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제갈량전 참고)>
중평(184~189) 말 살인 저지르고 도주. 잡혔다가 일당에게 구출된 뒤 학문으로 전향. 학문하는 과정에서 같은 영천군 출신인 석도와 친해짐. 더러운 영천 인맥!
초평(190~193) 중 중원에 난리가 나자 석도와 함께 남하, 형주로.(이때 어머니를 모시고 갔겠지?)
연대를 보면 제갈량보다 못해도 10살 이상 연상이라 여겨짐.


제갈현>
제갈량전 : 원술이 예장태수 임명, 이때 애들 데리고 부임. 동시에 조정이 주호를 임명하자 평소 교분이 있던 형주목 유표에게 의탁.
헌제춘추 : 유표가 예장태수 임명. 나중에 정식임명된 주호가 양주태수 유요에게 군사를 빌려 공격. 제갈현은 물러나 서성에 주둔했고, 197년 정월 서성의 백성들이 반기를 들어 제갈현을 죽였음.

서성이 어디여? 그보다 왜 두 사서의 말이 달라?


착융>
유요전에 인용된 헌제춘추 : 당시 주호는 유표가 등용한 태수 제갈현과 대립 중이었음. 유요가 착융을 보내 주호를 돕게 했는데 엉뚱한 주호를 죽이고 군대 빼앗음.


원술>
동탁이 소제 쫓아낼 때 원술은 형주 남양군으로 도주. 당시 원소 및 형주자사 유표와 사이 안 좋아 공손찬과 교류.(유표가 형주목 된 건 이각 곽사가 장안에 들어간 193년 이후의 일) 유표가 군량수송로 막은 탓에 진류 침입(193년 봄)했다가 조조 원소 연합에 격퇴 당함. 패잔병 데리고 양주 구강군으로 도주(193년 여름 이전의 일. 이상 연대는 무제기), 양주 지배.(양주자사 갈아치움. 이전의 양주자사를 원술이 죽였는가에 대해서 배덕후가 태클을 걸었고, 자치통감은 배덕후의 썰을 따라 그 일에 관해선 원술의 무죄 선언)


유요>
조정으로부터 양주자사로 임명한다는 조서를 받을 당시 원술이 회남(양주 여강군? 회남이 어디지?)에 있었음.(193 이후) 유요는 원술이 두려워 감히 양주에 가지 못함. 유요가 장강 남하해 곡아에 머물 때 원술이 황제 참칭할 준비 하며 여러 군현 공격. 유요는 장강을 사이에 두고 원술에 대항. 원술이 곧 스스로를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1년 넘게 유요와 싸움. 조정은 유요를 양주목으로 임명, 그러나 손책이 강동으로 투입되어 패주.(194) 장강 남쪽으로 계속 가다가 예장을 지키려는 생각에 팽택 주둔.(195) 이 일과 연장선상에서, 유요가 보낸 착융이 먼저 예장에 도착해 당시 예장태수 주호 살해.(197) 으잉? 이 부분은 연대를 다시 찾아봐야겠는데. 뭔가 안 맞아...



제갈현을 예장태수에 임명한 건 유표가 아니라 원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서 유요전에 인용된 <한기>에서 허소가 유요에게 한 간언을 보면, 원술에게 패해 달아나는 유요더러 예장으로 가 조조나 유표와 연합하자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장에서 제갈현과 주호가 대립 중이었고 유요는 결국 주호의 편을 들었다. 주호가 조정에서 보낸 정식태수라지만, 제갈현이 유표의 사람이었다면 쉽게 주호를 편들긴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여포와 싸우느라 바쁘던 조조가 남쪽까지 내려와 예장을 구해줄 리 없으니 결국 바로 옆의 유표와 연합해야 하는데 유표가 보낸 사람을 쫓아내서야 그게 되겠는가. 뭐, 197년 봄 조조한테 한방 먹이고 도망친 완의 장수가 유표한테 의탁한 걸 보면 이때 유표는 이미 조조와 불화 상태였다. 그럼 유요는 조조와 유표 중에서 택일해야 했으리라. 그런데 유요는 당시의 대세를 따라 원교근공할 여유가 없었다. 바로 옆의 원술 하나를 어찌 못 해보고 도망친 처지 아닌가. 그럼 가까이 있는 유표와 친해져야지 당장 상대해야 할 적을 더 늘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유표의 이후 행보를 보면 형주땅 전체를 자기 것으로 수복하는 데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그 바깥으로 나가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없다기보다, 소극적이었다. 그런 인물이 양주땅에 욕심을 낼 리가 없다. 친분 때문에 태수로 천거한 거라면 당연히 제갈현 쪽이 정식으로 임명되어야 한다. 역시 제갈현은 원술이 임명했을 듯.

제갈량전과 헌제춘추를 종합해 짜깁기해볼 수는 있으리라.
원술의 첫 근거지는 형주의 남양군이다. 당시의 형주자사는 일단 유표지만 형주 전체에 유표의 지배가 미치진 못했으니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서주의 난을 피해 도망친 제갈현은 남양, 남군, 강하 같은 형북 쪽의 형주땅에 잠시 지내면서 원술과 유표 양쪽과 친교를 맺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원술은 사세삼공의 명문세족이었고, 유표는 황실친족에 팔준의 하나로 칭해지던 잘 나가는 명사였으니까. 그 시기에 제갈량의 누이들이 형주의 쟁쟁한 호족집안인 괴씨, 방씨와 혼인했겠지. 서주에서 도망친 난민이라지만 제갈씨, 그냥 평민은 아니었다.
원술이 제갈현을 예장태수에 임명한 것은 양주로 쫓겨 간 후이리라. 후한말 군벌들은 먼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 부하를 선 임명하고 조정으로부터 추인받는 식이었다. 원술에게 패해 도망친 유요가 예장을 지키자고 생각한 걸 보면 당시 양주 예장군은 원술이 완전히 세력을 뻗은 지역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땅의 태수가 죽자마자 원술이 선수를 쳐 자기 사람을 보낼 법하다. 그 직후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태수가 내려왔지만 양자의 대립 자체는 길지 않았다. 따라서, 제갈현이 예장에 임명된 건 196년 중엽 이후라 여겨진다.
그럼 제갈현은 왜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나. 원술은 197년에 칭제했다.(197년 봄. 효헌제기) 칭제하려는 의사 자체는196년 겨울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때문에 제갈현을 역신의 신하라 여긴 백성들이 난을 일으킨 거라 볼 수도 있다. 제갈량전의 기술을 따른다면 제갈량과 제갈균은 숙부 따라 예장에 갔다가 숙부가 살해되자 다시 형주로 돌아가 융중에 틀어박혔다고 상상해봄직하다.
고1, 고2 나이에 대체 무슨 일을 보고 겪은 건가, 승상은....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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