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잡담

낚였다 2007. 1. 20. 02:13
제가 '잡담'이라고 부르는 건 '무제'입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만.

1.
그 유명한 <오란고교 호스트부>를 봤습니다. 첫화에서 딱 든 생각 :

이건 동인녀를 위한 애니로구나.....

캐릭터 모에와 BL, 그리고 거의 유일한 히로인의 중성적인 이미지 - 즉 다른 남캐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할 위험이 없습니다 - 는 대놓고 커플링 하시오 보고 BL 커플링하며 맘대로 놀아보시오 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BL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쪽에 내성이 있다면 유쾌하게 웃으며 볼 수 있겠더군요(제가 견뎌낸 걸 보십쇼 -_-). 진짜로 BL물인 건 아닙니다. 캐릭터도 나쁘지 않고(캐릭들의 과거가 줄줄이 나오는 후반에 가선 좀 지루했습니다만) BL 분위기를 한번 풍겨주면 그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제법 재미있었습니다.

이건 동인녀라기보단, 정확히는 소녀들을 위한 애니란 느낌이었습니다.

제 취향은 아시다시피 순정 냄새가 나는 작품과는 거리가 먼 편인지라 소위 여성향으로 분류될만한 작품을 접해본 일이 없습니다. 제가 보는 만화는 <바사라> 같은 케이스가 아닌 한 보통 남성이 주인공이고 남성의 관점에서 진행된단 말이죠. 그 남성들 입장에서 여성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객체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놈들에게 여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고추를 떼라고 할 순 없잖습니까.;; 오란고교의 경우에도 물론 남학생들이 주를 이룬 호스트부를 중심으로 진행되다 보니 하루히가 아닌 제가 근력 딸리는 여자라고 남성에게 지적당한 기분이 들어 좀 짜증스럽게 본 에피소드도 있긴 합니다만 (하루히나 내가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냐고 빌어먹을) 이야기의 절반은 호스트부에 속한 남성들을 상대로 여성들이 맘대로 망상을 즐기며 놀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호스트부 입장에서는 돈받고 하는 서비스지만, 그 서비스를 즐기는 애니 속 여성 입장에선 그야말로 자신이 주체가 되어 놀더란 거죠. 뭐랄까, 사회에선 평등을 외치지만 실질적으로는 '양보'라는 이름으로 수직관계가 알게 모르게 묵인되어 있는 남녀관계가 역전된 것 같더군요. 세상에, 공중파 탔을 애니에서 당당히 BL 만세를 외치다니! 저한텐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_-;;; 세상이 바뀌어서 철저하게 여자의 입맛에 맞춘 애니도 나오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호스트부 아해들의 격한 서비스에 꺅꺅 난리도 아닌 애니 속 동인녀들을 보면서 현실의 씁쓸함마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동인질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 안 되는 (아예 직업적인 동인과 코믹 마켓이 창출하는 문화에 대한 얘긴 하지 맙시다. 일반적인 동인녀 즉 중고등학생의 동인질을 말하는 겁니다) 것이며, 본인이 암만 소중히 생각해도 결국은 '취미'에 불과하죠. 여자들이 남자들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는 게 오란고교에서조차 '그 세계'에서만 가능하단 겁니다. 무술최강자로서 남성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하니나 한 성깔하는 실력자 쿄우야의 예를 들 것도 없이, 호스트부 남학생들은 하나같이 재벌 내지 명가의 자제로서 사회에선 남들 위에 군림하게 될 녀석들입니다. 거기선 여자의 비위를 맞춰주는 '놀이'를 할 필요가 없죠.

언젠가 하루히의 처지를 들어 이 애니를 '캔디의 역습'이라 칭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목에 역습 들어간 작품 치고 최종적으로 그 역습자가 이긴 경우가 있어야 말이죠. 다스베이더의 제국이든 붉은 혜성 아저씨든 말입니다. -.-; 흥미롭긴 한데 뒷맛은 그리 깔끔하지 않네요. 쩝.


2.
히루마... 히루마... 히루마... 나의 백팔번뇌의 근원이며 울다 웃다 감동도 시키고 심심하면 스트레스까지 팍팍 선사하는 히루마... 이 짜샤아아아악!!

이자식에 대해 생각하는 건 정말 복잡하고 머리 아프고 괴롭기까지 하네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녀석을 모르겠습니다! 이자식아 숨은 주인공이면 다냐? 언제까지 비밀주의 유지할 거냐? 밝혀라! 네놈은 왜 크리스마스볼을 목표로 한 거냐! 왜 거기에 죽고 못 사는 거냐?! 네놈 이기기 위해선 별 짓을 다 하는 놈이지? 이기기 위한 수단이 오직 하나뿐인데 그게 데빌배츠 애 중 하나를 파멸시키는 거면 그래도 그거 쓸거냐, 아니면 곱게 져버릴 거냐? 너 세나 다리가 고장날 위험이 있는 거 알아도 그거밖에 수가 없으니까 주먹다짐 해가며 끝까지 아곤 마크시켰잖아. 그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연기였냐. 무사시 대사는 90프로는 진담이었는데 네놈 대사는 어느 정도가 진담이었던 거냐.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래도 달리게 할 놈이란 건 알지만, 그런데도..! 나 아직도 너를 모르겠다! 모르겠어! OTL

다른 분 댁에서 코드기어스 잡담을 하다가 그게 어찌어찌 해서 히루마 이야기로 번졌는데, 저는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책사'로서의 히루마에 대해선 오벨슈타인의 냉정함을 갖춘 라인하르트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냉혹하기론 우주최강인 진정한 그림자형책사 + 우주에서 제일가는 화려한 천재 ..써놓고 보니 그거 우주대마왕인데...?). 분명 히루마가 중시하는 건 데빌배츠 녀석들과 "함께" 가는 거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걸 위해 "(미식축구 룰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긴다"는 주의 아닙니까. "동료"와 "이기는 방법"이 충돌할 경우 그녀석은 어떤 길을 선택할까요? 가령, 세나가 수십분 동안 쉬지 않고 4.2초로 달릴 경우 중간에 타임아웃 같은 꼼수 안 쓰면 세나의 선수생명이 끊길 수도 있다는 경고를 신류지전 본 분들은 봤습니다. 그런데 이길 방법이 정말로 오직 그것 뿐일 경우 히루마는 그걸 저지를까요? 그래서 세나가 망가지면 무사시를 비롯한 데빌배츠 녀석들한테 절교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평생 원수 취급받을 텐데? 히루마가 팔불출 소리를 듣지 않는 건 그런 소리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데빌배츠 애들을 아끼는데도 그런 티를 안 내기 때문이지요(아니 생각해 보니 세나에 대해선 상대방을 도발하는 차원에서라도 팔불출 짓을 하는 것도 같은데...;). 히루마의 그런 인간적인 면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렇게 싫어하는 패배를 택하겠지 싶습니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이겨서 크리스마스볼에 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마오 데빌배츠간의 맹세와는 별개로 그런 각오가 있었다면?

험하디 험한 미식축구를 다루는 만화인데도 데이몬에선 여태까지 부상자가 한명도 나온 적이 없다는 것... 역시 하쿠슈전(전 오죠와 세이부가 탈락할 거라 생각합니다.;)이 두렵습니다. 제 뇌내망상극장에선 이런 것 저런 것 망상의 폭풍이 불어닥치는데 어째 해피엔딩이 없네요. 좀 더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갖춰야 겠구만. -_-;;;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폭주하는 건 아이실드분이 부족해섭니다. 217th down을 못 봐섭니다. 애니실드 90화는 재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바보 취급하셔도 토 안 달겠습니다. 하아아아아...... ㅠ_ㅠ


3.
우연히 클램프의 <츠바사> 최근 연재분을 봤습니다. 제가 최초로 버닝지심을 배운 만화가 <슬레이어즈>라면 제 만화 입문서는 클램프의 작품들입니다. <마법기사 레이어스>야말로 제가 난생 처음 손에 잡은 만화책이었죠. 이후 <카드캡터 사쿠라>가 나오기 전까진 동네 책방을 샅샅이 뒤져가며 클램프 작품을 죄다 찾아 보았더랬습니다. 사쿠라와 <엔젤릭 레이어>는 정말 제 취향이 아니라서 던져버렸고, 그 무렵에 클램프 작품에서 거의 손을 뗀 것 같군요.

그네들의 세계관이나 캐릭이나 그림체가 취향인 건 아닙니다. 클램프 캐릭터들 중 지금까지도 마음에 드는 작품은 <동경 바빌론> 뿐이고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스메라기 남매와 세이시로 뿐입니다(그리고 세이시로는 란티스와 더불어 저에게 남자는 검은색! 모름지기 검은색! 이라는 참 울적한 인상을 남겼으며 후에 흑태자를 만나 더욱 심화된 그 취향은 지금도 어느 정도 남아있습니다). 그런데도 참 묘하지요? 한번 클램프 인 원더랜드에 맛을 들이니 야유를 퍼부으면서도 쉽게 헤어나올 수가 없더군요.;;;

어쨌든 <츠바사>의 가장 큰 미덕은 <X>와 달리 연재중이라는 것.-_- 그리고 캐릭들이 알 수 없는 소리나 하며 답답한 행동을 하는 <X>와 달리 중심인물들이 이야기를 진행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제 만화애호역사의 뿌리를 더듬어가며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섭니다.

저거 정말 란티스냐? 저거 정말 이글이냐? 저거 정말 제오냐?
 
진짜냐?!!

확실히 배경세계 자체가 판타지라서 <X>보다 캐릭터 참여폭이 넓군요. <성전>에 이어 레이어스 캐릭들도 등장하다니.... 이건 역할이 바뀌어 스바루를 추격하는 세이시로 만큼이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군요. 클램프 아줌마들이 어째선지 존재감이 약한 레이어스의 남캐들도 잊지 않고 꺼냈다는 게 뭐랄까... 역시 자기네 작품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꿰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러면 클램프의 옛 작품들을 다시 보고싶어지지 말입니다.;;;

다작을 한 작가는 이런 게 가능해서 좋군요. 클램프의 경우에는 대놓고 우려먹기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겠지만요. 덕분에 만화 동아리 만들던 그 시절의 추억을 곱씹으며 즐거운 기분이 되었습니다. 껄껄.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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