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성도를 포위하였을 때 유비가 병사들과 약속하였다. "만약 일이 평정되더라도 부고에 있는 모든 물품들에 대해 고가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성도를 뽑아버리자, 병사들이 모두 방패와 창을 버리고 여러 창고로 달려가서 다투어 보물들을 빼앗았다. 군대에 쓸 비용이 부족하게 되었고 유비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자, 유파가 말하였다. "이 일은 쉽습니다. 다만 100전짜리 돈을 주조한다면, 여러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으니, 관리들로 하여금 관청에서 교환하도록 하십시오." 유비가 그것을 따랐다. 몇 개월 사이에 부고가 가득 차게 되었다." ...
-권중달 교수 역 자치통감 제7권, 효헌제 건안19년(214) 기사 中
한편 일의 선후부터 정리하면,
213년 낙성 포위
214년 방통 전사, 낙성 함락. 이 무렵 제갈량, 장비, 조운 입촉, 주변부터 정리한 후 성도를 포위한 유비군에 합류.
유장 항복(오주전 참고할 때 아마도 여름5월 무렵이나 그후)
형주 문제로 제갈근 방문
익양 대치
215년 3월 조조의 장로 정벌(무제기). 조조 때문에 유비가 양보하면서 3군 할양
8월 손권의 합비 공격
11월 장로 투항. 그 무렵에 유비도 파중 제압
12월부터,
216년 1월 이 사이에 탕거 전투
5월에 조조 위왕 즉위
겨울 조조의 손권 공격
217년 앞부분 생략하고 겨울에는 바야흐로 한중전 개막
유파의 건의에 대한 이야기는 자치통감엔 실려 있지만 파성넷에 올라간 삼국지 촉서 유파전에는 없다. 파성에 유파전을 올린 분이 백문을 붙인 탓이다. 원문을 보니 주석으로 달린 영릉선현전에 적힌 이야기였다. 아무튼 주석 쪽에 흥미로운 떡밥(이라 쓰고 패기 쩌는 유자초ㅋㅋㅋ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조콩 바보된 일이라던가, 유비한테 출사할 거 권하는 제갈량한테 너님 어디서 헛소리를 하시나요? 같은 소릴 한다던가 으잌ㅋㅋㅋ)이 약간 있는 것 같다. 이건 나중에 천천히 보도록 하고.
성도 함락 후 유비는 촉의 금, 은을 거둬 제장에게 나눠주고 곡식, 비단은 돌려보냈다.(선주전) 한나라는 기본적으로 화폐경제였다. 특정 연령대의 인구는 모두 의무적으로 내야 했던 인두세가 화폐납이었다 하면 설명이 될까. 그렇지만 동탁이 터뜨린 헤트트릭 - 소제 살해 및 헌제 옹립으로 천자의 정통성 및 황실의 권위 붕괴, 장안 천도로 군웅이 할거하면서 중앙집권 붕괴, 싸구려 소전을 찍어대면서 국가경제 붕괴 - 으로 인해 화폐경제가 무너지면서 후한말은 현물경제로 퇴보한다. 가령 조조가 실시한 호조제는 인구 단위가 아닌 호구 단위로 세를 물리면서 면, 비단 같은 현물을 내게 했다.
현물경제에서 화폐처럼 선호될 물품이라 하면 역시 금은 같은 귀금속에 생필품인 곡식, 그리고 면, 비단 같은 직물 종류이리라. 그렇지만 금, 은은 일반서민까지 널리 쓰기엔 무리가 있다. 금, 은은 신하들에게 주고 곡식, 비단은 돌려둔 건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한편, 자치통감에 적힌 대로라면 유비는 성도 포위 때 관의 창고인 부고를 약탈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낙성 포위가 1년을 끌었고 막판에 방통이 뜻하지 않게 전사하는 경험을 하면서 유비도 약간 조바심이 났던 게 아닐까 싶다. 문제는, 그로 인해 군자마저 텅텅 비어버렸다는 것이다. 약탈을 허락했다지만 그것도 감안한 전체 예산에서 최소한의 군대 유지비를 남기지 않았을 리는 없고, 아마도 손권과의 불화로 갑자기 돈쓸 일이 생긴 탓 아닐까 한다.
선주전 대로라면 성도 바깥의 촉 지역에는 아직 곡식, 비단이 남아있는데 왜 비용이 없다는 걸까? 전후재건+통치확립사업에 쓸 예산을 제하고 보면 정말로 남는 게 없었던 걸까? 촉의 경제력 자체가 문제였을 수는 있다. 이각, 곽사 시절 곡식 1곡에 50만전이라던 무지막지한 인플레가 기세만 수그러진 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참고로 한대의 인두세는 어른한테 120전씩 물렸는데 이것도 조세부담이 큰 편이었다) 워낙 천혜의 땅이라 백성들이 자급자족은 할 수 있지만 그걸 경제적으로 순환시키는 데는 문제가 있었으리라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유장의 통치는 내용적으로 그리 칭송받을 만한 게 못 되었고, 지형적으로 폐쇄적인 촉에서 두 출입구 중 하나인 한중 방향은 사실상 장로 때문에 막혀 있었으며, 장로가 없었어도 촉과 교류해야 할 관중 지역은 동탁과 이각, 곽사 시절을 거치면서 전 대륙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경제가 파탄난 곳이었다. 성도 함락은 동탁이 주살되고 20년은 지난 후의 일이지만 그 잔영은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비교적 경제가 안정된 형주에 있다가 갓 촉에 들어간 유비군에는 그걸 감당할 능력이 없었을 가능성도 높고.
이런 상황에서 유파가 100전짜리 화폐를 찍어내 관리들부터 쓰게 한 것은 우선 성도 함락 때 병사들한테 흩어진 재화(대개 현물이었겠지?)를 회수하려는 의미가 컸을 것이다. 공식적인 '화폐'의 통용은 유비의 정권이 군사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주도권을 잡게 하는 효과 또한 있었을 테고. 그렇더라도 거의 긴급재정경제명령 수준의 비상조치 아니었을까 한다. 이후에 100전이 쓰였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하면서 동광을 개발해 북벌용 군자- 즉, 화폐를 제대로 찍은 걸 보면 역시 실효성이 크진 않았을 것 같다. 애초에 1인당 1년 세금이 120전이던 나라에서 -흉년과 전란이 연달아 겹친 탓도 있지만- 끼니 분량의 곡식이 50만전 찍게 된 상황부터 어처구니 없긴 하다.
예전에 유파와 관련된 대목을 대강 읽었을 땐 근본적으로 인플레 잡을 화폐개혁을 실시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폄하될 까닭 또한 없는 '업적'이라고 보는데, 왜 진수는 이런 걸 빠뜨린 건지. 역시 촉서의 인물들은 전체적으로 공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축약되거나 생략되었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