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잠깐 생각해 보니 류지킬&김엠마는 7년 전의 류라울&김크리잖아. 갑자기 웃음이 마구마구 쏟아지네 그거. 푸핫. -_-;;;
나는 원작소설은 아직 읽지 않았으며 뮤지컬로서도 이번이 처음이다. 때문에 스토리를 따라가느라 바빴으며, 가사는 거의 기억하지도 못한다. 한 번 들은 걸로 극을 다 외우는 건 기타지마 마야 하나로 족하지 아니한가? -_-; 어쨌든, 내 최초의 <지킬 앤 하이드> 후기는 그런 상황을 바탕으로 적는 것임을 전제한다.
전제대로, 극 내내 스토리를 따라가느라 힘들었다. 나중에 내용을 음미하며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듯 중간중간 설명 없이 뛰어넘는 부분이 많았던 탓이다. 다른 부분들은 무난하게 그러려니 넘기고 본줄기에 다시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지킬은 하이드가 루시를 죽이려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던 걸까?
하이드는 왜 루시를 죽인 걸까?
전자의 경우는 지킬이 하이드의 기억을 공유한다고 전제하면 설명될지도 모르겠다. (루시가 치료받기 위해 찾아왔던 날 그 상처를 보고서야 하이드가 저지른 짓을 알게 된 걸 보면, 지킬과 하이드가 기억을 공유하는 건 적어도 초기에는 부분적이었던 듯 싶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하이드의 인격이 강력해지니 어느 정도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후자의 장면을 보면서 나는 전자의 경우가 단순히 그 이유 뿐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루시는 지킬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엠마는 상류층의 여식으로, 그녀와의 교제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며 명예롭게 보호되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는 거리의 여자이며, 그녀와의 교제는 하류층을 쌍것 취급하는 사회에서 한갓 젊은 남자의 장난 정도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엠마에게는 누구나 예절을 지키지만 루시에게는 누구도 동등한 인간 대접조차 하지 않는다. 지킬은 상류층의 그런 위선적인 태도를 역겨워하며 루시에게도 신사답게 행동했더랬다. 루시가 다른 남자들에게 하던 대로 대시해오는데도 손을 대지 않은 것이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지킬은 자신 역시 상류층에 속하지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상황에서 그녀에 대한 나름의 정절(?)을 지키는 낭만적이고 순진한 남자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킬은 하이드가 된 후 가장 먼저 루시를 찾아갔다. 하이드는 지킬과는 반대되는 인격이니 여러 여자를 범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토리상 하이드는 다른 여자도 찾은 게 아니라 루시에게만 이런 관심을 보였던 듯 하다. 그렇다면, 지킬이 루시를 욕망하긴 했지만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선(善일 수도 있고, 線일 수도 있다)을 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신사답게 행동해왔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이드는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에 지킬이 드러낼 수 없었던 욕망을 실현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 하이드는 지킬이 헨리 지킬의 가면을 쓴 동안에는 드러낼 수 없거나 스스로 절제(또는 단념)해버린 욕망에 충실한 인격이다. 지킬은 엠마와 루시 모두를 원하지만 그가 표방하는 신사다운 인격은 한 여자만을 택하고자 할 것이고, 그런 지킬에게 있어 또다른 자신이 이미 범해버린 루시는 엠마를 선택해야 할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의 짐으로- 정확히는, 엠마와 루시 양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상류층의 다른 젊은이라면 거리의 여자 쯤이야 총각파티 치른 셈 치고 잊어버리겠으나 지킬은 그 정도로 뻔뻔하진 못하다. 기껏 생각해 내는 게 루시더러 런던을 떠나 다른 삶을 살라고 하는 정도니까. 게다가 엠마에 대한 죄책감이야말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루시를 죽이는 건 지킬 본인의 욕망이었던 게 아닐까? 하이드가 루시를 죽이려 한다는 걸 지킬이 미리 알았던 것은 바로 본인이 루시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킬은, 자기 손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그 욕망을 하이드가 해결하도록 소극적으로 떠맡겨버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마지막 장면도 뭔가 다르게 보였다. 하이드는 왜 하필 결혼하는 그 순간 튀어나왔는가? 그동안 어둠 속에서 반대자들을 제거해 정체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그가 왜 백주대낮에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그것도 엠마가 보는 앞에서 마지막 반대자를 죽인 것일까? 어터슨이 칼을 빼든 장면을 떠올린 순간 내 머리속에서 번개가 쳤다. 어터슨은 지킬이 하이드라는 걸 아는 유일한 인물이며, 만약의 경우를 위해 칼을 준비할 정도로 그 위험성을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지킬은 끝내 자신의 내부에서 하이드를 지우지 못했고, 하이드로서 행한 일들을 묻어버린 채 엠마와 결혼하는 것 또한 성격상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킬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아직 한 사람 남아있던 반대자는 지킬의 친구이기도 했다. 다른 반대자들을 몰살시키는 동안 하이드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지킬에게 주저하는 마음이 더 강했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를 죽이고 엠마의 목숨까지 위협한다면, 만일을 위해 칼을 준비할 만큼 결단력 있는 어터슨은 하이드를 제거해 줄지도 모른다. 즉, 지킬을 죽여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킬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닐까? 비록 마지막에는 어터슨의 칼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결단을 내렸지만, 그 직전까지는 어터슨이 죽여주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루시의 일도 자기 손으로 정리하지 못해 하이드에게 떠맡긴 인물이다. 자신의 죽음조차 하이드를 통해 타자가 처리해주길 바랐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킬은 결자해지는커녕 그렇게 하려는 의지조차 부족한 인격이었다! 더 나쁜 것은, 지킬과 하이드의 죽음만으로는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들을 하나도 정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었고, 엠마는 지킬의 부정을 모른 채 홀로 남게 되지만, 지킬은 그런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죽음을 통해 도피해 버렸다. 여타 상류층의 남성들과 달리 가장 훌륭하게 사회화를 마친 신사 지킬이 그 사회적인 방법으로 처벌받고 갚음하는 것은 회피해버린 것이다. 하이드가 지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소로워하는 정도를 넘어 역겨워하고 가증스러워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지킬은 이 극에서 가장 위선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고 나약했다. 하이드는 사회의 기준과 규율을 가감없이 깨버리기에 악하게 보일지언정 이 극에서 가장 강하고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하이드를 긍정하는 건 아니다. 나는 어쨌거나 법학도이고, 사회를 완전히 떠나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위선자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오우 제기랄, 어떤 영화에서 본 시덥잖은 대사가 생각난다. 범죄야말로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던가.)
<지킬 앤 하이드>는 결코 선악의 싸움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에 길들여진 인간과 본성을 따르는 자유로운 야수의 싸움이다.
그리고 내가 지킬에게 느낀 감정은 보통 동족혐오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p.s. 생각건대, 라 만차 개막 무렵에는 중도 서가에서 <돈키호테>가 싹 실종되었고 지킬 개막 무렵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반납서가에 자주 등장했더랬다. 하긴, 나에게도 TAC에 뻑 가버린 결과 여섯 권짜리 완역 <레 미제라블>을 단숨에 읽어치운,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전적이 있으니까. 2차저작물이란 이런 멋이 있어야 하는 게다. -_-
p.s.2 류배우와 김선영 씨는 정말 훌륭했음. 숙취가 저녁까지 이어져 체력이 바닥났다는 핑계로 기립은 안 했지만, 보통 때 같으면 나도 일어섰을 것이다. 뮤지컬 하나 보는 게 이렇게 체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니, 술 좀 줄여야지... 가 아니고, LG아트센터는 뭔가 불편하다니까. 라 만차 보러 갔을 때도 무대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리가 불편했다고. 극이 꽤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나 저제나 끝날 시간만 기다리게 되더라. 나 샤롯데나 여타 극장에선 이러지 않았거든?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