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와 관련해 발표를 할 일이 있었더랬다. 위고 대선생이 나온다 카면 의당 따라올 것이 <레미제라블>, 해서 레미즈 이야기도 (물론 뮤지컬 말고 -_-;; 아니 실은 심심하면 팬텀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대마왕 콤발장과 순진무구한 별의 요정 대천사 콰스트 자베르가 펼쳐보이는 세기의 대결을 뵈어드리겠어! 같은 크나큰 포부를 안고 발표 시작한 거지만 그 양반들 보여줄 짬은 없었고 하여간에 원작) 좀 엮어서 했더랬다.

이 수업에는 성적 깎이지 않으려면 발표를 들은 후 사이버강의실에 후기를 올려야 한다는 초큼 무서운 규칙이 있다. 그 기한이 임박한 고로 게시판에는 뭔가 글이 잔뜩 쌓여있었다. 포스팅에 댓글 달리나 하루종일 지키고 앉아있는 바보 블로거마냥 설레는 마음 안고 또각또각 클릭질과 뒤로가기를 반복하던 중, 슬그머니 내 안에서 뭔가 이건 아닌데? 하는 울화와도 같은 기분이 -_-;; 치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학우들은 위고 대선생 특유의 주절주절장광설이 절반은 먹는 여섯권짜리 완역본이 아니라 어릴 적 그림동화책을 통해 레미즈를 접한 듯 했다. 그리고 그 동화책이란, 어느 기지 넘치는 학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빅토르 위고 = 장 발장 = 은촛대

라는 공식으로 레미즈를 단순화시키는내용이엇떤거시다. 요컨대 옛날옛날에 빵 하나 훔쳤다가 19년 감옥 살고 나와서도 은촛대를 훔친 못된 도둑놈 장 발장이 착하신 신부님께 용서를 받고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끗- 이란 게 레미즈에 대한 거의 일반적인 인식인 듯 했다. -ㅅ-;;;;;;;

아니.. 나도 뭐 그놈의 웬수같은 TAC만 아니었어도 예전에 읽다 포기했던 완역본에 다시 도전하는 짓 따윈 안 했을 것이고 (그만큼 콤발장 콰스트 자베르 콤비네이션은 강했다 OTL) 확실히 고딩 적까지는 레미즈 속 학생들이 봉기를 일으켰던가 어쨌던가도 헷갈렸더랬으니 말이다. 시간관계상 다들 레미즈의 개략 정도는 알 거란 전제로 줄거리는 패스하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더랬는데 후기를 보니 온통 그 소설이 그런 이야기였냐 그런 내용도 있었느냐 몰랐다 이런 반응 일색이라 대략 입이 안 다물어진다. 대학생이라면 모름지기 인내심을 가지고 소설을 쓰려는 건지 민생보고서를 쓰려는 건지 작가양반이 이 부분에선 그냥 수다나 떨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는 완역본을 읽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건, 동화책으로만 그 책을 접한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나는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동화 내지 축약본으로 만들어진 명작은 분명 시간을 아껴주고 아직 어린 독자가 어려운 원작에 보다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무시 못 할 장점이 있다. 하지만, 거기엔 그 동화 내지 축약본이 원작에서 정말로 말하고 싶어하는 걸 제대로 담아냈다는 전제가 스리슬쩍 깔려있다. 책읽기를 점점 더 싫어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요즘 세상에 어지간한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 한 어릴 적에 봤던 작품을 완역으로 보겠다고 덤벼들 사람이 흔하진 않을 것이다. 즉슨 동화 내지 축약본에서 본 인상이 바로 그 작품에 대한 인상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다루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의 개혁을, 최강의 휴머니티를 다루는 저 레미즈가 그저 도둑놈 하나 갱생하는 과정 보여주면서 어린이 여러분 착하게 사세요~ 라고 좀 미심쩍은 교훈을 주는 이미지로 남겨진 것처럼 말이다. 편집이 잘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참 오래도록 난감해질 일이다. 기껏 동화라 해도 가볍게 가위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거다. 근데 이미 다 광범위하게 저질러진 일 아니던가? 언젠가는 <삼국지> 같은 게 유관장 삼형제가 도원결의해서 악당 조조를 물리치고 (사실 촉이 중국통일은 못 했으니까 어정쩡하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내용으로 알려진다든가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고 태클 걸다간 오덕 취급을 받는 시대도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던데, 내가 너무 넘겨짚었나?


뭐, 이야기를 좀 확대하면 결국 이런 거겠지. 정보화시대에는 정보의 소스를 틀어쥔 자가 수동적인 대중에게 어떻게 편집해서 흘려주느냐에 따라 오른손이 왼손으로도 바뀌는, 어딘가 빅브라더스런 일이 참 간단히 일어나버릴 수 있다는 것. 안 넘어가려면 내가 직접 제대로 된 소스에 다가가서 제대로 해석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치만 역시 어지간한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그런 건 귀찮다는 게 문제란 말이야... 그렇다고 마냥 편집자를 믿을 수도 없고. -_-;;; 글쎄, 진짜 문제삼아야 할 건 지금 이 순간 내 머리에 스팀 오르게 하는 것이 이 사회의 큼직한 담론들에 대해 내가 무지무지무지 잘못 알고 있을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레미즈가! 나의 레미즈가!! 나의 레미즈는 이러치안다능!!! 을 외치며 애꿎은 발표후기 붙잡고 짤짤거리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여간 나의 레미즈는 이러치안아!!!! OTL
Posted by 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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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anigud 2008.04.14 0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화책은... 그나마도 은촛대 얘기로 끗. 그러다보니 중고등학교 필수 도서인 [레미즈 전편줄거리 요약본(...이렇게밖에 말 못하겠음...)]을 읽은 기억도 없는 애들이 많죠. 아니 코제트양이랑 자베르님(...)도 모르면서 뭘 봤다는거야!!

    참, 그나마 예전에 뽀뽀뽀에서 전편(발장씨 사망까지)을 인형극으로 매화 보여주더군요. 무려 발장씨가 꼬마애 돈을 밟은채로 모르고 있던 장면까지....; 오오 MBC 이런 기특한(?) 짓을? 하고 종종 봤었다는...

  2. 세시링 2008.04.14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미 조조는 어린애들한테는 악당 취급받고 있는거 같은데... 이문열의 삼국지가 여러 사람 망쳐놨음 -ㅅ-

    난 삼국 중에 촉을 제일 안 좋아하는데 ㅡ,.ㅡ

  3. 레크레카 2008.04.14 1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릴 적 능인고전만화로 접했던 소설에 부족함을 느껴서 완역본을 찾아 읽었습니다. 빨간머리앤이나 몽테크리스토백작, 레미제라블, 작은 아씨들 등을 읽으면서 "오오오, 역시 두툼한(?) 걸 읽어야 한다니까?"라는 게 절로 나오더만요. 찾아서 읽읍시다 사람들아.

  4. 견습기사 2008.04.14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니구드님/ 우리 자베르 님하 모르면서 레미즈를 말하는 것? 그런 것? (흥분)
    오오 쁘띠 제르베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면 확실히 세밀하게 원작 따라갔겠네요. 갑자기 저도 그게 보고 싶어집니다. 집에 티비도 없는데.;

    세실형님/ 하긴 그렇군요. 어린이가 대상인 책에서 패러디 형식으로 삼국지가 등장할 때면 조조 캐릭은 악역이었던 게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알고 보면 촉 지지자인 제 눈에도 엄청 대단한 인물인데.

    레크레카님/ 아니 뭐 ^^; 꼭 완역본을 읽어야 한다기보단, 축약본의 경우엔 편집자의 농간에 놀아날 위험이 좀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은 아니지만) 자본론 같은 건 잘 된 축약본으로 보는 게 차라리 낫지요.

  5. paro1923 2008.04.14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시링 님// 뭐어, 조조야 까일 만해서 까이는 측면도 있으니까요...
    너무 까인다 싶어서 복권시켜볼려고 근래에 파고든 분들이 좀 있습니다만,
    그러다가 그만 조씨 문중의 더 막장인 측면을 여럿 발굴해 버려 그 반동으로
    더 열렬한 촉빠가 된 분들도 종종 봤기에...
    (결론은, 나본은 과연 본좌... 정사는 잘못 읽으면 낚이기 쉽상...
    위의 뒤를 이은 진이 통일 후 40여 년 만에 망한 건 당연한 결과더군요... 후.)

    ...사실, 완역이 안 되어서 원래 내용과 동떨어진 설화는
    당장 한국 설화에도 있습니다. '콩쥐팥쥐'라던가 말이지요...
    (콩쥐가, 완역본에선 중간에 살해당한다는 걸 아시는 분들이 의외로 없지요...)

  6. 레크레카 2008.04.15 0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aro1923님// 콩쥐팥쥐에서 저 장면 읽고 놀랐습니다-ㅂ- 나중에 팥쥐의 최후는 더 끔찍했어요. 콩쥐는 연못에 퐁당이었지만, 팥쥐는 젓갈이 되어버렸으니-ㅅ-

  7. ranigud 2008.04.15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전 그 콩쥐팥쥐 완역 이야기를 학교 선생님한테 들었죠... 학년말에 할 일이 없어서.... 당시에는 너무 무시무시해서(;;) 선생님이 만들어낸 이야기인줄 알았다는....

  8. 견습기사 2008.04.15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aro1923님/ 까일 데야 많지만 복잡다단해서 더 매력적인 캐릭터지요, 조조 본인은. 자식농사를 못 해서 조비 같은 황당한 놈도 나왔지만..-_-; 사마씨들 시대는 한 번만 읽고 말아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미 막장테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콩쥐팥쥐. 이것도 나름대로 트라우마감..-_-;;;

    레크레카님/ 팥쥐가 젓갈이 되어버린 거, 이전에 자로의 케이스를 들은 적이 없었다면 대략 이거 뭥미?! 를 외쳤을 겁니다. 랄까 인간이 인간에게 그런 짓도 태연히 저지른다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우리나라 설화에?! 하고 또 놀랐지요.;

    라니구드님/ 잔혹동화는 어른들이나 봐야지요. 애들이 보는 동화는 독자의 특수성을 고려해 순화하는 형태로 편집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레미즈 우오오 레미즈는 왜;;;

  9. 비르투 2009.07.26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사실 레미즈를 장발장 착해진 이야기로만 알고 있다가 뮤지컬을 보고 원작을 읽고 나서 '이제까지 속아 살았어!!(실은 제가 문학에 무관심했지만)'라며 울부짖었죠.
    반성하는 의미로 레미제라블 완역판을 읽고 있습니다. 뮤지컬도 좋지만 인물 하나하나와 당대의 상황을 생생하게 살려주는 원작소설이 더 좋군요.

    레미제라블이 그렇게 알려진 건 혁명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기가 뭐했던 우리나라의 상황과 엮인 건 아닐까 싶습니다. 97년까지도 전두환의 민정당과 야합한 김영삼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니까요.

    • 양운 2009.07.27 2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레미즈 뿐 아니라 어린이명작동화 형식으로 편집된 고전들은 하나같이 완역을 봐야 제대로 맛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으로 이름을 남긴 원작자들이 현대의 축약본을 본다면 어떤 생각들을 할까요...-_-;
      좌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든 본질이 중요하건만, 여차하면 무조건 좌빨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이라고 없는 건 아니긴 하네요. 사실 위고 대선생님의 정치적 성향은 좌에 상당히 기울었어도 작품들은 보수적인 냄새가 남아있는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을 인민 내지 민중으로 번역하자 운동 냄새 난다고 백성으로 바꾸게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