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귓불을 샅샅이 긁어주갔어!
페렝기 사회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인물인 그랜드 내거스 젝이 DS9을 방문한다. 그의 목적은 페렝기 사업가들이 감마 분면에 진출하도록 계시를 내리고 은퇴하는 것. 회의 자리에서 젝은 후계자로 쿼크를 지명하고, 휴식 중 돌연 사망한다. 새 그랜드 내거스가 된 쿼크는 암살위협에 시달린다. 결국 롬이 암살자 중 한 하나라는 게 밝혀지고, 후계자를 시험하려고 죽은 척 했던 젝이 돌아옴으로써 소동이 끝난다.
노그는 젝의 눈치를 본 아버지 롬의 명령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제이크는 노그를 위해 어른들 몰래 공부를 도와준다.
-DS9의 페렝기 에피소드는 대체로 개그를 지향하기 때문에 내용이 가벼운 편이다. 그것이 캐릭터간 개성의 충돌이나 주어진 상황 때문에 웃기는 거라면 좋겠지만, 페렝기라는 종족 자체를 희화화해서 억지로 웃음을 끌어내려는 경우가 보다 많은 듯하다. 해서 나는 페렝기 에피소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황야의 페렝기와 쿼크의 가족사는 제외!)
이번 에피소드는 DS9의 그 페렝기 에피소드 중 첫번째 것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에 처음에는 곧바로 1x12(Vortex)로 넘어갈까 했지만, 복습해 보니 이번 에피에도 잡담할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로, 이 에피소드에서는 페렝기가 실제로 어떻게 사회를 꾸리고 굴려가는가에 대해 얼마간 엿볼 수 있다. (TNG에서는 조그맣고 사악한 협잡배로나 등장하던 페렝기가 다소 명예회복을 하게 된 것은 다 인트로에도 이름을 올리는 '주연' 쿼크 덕분이겠지. 페렝기는 쿼크한테 공로상이라도 줘야 한다는) 둘째로, 앞으로 페렝기 사회가 전통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변할 것이란 암시가 여기서부터 벌써 슬그머니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듀나 씨네 게시판에 페렝기 신조를 올려 놓았던데, 거기 달린 감상들을 요약하자면 "ㅁㅂ은 까야 제맛"으로 귀결되었던 것 같다. 이 ㅁㅂ에 중성 종성을 잘못 달았다가 방송에서 사고친(사고였을까? ㅋ) 김기계처럼 되진 말자. -_-* 네 돈은 내 돈 내 돈은 내 돈 돈이 가족과 건강과 친구와 행복보다 소중함 약자 따윈 착취해버려 ㄲㄲ 라고 대놓고 강변하는 페렝기 신조는, 그래봤자 등장만 했다 하면 주인공들에 대해 음모를 꾸몄다가 어떤 식으로든 망신을 당하고 쫓겨날 페렝기의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블랙유머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트렉과 페렝기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우리 시대 천민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얼굴이 자연스레 연상되면서 (우리가 사는 곳이 자본주의 사회니까) 수긍은 가나 혐오스럽다는 반응이 나오는 모양이다.
페렝기는 미국의 자본가들을 트렉 버전으로 옮겨놓은 종족이다. 그들은 이득만 얻을 수 있다면 태연히 범죄를 저지르며 아동과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19세기의 남성 자본가보다 나을 게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트렉의 지구인들은 과감히 화폐경제를 포기하고 윤리적 의식적으로 진보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의 관계는 쿼크가 후에 빈정거린 바 "우리에게서 댁들의 야만적인 과거를 보기에 우리를 혐오하는" 상황이다. 모든 페렝기 중에서 시청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을 쿼크조차 DS9의 모든 인물들로부터 은근히 무시당하곤 한다. 대등하게 봐주는 것은 만사에 관대한 잣지아 정도일까. (음, 오도는 페렝기라서가 아니라 쿼크라서 무시한다는 걸 적어두고 ㅋ) 쿼크의 평소 행실을 보면 자업자득이긴 한데, 가끔은 단지 페렝기라는 것 때문에 받아야 할 것 이상의 모멸감을 받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1x11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페렝기의 특징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준다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 목적은 대개 래티넘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신분상승이었다. 어리숙하기 때문에 늘 친형인 쿼크에게 구박을 듣고 착취(!)당하는 롬은 웬일로 큰맘 먹고 형을 살해하려 했더니 그 형한테 페렝기답게 행동했다고 크게 칭찬을 들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당당하게 떠벌리는 작자들도 정작 본인이 목적의 희생물이 되면 안색을 바꿀 텐데, 이런 점에서는 페렝기들이 정말 철저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에서는 노그가 정통 페렝기와는 다른 길을 향해 슬그머니 걸음을 떼고 있다.'윤리'같은 것을 강조하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것은 페렝기답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노그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서도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 어른들이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라 그랜드 내거스 자리를 놓고 법석을 떨 때 정거장 구석에서는 노그가 페렝기 가치관에 대한 반역일 수도 있는 행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페렝기 사회는 이 무렵에 이미 연방의 물이 들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제작 당시 제작진이 그런 의도를 깔았을 것 같진 않다. 제이크가 인간과 페렝기의 문화 차이를 뛰어넘어 노그와 긍정적인 의미에서 어울리는 걸 보고 미소짓는 시스코를 보여줬으니까.) 경쟁이 본질을 이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패배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사회 외부에 존재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사회 외부로 나갈 것이다. 제작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페렝기 사회는 처음 트렉 세계에 소개된 순간부터 롬과 노그, 그리고 나중에 소개될 이쉬카 같은 반역자가 생길 환경을 내포하고 있었다. (..근데 왜 그 반역자들이 죄다 쿼크네 가족들이냐?;) 문제는, 그들이 취하려는 새로운 페렝기의 모습이 대부분 연방의 가치관을 모방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페렝기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근본부터 뒤흔든다는 것이다.
(음, 이쉬카의 경우는 좀 다르구나. 그들이 골수까지 태생적인 자본주의자라면 여자는 당연히 사회생활을 시켜야 할 '노동력'이다. 그 사회생활 가운데 차별이 나타나야 하는 거지. 인구의 절반이 일을 안 하고 집안에서 시중만 든다는 게 말이 되냐?; 즉, 이쉬카의 반역질(?) 같은 경우에는 연방의 가치관과 상관없이 페렝기 사회가 의당 겪어야 할 변화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저 변화하는 페렝기들 중에서 연방과 직접 접촉이 없는 인물은 이쉬카 뿐이기도 하고.)
하나의 문명이 뿌리뽑힐 때는 경제와 문화의 힘이 무력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한다. 케이코나 제이크는 악의가 전혀 없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의도가 선하기 때문에 더 강력하다. 어느 순간부터 연방에서 가르치는 사상과 과학이 연방에 속하지 않은 종족에게도 당연히 진보된 것, 배워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누가 알겠나. 1세기 쯤 후의 베이조에는 "니들한텐 웜홀 외계인이지만 나한텐 신님임 내 믿음으로 충분함 끗"이라고 쿨하게 말할 수 있는 키라 같은 사람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도미니언 전쟁이 끝날 무렵에 롬이 엄청난 신분상승(!)을 겪으니 1세기 후의 페렝기나르에서는 사회주의 비슷한 것이 유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믿음이 없는 베이조인과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페렝기라고??
트렉은 어디까지나 20세기와 21세기를 산 지구인들이 상상한 작품이다. 그 안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뿐이란 이야기다. 베이조나 페렝기가 연방의 문명과 상관없이 겪어야 할 진짜 진보의 단계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아나. 다만, 같은 지구 안에서 같은 시대를 살기 때문에 우주 저편에 사는 외계인보다는 가치관과 정체성이 보다 가까운 '인간들' 사이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회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겠지. 프라임 디렉티브는 정말 까다로운 개념이다.
-시스코는 베이조에 있는 '불의 동굴'을 언급했다. 작가가 생각없이 집어넣은 것일까, 아니면 아무튼 최종결판을 생각해두고 집어넣은 것일까.
그보다도, 내가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시스코 같은 아버지상이 참 생소하다. 하나뿐인 아들놈이 아버지와 친구 중에서 고르라면 친구놈 편을 들 거란 걸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놈과의 관계변화를 깔끔하게 받아들이다니. 혹시 사춘기 적이 부모와 충돌한 기억 밖에 없는 사람은 나뿐인가?; 가만 보면 트렉의 역대 함장들 중에서 유일하게 가족관계가 원만한(원만한 정도가 아니라 3대가 무지 친밀한)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다, 시스코가 인물은 인물이야.
-모온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사를 쳤다! 그것은, 그것은......!
"HAHAHAHAHA~!" ......-_-
-여기서 젝의 아들이자 차기 내거스 후보로 소개된 크랙스는 별 임팩트가 없었던 탓인지 이후로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저 사아칸 브런트는 크랙스를 대체하는 캐릭터였을지도. 브런트 보고 싶다. 웨이윤 보고 싶다. >_<
참. 브런트와 웨이윤은 같은 배우가 연기했습니다. 진짭니다.(...)
Posted by 양운/견습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