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렉 시리즈에는 주역 중에 비인간으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캐릭터들이 하나씩 등장한다. TOS의 스팍, TNG의 데이터, DS9의 오도, VRG의 세븐오브나인. ENT는 내가 안 봤으니 패스. 이 캐릭터들은 또한 대개 그 시리즈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개' 그렇다는 것이다. 다른 셋은 스타트렉 팬덤 내에서 막강한 인기를 자랑하는 모양인데 상대적으로 오도의 인기는 약한 모양이다. 왜 그럴까? 마음만 먹으면 그 쿼크도 지옥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주제 키라 앞에만 서면 꽁꽁 어는 이 외계인이 내 눈에는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던데? 파운더가 왜 알파분면 정복까지 뒷전으로 해가며 오도를 못 데려와 안달인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능 왜 오도는 '계보'의 캐릭터들보다 인기가 덜할까?

다시 인기쟁이 캐릭터 셋으로 돌아가보자. 스팍, 데이터, 세븐오브나인은 각각 인간+벌컨 혼혈, 안드로이드, 인간 출신 보그이다. 스팍과 세븐은 각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비논리성과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논리적이고 효율적이고 우월한 능력으로 당면한 과제를 해결한다. 데이터는 물론 안드로이드니까 논리적이고 효율적이고 우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인간이 되고 싶어하기에 비논리성과 비효율성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지적하진 않는다. 이들에게는 주위에 인간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보여주면서 착실하게 인간교육을 시켜주는 인간들이 있다. 스팍에게는 맥코이(커크는 오히려 이런 점에서는 방관하는 편이다. 맥코이야말로 스팍을 인간 만들지 못해 안달이지... -_-;), 데이터에게는 피카드 이하 모든 엔터프라이즈 승무원들, 세븐에게는 제인웨이와 닥터가 있다. (심지어 닥터는 연방의 저작권법 해석까지 뜯어고친 홀로그램이다. 인간이 아니라고! -_-;;;) 자신의 절반을 억누르고 온리 벌컨을 외치는 스팍이나 본래 인간이었던 세븐의 경우에는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긴 하다. 실제로 안드로이드가 진화하면 로어처럼 될 것 같지만, 어쨌든 데이터의 경우에는 '착한 인간'이 되길 본인이 원했다. 그 결과는? 스팍은 영화 시리즈까지 가자 벌컨과 인간의 균형을 잡아냈고, 데이터는 인간보다 인간적이라는 평가를 얻어냈으며, 세븐은 인간성을 회복했다. 이들 세 캐릭터는 '인간'과 '인간화'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미 한 발을 딛은 데서 시작했으며 그 '인간' 시청자들의 마음을 빼앗는 데 성공한다.

이제 오도로 돌아가보자. 감마 분면에서의 그는 도미니언 제국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체인즐링이지만, 알파 분면에서의 그는 사고무친 혈혈단신 미지의 표본에서 출발해 공포와 증오를 자아내는 형체변형족으로 규명된 존재이다. 그에게는 앞서 언급된 세 캐릭터와 철저하게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그는 자신이 뚝 떨어진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인간형에 가까운 모습을 취하고 인간에 가까운 사고를 하려 하지만, 데이터가 원하던 것처럼 절실하게 인간 내지 인간형이 되길 바란 적은 없다. 그는 자신이 체인즐링이라는 걸 모르던 시절에도 그것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그의 주위에는 이런저런 참견을 하며 인간화 교육을 시키는 인물이 전혀 없다. (키라는 아예 체인즐링답게 살라고 보내주려 하기까지 했다)

또 다른 체인즐링인 라아스가 인간형 종족인 오도의 친구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불편하다. 다른 동네에서는 신인 존재가 여기에서는 일부러 열등한 인간(형 종족)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맞춰주고 있는 거라고? 그들은 태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증오'하기 때문에? 체인즐링으로서의 오도는 존재 자체로 인간의 '한계'를 쿡쿡 들춰낸다. 그는 인간화될 가능성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인간'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은 세 캐릭터들에게서 기대되던 어떤 것- "인간에 가까워졌쪄여? 참 잘 했쪄요~" 이 기분을 오도에게서는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계보'로 언급되는 캐릭터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것을 바랐던 사람들이 짜게 식어버린 건 아닐까. TOS 최초 파일럿의 '넘버 원'이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에 바로 잘린 것처럼, 우리에게 내쳐진 게 아닐까. 내 생각에 스팍과 데이터의 뒤를 잇는 계보는 곧바로 세븐에게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맞다. 굳이 DS9에서 그 계보에 이름을 올리려면 쿼크네 가족들 정도일까. 오도는 그 계보의 인물들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며 그들과 같은 기대를 받을 이유도 없었다.


DS9에서 4시즌이 시작할 무렵이던가, 쿼크와 게렉이 연방에 대해 나누던 잡담이 생각난다. 연방은 어떤 종류의 술과 같아서 처음에는 메스껍지만 맛을 볼수록 중독되어 빠져나올 수 없게 되더라고. 또한 그들의 것을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달콤하게 다가오더라고. 그리고 페렝기 식의 삶을 버린 롬과 노그가 생각난다. 그들은 페렝기 사회에서 낙오자에 불과한 자신들이 연방에서는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위치를 택했다. 그들의 삶은 행복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페렝기가 페렝기이겠는가. 연방 소속으로 일하게 된 후로는 페렝기 음식이 아니라 연방의 음식, 더 정확히 말해 지구의 음식을 찾는 롬을 나는 개그로 받아들일 수 없다. 페렝기 문명의 종말! 쿼크의 한탄은 예언이 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연방'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기 소속된 벌컨, 안도리안, 오리온, 볼리언 등등이 아니라 지구라는 것이다. 연방화는 미국의 제국주의 뿐 아니라 모든 지적생명체의 인간화에 대한 판타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것일까.
엘프가 숲을 걸으면 그 엘프는 숲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걸으면 길이 생긴다. <드래곤라자>에 적힌 이 문장은 인간의 자기본위적인 면을 지적한다. 인간은 주위의 환경에 순응하는 대신 주어진 위치를 박차고 나와 자연을 정복하려 했다. '문명'이라는 것은 마른 땅이 아니라 범람지에 살기 위해 치수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엄청난 풍요를 가져왔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동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적생명체를 만났을 때 그 존재와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될 것인지 상상하는 이런 작품들을 볼 때면 씁쓸한 맛이 남는다. 우리는 상대방을 억지로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깎아내고 다듬지 않으면 도무지 대화란 걸 할 수 없는 존재인 걸까.





p.s. 역시 키라는 영웅이다. 그녀의 용기와 지혜는 베이조와 카다시아를 독립시켰고 그녀의 사랑은 은하계의 절반을 구했다.(...) 키라가 오도와의 관계에서 그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좀 더 가슴에 와닿는 묘사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DS9의 민간인들은 은연중에 오도-체인즐링을 두려워하는 데가 있지만 시스코 이하 간부들은 처음부터 그 점에서 좀 더 진보적이었다. (DS9의 사령관이자 주인공인 시스코가 흑인이라는 설정 때문에 간부들의 태도에도 그런 인자가 삽입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때문에 키라라는 '인간(형 종족)'이 오도라는 '체인즐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굉장한 건지, 화면만 쳐다봐서는 당장 와닿지가 않는다. 모든 배경을 걷어치우고 보면, 결론이 정열녀와 순정남 사이의 연애라는 의미로만 수렴되면서 당연하고 진부하게 보일 테니까.; (사실 나도 이 잡문을 끄적이기 위해 7x14 Chimera를 복습하면서 겨우 깨달았다;;;)
뭐, '다르다'는 것에 좀 더 의미를 부여했어도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겠지. 누가 그런 주제를 좋아하겠나. 우리는 심지어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다리 사이에 달린 것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싸울 수 있지 않던가.

p.s. 2 나는 여전히 스팍이 좋아. 하지만 드라마로서는 딥스페이스9이 최고인 것 같아. 웜홀 외계인만 뺀다면. o>-< 이 드라마는 기존의 스타트렉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탓에 욕을 먹기도 했지만 그만한 값을 한다고 본다. 그리고, 스타트렉이니까 가능했던 작품이라고도 생각한다. 독립된 드라마였다면 10년 후에나 나올 수 있었겠지. 흑인 주인공에 인간의 이해를 확실하게 초월해주는 매니악한 취향의 주역이라니. DS9은 6x13 Far beyond the stars로 대표되는 것처럼 이 '다르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도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베이조와 카다시아의 갈등이나 도미니언과의 전쟁이 워낙 굵직해서 살짝 가려지는 것도 같지만.

p.s. 3 싸이클럽에 이 글을 올리니 본문출처라며 저절로 링크가 뜨누나. 내 글 맞고 이 블로그 드러나는 건 싫은데, 그렇다고 스타트렉 커뮤니티에 올린 스타트렉 글을 지워야 하나? 싸이에서 불펌질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런 걸 강제적으로 실시하나 싶다. -_-;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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