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 양이다보니 피새를 먼저 보다가 한 5권쯤 볼 무렵부터 눈새를 병행해서 봤다. 내용이 묘하게 겹치기 시작했다. 시모그라쥬군에게 사모가 한 연설은 북부군에게 사모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강조된 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케이건이 삼천 마리 두억시니를 하늘치로 깔아뭉갠 장면을 보고 얼마 안 되어 이이타가 소리(사람 말고 하늘치)를 보면서 케이건의 그 업적(?)을 상상하는 장면이 겹쳤다. 아스화리탈이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심장탑을 태워버린 직후에는 반세기 후의 사모가 론솔피와 그곳을 지나갔다.
이영도 씨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게 뭐냐고 물으면 요즘엔 눈새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확실히 눈새는 굉장하다. 그 양반의 독자를 고려 않는 화법은 병이니 어쩔 수 없지만 =_= 이야기를 구성하고 전개하는 능력과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풍이니 한국풍 판타지니 하는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눈새와 피새는 그 자체로 '판타지'다. 엘프나 마법이 있어야 판타지가 되는 게 아니다. 상상력이 이리도 제한없이 발휘되니까 판타지인 거지. 한국풍이니 뭐니 하는 그럴싸한 말은 오히려 상상의 범주를 제한함으로써 판타지의 의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거다. 아무튼, 눈새는 굉장한 작품이지만, 나는 그거야말로 피새 맨 마지막 챕터 제목인 '정석'이 아니었나 싶다. 바둑을 시작할 때 흑과 백이 어느 한편으로 세력이 기울어지는 법 없이 초반배치를 마치는 바로 그 쌍방의 암묵적인 합의, 그것이 피새에 있어 눈새의 역할 아니었을까. 여신구출(모부장이냐!)을 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다섯번째 종족을 밝혀내고, 남아있는 네 종족이 빛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를 알게 하고 세력을 맞추기 위한 밑작업이었달까.
눈새를 처음 봤을 때 가장 의아했던 건 세상에 레콘 같이 어처구니없는 종족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나는 용력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니까 대체 뭉치질 못해 세상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지만, 피를 무서워하는 도깨비나 한계선 밖으로는 못 가는 나가, 모로 봐도 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가진 종족적 약점과 비교하면 레콘의 공수증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레콘은 한 명 뿐이라도 군단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혹시라도 레콘이 엉뚱한 숙원을 품는다면 나라 하나 날리는 건 농담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 같은, 그런 밸런스 파괴로 여겨질 정도였다. 실제로 피새는 시작부터 황제 암살이 숙원인 지멘이 등장했다. 왕국 정도의 힘으로는 빗속을 걷고 진짜 의미의 군대를 이루게 된 레콘을 통제할 수 없다. 레콘은 다른 선민종족과는 대체 대등해질 수가 없단 말이다. 그래서는 윷가락 네 짝이 맞질 않지. 그러니 그리미는 레콘조차 통제할 수 있는 제국이라는 게 필요했고, 그로써 30만년을 1만6천년으로 줄이고자 한 것이겠지. 선민종족들이 다같이 획득해야 한다는 완전성이 대체 뭔지 모르겠고 죄(그 죄란 것의 의미도 모르겠다. '먹이'를 살해해야만 자신의 목숨을 이을 수 있는 생물의 숙명적인 본질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엘시는 대체 왜 죄가 없었는데?;;;)를 가진 사람만이 꿈을 볼 수 있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영도 아저씨 소설 초회독하면서 머리가 안 아팠던 건 디알 뿐이었던 것 같네. =_=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루트에리노를 계승한 엘시 패거리가 사람의 신 대신 죄와 증오를 택한 건 뭐랄까, 논리적으로 이유를 대진 못하겠지만 심정적으로는 지지하게 된다. 흠... 후치는 핸드레이크가 아닌 루트에리노의 방식을 택했고, 엘시 역시 후자에 속한단 말이지. 영도 님하의 작품들은 참 일관되구나.(...)
니어엘을 처음 봤을 때는 캐릭터를 소설이라는 자동차의 부품 취급하던 영도님하가 드디어 격하게 애정을 쏟아붓는 인물이 등장했나 했는데 다시 보니 또 그것도 아니다. 과연 이름의 어원이 near엘시 라는 설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불화로 죄진 것도 없이 용서를 구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늘 느끼며 살았던 니어엘이라면 칼 빼들기 전의 엘시와 달리 꿈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겠지. 어쨌든 우리 주정뱅이 수교위님이 최고에염. 혹 칼리도의 어머님이라면 모르겠다만 니어엘 외에는 대체 엘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구만. 정우는 킴이 아니라 도깨비 취급하고 싶어질 때가 대부분이고. (그렇삼! 나 아직도 니어엘시 떡밥 포기 못 하겠삼! 내가 귀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뭐? 뭐?! 뭣이라고!!)
그리고 사모 페이. 앞으로 영도님하가 다른 작품을 냈을 때 또 '왕'이 등장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사모를 뛰어넘는 왕으로서의 캐릭터는 다시 등장하기 어려울 것 같다. 시모그라쥬군이 '학살'당하도록 포석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베로시에게 보낸 편지는 분명 반세기 전 같은 전장에 섰던 지휘자로서의 진솔한 심정을 적은 것이었기에, 그래서 더더욱 아쉬존은 사모를 증오해야만 하겠지. 하지만 나는 사모를 존경하겠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두억시니를 신경써주고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 레콘을 걱정하며 '신'의 결정이 아니라 '사람'의 선택을 기다리던 진짜 왕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이해가 덜 된 데다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되니까 횡설수설이 되었는데, 요는 나에게 있어선 바둑의 정석 정도에 해당하는 눈새보다도 메인이벤트 격인 피새에 더 관심이 가고, 그게 더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시우쇠가 륜더러 베미온을 죽이라고 말할 때 이미 눈새에는 피새에 대한 예고가 있었다. 이영도 씨의 작품들을 읽고 나면 그 작품에 대한 인상 비슷하게 한 가지 방향으로 정리되는 기분이 느껴지곤 했는데, 피새에 대해선 압도당했다는 기분만 든다. 거장의 인생역정을 보고 이제 그 최후를 맞는 느낌이랄까. 지금 보니 디알은 피새에 비해 정말 소년 내지 애같은 느낌이다. 제기랄, 내가 소설쟁이를 지향하고 정진해서 영도님하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과연 저런 걸 써낼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그저 경외감을 느껴버리고 마는 바보인 점도 한 몫 하겠지만, 내가 두 책을 같이 읽고 지금 느끼는 기분이 그러하다.; 아, 젠장. 그리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고기가 된 기분이다. 아무 의미도 실려있지 않은 소릴 하며 입만 뻐끔뻐끔 놀리는 것 같다아아아.;;
p.s. 그리고 영도님하 저는 티르 보안관보와 안셀이 보고 싶어염. 핸드레이크와 솔로쳐가 툭탁거리고 헐스루인이 모조리 제압해버리는 게 보고 싶어염. ;ㅁ;
컴퓨터가 고장난 이래 내가 확실히 컴 중독이란 걸 확인하는 나날이다.(...) 여하간 컴을 안 쓰면 가용시간이 그만큼 늘어나는 법, 오랜만에 피새를 꺼내는 김에- 눈새도 빌려왔다. 피새는 나한테 있지만 눈새는 동생놈한테 있고, 그녀석한테 책을 다 들고 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