 꾸리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엇이 좋을까? 남편에 종속된 가족구성원 안에서 지위만 그럭저럭 인정될 뿐 합당한 권리를 요구해도 싫은 소리를 듣는 본처가 좋을까, 살해당해도 살인자가 처벌되지 않을 정도로 비천한 지위지만 남자의 과시욕이 유지되는 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첩이 좋을까, 그냥 허드렛일을 하며 자기 손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이 좋을까? 한 가지 함정은 저 시대의 여자가 결혼하지 않거나 자식, 특히 아들이 없는 경우 비참한 취급을 당했으니 적은 소득이나마 독신으로 살아가는 선택지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경우는 여자에게 충분한 생활비를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 경우가 전제되며, 좋은 사람끼리 만나 둘 다 열심히 살면 다행이지만 남편이 불성실해서 사실상 아내의 수입이 가족 전체의 수입인데 취급은 부잣집 첩만 못할 경우도 높은 확률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같은 소설을 보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19세기말까지도 결혼 초기에는 다정하고 성실했던 남자가 평생 그렇진 않은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여자의 인생은 그런 불확실한 남자운에 결정적으로 좌우되는 꼴이 흔했던 모양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여자 개인에게는 어떤 삶이 행복할까? 첩이 계속해서 사치품 지출을 요구하고 안락하게 사는 모양새는 분명 가부장제에 기생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저 시대의 여자가 첩의 삶을 택한다 해서 그 "개인"에게 도덕적 비난을 집중시키는 것은 도덕적인가?
2) 침묵과 기억의 공백
위와 같은 묘사에서 유엽의 어머니가 보이는 반응도 주목할 만하다. 전업주부인 어머니가 생활비와 자식 교육비 문제로 아버지에게 돈을 요청했다가 핀잔만 듣는 장면이 그리 낯설지 않았던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20세기말, 21세기초인 지금 우리 어머니들이 똑같이 경험하고, 경험하는 중이며, 우리 세대가 자라면서 목격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권에 대한 의식 면에서 지금과 비교도 될 수 없는 2세기 중국에 그 장면을 붙여도 위화감이 없다는 것은 신랄한 맛을 자아낸다. 이 "흔한" 광경에서 어머니가 가슴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말문이 막혀버리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도, 2세기 중국에 대입하는 데 그다지 위화감이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던데, 지나치게 일반화를 단행하는 그 말을 좀 더 완화해서 표현하면 역사는 "지배계급 남성 중심의 기록"이라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기록이 남지 않았을 뿐 인간이 지구상에 살면서 남겨온 역사에는 가슴 속에 말을 꾹꾹 눌러담은 채 침묵하다 잊혀진 여성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침묵하다 잊혀진 소수자 소속의 남성들의 삶도 있었다. (여기서 소수자라는 것은 숫자상으로 소수라는 의미가 아니다. 피지배민족, 인종차별, 배우지 못한 평민, 노예, 성년이 되지 못한 아들, 환관, 동성애자 등등등등 제도가 인정하는 적법한 권력 분배에서 소수인 사람들을 뜻한다. 물론 참정권과 소유권 기타 경제권이 독자적으로 인정되기 전의 여자들은 왕족 정도 되지 않는 한 전부 여기에 들어간다) 이들의 삶과 생각과 감정은 문자로 적히지 않았다 해서 없었던 일이 되거나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자신의 불평불만을 적극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해서 기쁘게 지배자 중심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아무 괴리감 없이 기쁘게 순종하기만 한 것도 아닐 것이다. 이들도 사람이라면, 자신이 겪는 것을 생각하고, 그건 잘못됐다 말하고 싶고, 그렇게 설치고 싶었을 것이다. 배우지 못했기에 어찌 항변해야 할지 몰랐거나, 배웠더라도 함부로 드러냈다간 사회적으로든 생물적으로든 살해당하니 가만히 있었던 것이지. (실존인물 유엽도 아버지의 첩을 죽이는 식으로 어머니의 바람을 실행했다가는 아버지가 "벌"로 자신에게 죽음을 명할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13살이었는데.) 남편과 사별하면 따라 죽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괴상한 인식이 퍼지던 조선 후기에 과부가 된 젊은 여자들이 그 규범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기쁘게 자진했다면 열녀문 경쟁을 하느라 가문과 마을에서 죽음을 강요하더라며 비판하는 기록이 남았겠는가. 그거 참, 정작 유가의 시조 되시는 공씨 어르신께서는 사람 대신 인형을 쓰더라도 "순장"이라는 풍습 자체가 악랄하다는 생각으로 지독한 욕을 퍼붓더라만.
적극적, 공식적으로 기록을 남기진 못해도, 주정을 부리고 싸움질을 하고 자녀들 앞에서 한숨을 쉬는 식으로 표현은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자로 된 기록이 불완전하듯이, 조부모에서 부모에게로,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갖가지 "표현"을 통해 전달되는 기억도 불완전하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납치당해 아메리카 노예로 팔려간 조부모 세대와 조부모 세대가 미국에서 낳은 부모 세대가 자신들이 겪은 일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쿤타 킨테의 경우에는 다행히 증손뻘 되는 후손에게도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전달되어 실제 후손이 자기 뿌리가 되는 부족을 찾아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성공적으로 전달된 이야기보다는 전달되지 못하고 흩어진 이야기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운 좋게 전달된 이야기도 그 일을 겪은 사람 자신과 이야기를 전달해준 사람들의 기억이 불완전하기에 왜곡되거나 빠뜨린 부분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젊은 시절 겪은 일을 모르며, 심지어 우리 자신이 학창시절 누군가와 싸운 사건조차도 왜 싸웠는지는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아는 것은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백들을 상상하면서 재구성된 것이다. 작중의 유엽이 자신의 기억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중 유엽의 어머니가 느끼고 표현한 이야기들은 실존인물 유엽의 삶에서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을까? 진수가 기록한 유엽전은 유엽이 그 사건과 관련해 실제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온전히 담아 전달하고 있을까?
3) 원전이 있는 픽션의 방법론
이번 편과 관련해 지인의 블로그에서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과거에 대한 "공백"과 "포착"과 "재현"에 대한 묘사에서 화봉요원과 여제만에 닮은 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면 이런 것이 고전의 재해석을 시도하는 작품들의 요즘 경향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분이 트위터에서 <절대미각 식탐정>이라는 작품의 한 장면을 인용했는데 "원전"이 있는 작품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내 생각과 일치하기에 끌어온다.
고전 또는 원전의 재해석, 재창조라는 게 고전 자체가 목적이 되기보다는 자칫 작가의 단면적인 주의주장을 설파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를 종종 본다. 사실 둘의 경계는 미묘하다. 내가 읽어서 마음에 들면 재창조, 재해석이고 안 들면 작가 혼자만의 개똥철학을 진실이라 우기는 걸로 생각되는 건가, 싶어 나 스스로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작가가 자신이 만든 이야기야말로 유일한 "진실"이라 주장하는 경우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분명히 인식하고 들려주는 경우는 읽는 사람에게도 다르게 다가오더란 것이다. 물론 나는 후자를 좋아한다.
에피소드 별로 가끔 기복이 보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작가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어떤 식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한다. 나는 이 작품이 참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