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 프리머스는 어제 저녁 10시부터 <다크나이트>를 올렸습니다. 개봉일을 8월 7일로 알고 있었는데 이 동네는 5일이더군요. 여하간, 오늘 아침 7시 조조로 보고 왔습니다.

개봉 당시 제가 좀 어린 나이였던 <배트맨>은 대학 들어가고 나서야 봤지만 나머지 시리즈는 비디오가 나오는대로 즉시 접했습니다. DC코믹스 원작 쪽은 전혀 모르지만 영화 쪽이라면 나름대로 배트맨 시리즈를 끈질기게 봐온 겁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 <배트맨 리턴즈> 혹은 <배트맨2>였습니다. ..라고 말해도, 팀 버튼 표 어둠+캣우먼+펭귄만세! 이들에게 영광 있으라! 조합에만 정직하게 반응한 건 아닌 것도 같습니다. 그 뒤의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이 워낙 제 입맛에 안 맞았거든요. -_-; 어쨌든 배트맨이 이상한 코스튬을 한 악당들을 처치하며 좌충우돌하는 활극 이상도 이하도 아닌 뒤의 두 작품에 상당히 실망했기에 <배트맨 비긴즈> 같은 경우엔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배트맨 시리즈니까 관성으로 봤고, 역시 악당이 마음에 안 들어서 -라기보단 그닥 인상적이지 못해서 -_-; 그냥 그렇게 넘겼죠. 이런 와중에 들려온 <다크나이트> 소식은 그저 시리즈니까 또 봐야겠지 하는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습니다. 히스 레저의 죽음도 <브로크백 마운틴>의 그 배우가 죽었구나 안타깝네 정도의 느낌이었지, 이 영화와 관련지어 생각한다거나 사무치게 슬프거나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건 <놈놈놈>으로 시끌벅적하던 밸리에서 이 영화에 대한 엄청난 찬사가 불쑥 튀어나오고 또 그런 목소리가 점차 눈에 띄게 높아져가는 걸 목격하고 나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아무리 평범하고 심지어 선하기까지 한 사람이라 해도 궁지의 궁지에 몰리면 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순간 자기 이익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절대선이던 것을 더이상 지킬 수 없게 되어 '타락'해버리는 평범한 인간상은 꽤 고전적인 주제입니다만, 같은 주제라도 어떻게 변주하느냐에 따라 매력의 정도가 완전히 달라지죠. <다크나이트>에는 배트맨과 하비 덴트, 그리고 조커라는 멋지고 설득력있는 캐릭터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배트맨이구나, 이것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본질적인 문제구나 하는 느낌을 비로소 받았습니다.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팀 버튼스럽지 배트맨스럽다고 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다는 것 또한 오늘에야 알았네요.
히스 레저의 조커는 길이길이 전설이 될 겁니다. 강력한 카리스마 악역이 버티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손해보는 게 선역의 운명입니다만 그렇다고 배트맨의 크리스쳔 베일이 조커에 완전히 밀리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조커와 배트맨은 상대방이 상대방을 구축(築)하고 구축(逐)하는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배트맨도 선역은 아니죠) 두 인물간의 대립이 낳은 투페이스는 바로 그런 그들의 관계를 상징한다는 느낌입니다. 투페이스의 멀쩡한 낯이 망가진 낯을 제거해 버리거나 그 반대로 할 순 없듯이 배트맨과 조커도 서로를 계속 쫓지만 완전히 제거하진 못할 겁니다. 어차피 이젠 그럴 수 있는 '조커'가 세상에 없지만요.. 드디어 선역이 되어 행복해 하는(...) 게리 올드만에게도 박수! 네타로 짐작한 게 없었으면 그 장면에서 꿈도 희망도 없어! 를 외치며 제가 좌절할 뻔 했습니다. -ㅅ-;

불사조 군과 비슷한 취향을 가졌으며 블록버스터를 선호하는 사람도, 사람의 어둠을 파헤쳐대는 심리극을 선호하는 사람도, 단단한 플롯이 있는 극을 좋아하는 사람도 다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전 이제는 히스 레저의 죽음이 너무 아깝습니다. 남은 시간동안 진짜 엄청난 영화가 또 나오지 않는 이상 최소한 감독과 각본과 히스 레저에게 오스카를 바치지 않는다면 올해의 할리우드는 대단히 실망스러울 겁니다. -ㅅ-



p.s. 엄청나게 심각한 이 영화에서 결국 뿜고 만 장면은 역시, 조커가 투페이스를 탄생시키고 병원을 나서던 씬. 그 장면의 그는 정말이지 이미지 그 자체로 "why so serious?" -ㅅ-;;;;

p.s.2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 없네요. 가장 깨끗한 인물이랄 수 있는 게리 올드만의 고든 반장조차도 경관들이 알게 모르게 저질러온 부정을 체념 혹은 방조해 투페이스의 탄생에 일조하는 죄를 지어버렸으니... (하긴 그러니까 예수가 세상에 온 것입니다만)

p.s.3 아, 이 포스트 작성 직전 통계 확인하다 6만힛 클린샷 겟.

p.s.4 다시 읽어보니, 내가 느낌 감동을 반의 반의 반도 제대로 적어놓질 못했네.
그래요, 전 이 영화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지금 노룡님 댁에서 댓글을 주고 받는 중에 제가 얼마나 감동받았는지, 그리고 이 영화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같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두 번 본 역사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다시 보고 싶습니다.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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