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의 라이센스.. 라는데, 내가 학원을 도망간 그 날이 01년도인지 02년도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고로 나에게는 7년만일 수도 있다. 어차피 01년도 말 겨울에 시작했으니까 그게 그거이긴 하지만.
샤롯데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01년도 라이센스 버전의 OST를 틀었다. 그래. 팬텀의 커버였으며 내 최초의 팬텀인 김장섭 씨가 맨 처음의 경매인으로 등장했더랬지. 노래는 좀 부족할지 몰라도 이분이 연기는 참 잘 하셨어. 오오 이거다 이것이 바로 나의 칼롯타야 와 시원시원하게 올라가는 이 목소리가 바로 프리마돈나지! 피앙지도 청아함이 남달라! 아니 이 때의 혜경크리는 정말 소녀였네?(지나가다님 정정 감사합니다 ㅎ) 류라울은 스티브 바턴이 한국어로 노래하는 것 같았네. 이 때만 해도 영석팬텀은 나름 마팬텀 과였고.
그런데 내가 오늘 듣고 온 건 대체 뭐였던 걸까. -_-;
공연을 보고 왔으면 그 여운에 잠겨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도무지 그러질 못하겠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공연을 되씹을수록 답답하다. 후우...
1. 승리의 좌석
일단 웃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위치는 내 예상대로, 팬텀이 2층에 올라갈 경우 대충 정면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샹들리에가 곤두박질칠 때는 내가 무대장치 위에서 사고가 나는 걸 내려다보는 기분이었고, all I ask of you 리프라이즈 때 허공에서 대롱거리며(이거 위험하지 않을까;;) 울먹이던 팬텀은 딱 나와 눈이 마주치는 곳에 있었다. 무대도 그럭저럭 가까워서 안경을 쓰고 0.7을 오가는 시력으로도 배우들의 표정이 어느 정도는 구분이 가능했다. 혹시라도 다시 간다면 또 이 자리를 잡아야지. 와 이건 나의 승리다 ㅋㅋㅋㅋㅋ
...땡큐 캣츠. 덕분에 샤롯데가 집처럼 편안했어. OTL
2. 오케스트라 등장 & 괜찮은 코러스 & 멋쟁이 발레리노
-캣츠 때는 무대 앞에 오케스트라를 배치하지 않고 뒤에서 연주+녹음을 썼던 걸로 기억한다. 고양이로 분장한 배우와 관객이 직접 접촉하는 게 주된 공연이다보니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오케스트라가 있을 자리에 좌석을 놓은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맨 앞자리와 무대 사이에 웬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던 수원공연은 기분이 최악이었더랬지 -_-;) 유령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샤롯데에 오케석이 부활하였도다. 올초까지 내가 툭하면 가서 앉아있던 자리에 오케스트라가 있는 걸 보니 기분 묘하데.
-한국 사람들은 음주가무에 환장한다. 이 때의 음주가무는 반드시 2인 이상의 다수가 동반된다. 즉, 한국 사람들은 단체로 노래부르는 걸 좋아한다. 글쎄, 한국인 합창단이 실력이 끝내주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태까지 봤던 라이센스 내지 국산 공연들은 최소한 코러스에서는 그닥 불만을 품을 일이 없었다. 이번 9월달 지킬 내한공연 때도 라이센스팀의 코러스가 그리울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지. 09년도 라이센스 유령에서도 코러스 내지 합창 부분에서는 불만이 없다. 한국어임에도 가사가 뭔지 안 들려서 문제지.
-01년도에는 극 중 극 한니발의 발레 파트에 발레리노들이 다수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참 멋지더라. 기럭지가 길쭉해서 동작이 시원시원하고 커보였다. 이분이 등장만 하면 열심히 쳐다봤다.
3. 01년도 / 09년도
그 때는 사전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무작정 보러 간 거라, 내용을 따라가며 감탄하기에 바빴지 세세한 것들을 볼 여력은 없었다. 그래도 09년도와 비교해 연출에서 몇 가지 달라진 것은 기억난다.
-우선 think of me. 01년도에는 크리스틴이 무대 뒤편을 향해 무대인사를 하면 그쪽에서 박수소리가 났던 것 같다. 관객이 크리스틴의 무대 뒤에서 무대감독 같은 위치가 되어 보는 것이다. 09년도에는 박수를 안 치데. 가상의 관객들 마음에 안 들었나 봐.(...)
-the phantom of the opera에서 모자를 던진 팬텀이 두 손으로 올백머리를 쓱 넘기는 장면은 여전했다. 거럼 이건 당연히 있어야지 -_-*
-all I ask of you 리프라이즈에서, 01년도 팬텀이 탄 곤돌라 비슷한 것은 무대 2층에 고정된 장치였던 것 같다. 09년도에는 그 장치만 따로 움직일 수 있어서 그 장면에서는 샹들리에 아래의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샹들리에 말고 저게 팬텀을 태운 채 떨어질까봐 내가 불안했다.;
-masquerade에서 축제를 파토낸 팬텀이 퇴장하는 장면은 불을 터뜨리고 (아마도 무대 아래로 꺼지는 트릭을 이용해) 완전히 사라지는 거였던 것 같은데, 어째 09년도엔 계단 위로 다시 올라가있네. 이건 내가 영화 쪽과 헷갈린 걸지도 모르겠다.
-wishing you were here somehow again...헉헉, 이 곡은 런던 오리지날 때는 팬텀 크리 라울의 3중창이었는데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후에 팬텀 크리의 2중창으로 바뀐 걸로 안다. 01년도에는 어느 쪽이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09년도에는 미국식 2중창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3중창 쪽을 좋아하므로 아쉽다. -_ㅠ
-the point of no return에서, 01년도에는 5번박스 반대편의 평범한 박스에 라울이 있었던 것 같다. 혜경크리의 신호로 팬텀을 알아본 류라울이 박스에서 뛰어내릴 기세로 벌떡 일어나는 걸 봤던 것도 같은데, 기억의 농간일 수도 있다. 내 기억을 내가 못 믿으니 미치겠네.; 아무튼 09년도에는 그 박스가 텅 비어있었다.
4. 이제부터 불만
-경매인이 첫 마디를 떼는 순간부터 뭔가 불편했다. 말투가 대단히 과장된 느낌이라 이것이 가상의 '극'에 불과함을 사정없이 상기시키는 것이다. 경매인 뿐 아니라 대부분의 조연격 배역들이 그랬다. 물론 무대공연의 연기는 필름연기와 비교할 때 좀 더 과장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들을 때마다 움찔 놀랄 정도로 적응이 안 될 만큼 과장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조금만 평범하게 대사를 처리하면 안 되는 것일까?; <오페라의 유령>은 기본적으로 우중충한 작품이다. 코끼리 속에서 카드 치는 작자들이나 극장의 공동지배인들처럼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들이 있긴 하지만, 극의 기본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선에 그쳐야 할 것이다. 과장된 어조들 때문에 별 것 아닌 장면 뿐 아니라 조금 진지한 장면에서도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가 되면 곤란하지 않을까.
-인물들의 이름. 뭐냐 이건. 이 극의 배경은 19세기 말의 프랑스 파리 오페라하우스이며 등장인물들도 대부분 프랑스인이다. 리차드? 라울 샤그니? 그런 사람 없다. 리샤르 피르맹이고 라울 '드' 샤니다 이 양반들아;;; 영어권 배우들도 영어로 공연하면서 프랑스식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데 대체 왜 그렇게 바꾼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
5. 캐릭터는, 글쎄
-앞서 01년도 영석팬텀이 나름 마팬텀 과라고 적었다. 변태성(...)은 좀 낮지만, 가여울 정도로 찌질하다는(...) 점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09년도의 영석팬텀은? 음........... 순진한 히키코모리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니 뭐, 따지고 보면 팬텀은 히키코모리가 맞긴 한데,(...) 이걸 19세기판 전차남의 비극이 아니라 빅4에 속하는 애절한 비극으로 바꾸는 것이 캐릭터와 곡의 힘일 것이다. 자신을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진정명 오타쿠에 히키코모리인 전차남을 동정할지언정 감정이입은 안 한다. 그렇지만 뮤지컬의 주 관객층인 우리 '일반인'들은 팬텀에게 엄청나게 감정이입을 해서 final lair를 들으며 펑펑 울곤 한다. 팬텀에게는 단순한 사회성결여 음악오덕 키잡변태에 머물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게 음악인지 천재성인지 비뚤어진 성격 그 자체인지는 해석하는 배우 취향이겠지만, 이것을 살려내야 비로소 그 배우의 팬텀이 되는 것이겠지. 09년도 팬텀은 아직 그 특이점을 모르겠다. 영석팬텀이 01년도와는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려 하시는 것 같긴 한데, 아직은 굳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이 팬텀은 the point of no return에서 이미 자포자기한 것 같았다. final lair에서도 무대 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씩씩거리는 것이 이미 크리스틴의 선택을 알기에 분노와 슬픔으로 땡깡;;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순진한 만큼 상처가 깊었구나. 우쭈쭈쭈쭈.(...)
-01년도의 혜경크리는 부드럽고 어딘가 그늘진 소녀다. (그간 01년도 ost 크리가 김소현씨인 줄 알았는데, 이혜경씨였네요;) 01년도 소현크리는 직접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09년도 소현크리는? 역시 소녀다. 그런데 그 소녀틱함의 느낌이 다르다. 나는 이 크리스틴을 증오한다. 철없고, 패닉에 빠져 허둥거리기만 하고, 팬텀이 이끌어주지 않았어도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불탔을지 의심스럽다. 아니, 애초에 음악에 한정된 것이라도 팬텀과 진실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는지조차 좀 의심스럽다. 내 생각에 크리스틴은 순진한 겉모양과 달리 엄청 모순되고 복잡한 인물이다. 그 나이가 되도록 어려서 여읜 아버지의 그림자를 쫓는 것이 아직 완전히 독립된 어른으로 성장하진 못한 인물이며 해석에 따라서는 병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게다가 POTO의 "I am the mask you wear / It's me they hear"는 폼으로 들어간 문장이 아니겠지. 크리스틴은 분명 예술가로서는 팬텀에게 완전히 빠져 있으며, 그 외의 인간적인 면에서 좀 더 관계를 발전시켰거나 그랬을 여지가 있었는가가 문제될 것이다. 여기서 팬텀을 좇아도 라울을 택할 수밖에 없는 모순의 실마리가 발견되겠지. 그런데 이 크리스틴은 처음부터 팬텀으로부터 도망칠 날만 기다린 것 같단 말이다. 상대가 라울이 아니었어도 날랐을거야!;;; 이 크리스틴은 내가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타입이다.
-홍라울은, 흠... 미친 가창력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나. 잘 부른다. 노래만 놓고 보면 한 10년쯤 후 이분이 팬텀을 노린다는 소문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라울로서는 잘 모르겠다. 셋 중에서 라울이 제일 손해보는 캐릭터이긴 하다. 솔로곡도 없지, 전투에선 내내 팬텀한테 지지(그나마 전쟁에서 이겨 다행이다 -_-), 관객들은 팬텀 편이라서 일반인의 상식으로 행동하는 이 엄친아를 괜히 얄미워하지. 그렇다고 라울이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내 생각에 라울은 손해볼 수밖에 없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균형을 더 잘 이룰 것 같다. 크리스틴이 이미 범상치 않은 인물인 이상 강한 인물은 팬텀 하나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팬텀은 이미 초강력하지만. -_-;) 홍라울이 균형을 깰 만큼 강한 라울을 지향하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따금 강한 남자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라울이 워낙 손해보는 이미지이다 보니 그게 강한 도시남자가 아니라 혈기방장한 젊은이의 허세로 보이더란 것이다. 뚱한 라울이라니;;; 라울이 멋있어지려면 역시 쿨시크하게 배역의 손해를 감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걸까.(...)
-칼롯타. 후우... 01년도 프로모션이 아직도 유튜브에 떠돌아다닌다. 그 중에 프리마돈나 장면 동영상이 있다. 거기 달린 외국 친구들의 댓글은 그야말로 찬양일색, 웬만한 영어권 배우보다 나은 훌륭한 칼롯타라는 평가이다. 팬텀이 '나의 크리스틴'의 라이벌로 인정할 만하달까. 가창력 면에서 성함도 잊어버린 그분이 그리웠다. 내가 저 성격 나쁜 팬텀이었다면 크리스틴의 임시대타를 따로 구하는 한이 있더라도 09년도 칼롯타를 진즉에 망신줬을지도 모른다. 쩝.
p.s. 오, 방금 찾아보니 01년도 칼롯타였던 윤이나 씨가 이번에도 칼롯타를 맡으셨다 한다. 칼롯타도 더블이네. 아무래도 양준모/최현주/정상윤 조와 짝을 이룰 것 같은데, 역시 이쪽도 질러야 하는 걸까;;
6. 최악
그리고, 가장 열받는 것. 내가 도무지 극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 것. 그것은 번안이다!
내가 지금 01년도 ost를 꺼낸 이유는 캐릭터들을 비교하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번안이 어떻게 변해버린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아, 구관이 명관이다. 01년도 번안은 번역 자체가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면서 제법 시적인 분위기를 띠려는 노력이 보이며 음과 대단히 잘 맞아 떨어진다. 덕분에 라이센스 ost를 단 한 번 들어도 가사를 절반 정도 어림짐작으로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귀에 쏙쏙 들어왔다. (마팬텀의 런던 오리지날 ost는 대본을 내가 직접 번역해보기 전에는 곡 하나 외울 수가 없었다. 왜 라이센스 공연은 국어로 번안해야 하는지, 노래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대략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09년도 라이센스 번안은 가사와 음의 아귀가 맞질 않아 곡에 문장을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며, 그 결과 노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01년도 버전은 일곱 명이 떠드는 prima donna조차 뭐라는 건지 대략은 귀에 들어오건만 09년도 버전은 저 간단한 angel of music조차 안 들린다. 번역된 가사 자체도 생뚱맞다. 사전지식 없이 듣는다면 말의 앞뒤가 안 맞고 인물들이 왜 저러는지 내용조차 이해가 되지 않아 대략 정신이 멍해질 것이다. 이런 번안에서 감정이입을 바라지 마라.....;;;
결론 : 그냥 01년도 번안을 부활시켜라. 제발............ OTL
7. 기타 등등
-전체적으로 디테일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아직은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09년도 버전이 시작되었으니까. 이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번안은! 번안은 제발 좀! 어떻게 해주길 바란다. final lair에서 눈시울을 붉히지 않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던 내가 거기서 뚱한 낯으로 팔짱을 끼고 돌아가는 상황을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훌쩍훌쩍 난리가 나야 할 객석은 정적에 잠겨있고 말이지. 이건 아니야아아아아아아아
-왜 캐스팅 공지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 <캣츠>는 그게 공연의 특성과 전통 탓이었다 치자. 유령이 툭하면 부상 나서 당일에 선수교체를 해야 할 만큼 격한 공연인가? ..음 액션들이 격하긴 하구나. 어쨌든 주역 3인방은 더블 시스템으로 충분히 휴식을 주면서 돌릴 수 있지 않은가. 이거 묘하네. 유령 보러 가는 사람들은 동전 던져야 하나?
-어? 어라? 강연종 씨가 앙상블에 계시네? 지, 지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