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화에는 칙칙한 잡담을 하리라.
콘마는 베이조의 피지배기간 동안 가장 극렬한 무장투쟁집단으로 알려져왔으며 베이조가 독립한 지금도 카다시아와 베이조에서 테러를 벌이고 있다. 콘마의 일원인 타나 로스는 베이조가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선 카다시아 뿐 아니라 연방도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베이조에 외세를 불러들이는 요인이 웜홀이라고 본 그는 폭탄을 제작해 웜홀 붕괴를 시도하지만, 키라와 시스코에 의해 저지된다.
-나는 스타트렉에 베이조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베이조와 카다시아의 악연은 TNG에서 이미 묘사되었고, 그걸 심화시킨 게 DS9의 중요한 줄거리 중 하나를 이룬다. 식민지배를 당한 민족과 식민통치를 했던 민족의 관계라. 이게 왜 재미있냐면, 트렉의 제작자와 시청자의 태반이 미국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동네가 언제 식민지배를 당해봤던가? 물론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소위 WASP라던가 지금도 고귀한 혈통으로 취급해주는 집안들을 보면 영국인의 후손들이 주를 이루는 땅이다. 애초에 미국땅에다 처음으로 마을을 건설한 유럽인들은 엘리자베스1세가 정책적으로 보낸 영국인들이었다. 그런 동네를 영국이 아일랜드 다루듯 대했을까? 미국이라고 아일랜드처럼 그쪽을 증오했을까? (멜 깁슨의 <패트리어트>를 볼 때 가장 의아했던 점이다) 조지 워싱턴은 한때 국왕 폐하 만세를 당당하게 외쳤던 사람이며 아무도 그걸 뭐라 하진 않는다.
해서, 카다시아에 대해 (키라로 대표되는) 베이조의 태도가 변해가는 과정을 보다 보면 이것이 피지배를 겪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지배를 했거나 적어도 피지배를 당하진 않았던 양인들의 관점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 때가 있다. 물론 키라가 겪게 될 경험들이나 변화의 과정들은 자연스럽고 괜찮은 플롯을 따라가며 시청자가 보기에 긍정적이다. 배우가 워낙 연기를 잘 하기 때문에 어색한 부분도 없다. 다만 내가 대한민국에서 중고등학교 내내 배운 6차 교육과정의 국사, 그리고 그 이외의 교과목시간과 집, 신문, 뉴스, 기타 접할 수 있었던 모든 매체를 통해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내면화되다시피 교육받은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살짝 허전할 때가 있어서 그렇다.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드는 이유는 사실 딱 하나다. DS9에서는 식민지배 이후 베이조인들이 그들 안에 남은 식민통치의 잔재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부역자를 아주 안 다루는 것은 아니다. 2x24(Collaborator)에서는 엉뚱하게도 베덱 버라이얼이 말려들어 키라의 속을 썩힌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망있는 버라이얼이 아니라 여시같은 윈이 카이가 되어 앞으로 시스코와 키라의 속을 적잖이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부가된 설명 같은 것이지 에피소드 하나를 확고하게 붙잡는 중심적인 화제로 다뤄진 것 같진 않다. 요컨대, 미국인이 제작하고 미국인이 주로 보는 이 가족 드라마에서는 2x05(Cardassians) 같이 인도적인 관점에서 다루기 때문에 시청자가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나 6x17(Wrongs darker than death or night)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묘사할 수 있어도 '현재' 베이조가 어떻게 식민잔재를 다루는가 - ex) 프랑스는 비시정권에 봉사한 자국인들을 어떻게 다뤘을까 ㅋ - 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한 회피할 거란 이야기다. 사실은 그것이 식민통치를 경험한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데.
하기야, 즐거우려고 드라마 보고 돈 벌려고 드라마 만드는데 주 시청자가 관심 없고 거북해할 주제를 제작진이 굳이 다뤄야 할 의무는 없다. 게다가, 이건 다큐나 사극 같은 게 아니라 스타트렉이라고. -_-a
-위 잡담을 늘어놓은 이유는 콘마 때문이다. 보아하니 독립한 후에도 테러를 저지르고 다닌 모양인데, 그들의 방법론이 선에서 벗어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카다시안도 아니고 같은 베이조인의 목숨으로 협박해? -_-; 게다가 당장 베이조에 외세를 들이지 않기 위해 훗날 엄청난 번영을 줄 웜홀을 날려버리겠다고 나서는 것도 대인배의 태도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이 조직의 행동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내에서 현실적이란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있을 법하다는 이야기다. 문서상으로 점령은 끝났다. 물리적으로 카다시아는 물러갔다. 그런데, 베이조인들에게 있어 '점령'이 끝난 것일까? 어제까지 총칼 들고 싸우던 사람에게 정치인이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
독립전쟁은 끝났다. 세상은 변했고, 총칼에 익숙한 사람이 농기구에 익숙해져야 할 시대가 되었다. 외세나 반대세력을 대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도 무력과 테러가 아니라 말과 펜과 투표용지를 사용해야 할 때가 되었다. 키라는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이런 변화를 그럭저럭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콘마가 보기에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식민통치기에는 카다시아가 적이었고, 지금은 베이조에 간섭하려는 모든 외세가 적이다. 그들의 테러와 극단적인 무력행사를 정당화해주던 '독립투쟁'이란 대의명분은 적어도 그들 안에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누군가가 요즘 대학가 운동권에 대해 빈정거리는 것처럼 커다란 명분을 잃었는데도 무장(권력)을 해제하고 싶지 않아 벌이는 뻘짓에 불과한지, 아니면 정말로 애국한다는 생각으로 벌이는 짓인지는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드라마 내에서 다뤄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식으로 배경을 설명하려는 말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50년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이다. 그 세월 동안 피지배를 경험한 사람들이 외부에 대해 편집증에 가까운 두려움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예순을 넘긴 노인들만이 베이조가 상처없이 자유롭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고, 그 중에서 피지배기간의 열악한 환경을 겪고도 살아남아 지금의 베이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 베이조의 부흥을 담당한 세대는 무엇이 진짜 '독립'이며 어떻게 해야 독립을 지킬 수 있을지 거의 알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다. 여기서 한 선택 때문에 키라가 매국노 소리를 듣는 것이 베이조의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다가오는 한, 이것은 끝나지 않는 문제이다. 콘마는 식민통치를 경험한 베이조가 반드시 정리해야 할 숱한 잔재 중 하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근데 위와 같은 이유에선지 슬금슬금 넘어가버리더니 키라와 시스코는 사이가 급격히 좋아지고 정거장에는 평화가 찾아오는구나. -_-;
-내가 키라를 아무리 좋아해도 짚을 건 짚어야지. 정규군이 아니라 게릴라로 활동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만, 명령계통을 무시한 건 확실히 잘못한 거였어. 결과적으로 시스코가 대인배스럽게 다 덮어줬으니까 망정이지 보통의 뻣뻣한 군인이었으면 속에 담아뒀거나 당장 내쳤을지도. -_-;
-1시즌은 카다시아가 베이조에서 물러난 직후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1x01, 1x02에서 잠시 DS9에 왕림하신 걸 두캇은 "2주일 전에 이 사무실은 내것이었음 -ㅅ-" 이라며 확인도장을 찍어주었다. 여기서 잠시 의문. 키라와 오도는 이 시점에서 이미 절친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도는 4년 전부터 DS9에서 일했지만 키라는 시스코가 베이조인을 부사령관으로 요구하면서 불려온 상황이다. 1x03이 실제로는 1x04 다음에 촬영된 거라는 걸 잠시 접어두더라도 키라가 DS9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리란 점은 명백하다. 그럼 대체 어느 틈에 흉금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사이가 된 건가? DS9 뿐 아니라 트렉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비사교적이고 비사회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반드시 한 손 안에 들어갈 오도와, 이 당시에는 카다시아에 대항해 같이 싸운 베이조인이 아닌 한 일단 경계부터 하고 보던 키라가 어떻게 친구가 된 건가? 심지어 오도는 베이조인은커녕 일반적인 휴머노이드도 아닌데?;;
2X08(Necessary Evil)은, 어쩌면 이것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 제작된 에피소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정할 경우 키라는 당시 어찌 됐든 두캇 밑에서 일하던 오도가 독립투사인 그녀를 풀어줬다는 아주 짧은 인연 하나를 여태까지 기억하고 믿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알던 거지만, 역시 정이 많구나. 그럼 번잡한 인간관계를 싫어하는 오도가 기꺼이 키라의 친구로서 별별 푸념을 다 들어주게 되기까지의 배경이 궁금한데...
................................생각하지 말자. 오도가 땅을 파고 쿼크가 우쭈쭈쭈 해주는 건 적어도 이 때는 아니었다고.;;;
-그리고, 사실 DS9 전체를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 때로는 수상쩍은 재단사, 언제나 뻔뻔한 거짓말쟁이 개랙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_-! 본래 개랙은 이 에피소드에만 쓰일 단역이었지만 배우 앤드류 로빈슨의 연기와 캐릭터를 본 제작진이 계속 등장시키기로 결정했다 라던가. 현명한 판단이었다. -_-b 한편으로 개랙이 말 한 마디 걸어준 걸 가지고 자기만의 판타지에 빠져 옵스에서 방방 뛰어다니는 바시어는... 바시어가 007 놀이를 너무너무너무 좋아하게 된 것에는 필시 개랙의 영향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눈 앞에 진짜 공작원이었을거란 추측이 공공연히 나도는 사람이 있는데(게다가 그게 사실인데) 상상력과 자의식이 풍부한 바시어가 가만 있을 수 있겠나. 이런 애를 어른 만드느라고 우리의 칩이 정말 고생이 많았다. -_-
-그리하야, 콘마 이야기를 하려다 실없는 잡담이 억수로 길어졌는데...
다음부턴 분량을 줄이는 쪽으로 컨셉을 잡아볼까? 제대로 아는 게 별로 없는 내가 자꾸 말을 길게 하면 반드시 실수하는 부분이 있을 터라, 잡설 늘어놓는 게 즐거우면서도 초큼 겁나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