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가 즐거워 블로그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feat.유공사)
...죄송합니다!
2012.12.2.
순욱이 행정 존잘이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혼란스럽다. 행정면에서 뭔가 업적을 남긴 게 있었나? 순욱에 대한 평은 장자방이다. 이 양반은 대전략가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순욱전에서 조조가 순욱에게 상의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대국의 방침을 어떻게 취할 것인가
에 대한 이야기다. 조조가 출정할 때 보급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면 그것은 순욱이 관리로서 유능하다는 뜻은 되지만, 그게 행정 존잘이라는 뜻이 될지는 의문이다. 장량과 소하는 엄연히 한 일이 다르지 않은가?
소하의 업적 중 하나가 보급을 잘 대준 건데, 그건 소하의 공 중 하나이고, 그 양반의 진가는 함양에 들어가자마자 호적부터 보고 한나라 건국 후엔 법을 만드는 식으로 나라가 굴러가는 모양새를 안다는 데에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 그게 행정인 거고.
순욱이 시중으로 상서령을 대신한 양반이었으니 그런 방면으로 재주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소하에 비견될 정도일지는 의문이다. 그 동네는 한나라의 조정과 관료제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덕에 엘리트 관료들도 상당수 물려받았고, 그런 하부관료들이 민둔을
제안하면 조조가 받아들이는 식으로 행정이 굴러갔다는 느낌이다. 즉, 조조가 레알 중심이었다는 게 내가 받은 인상이다. 행정 쪽에서 순욱이 남긴 업적을 아는 분이 계시면 알려주셨으면 한다. 나는 순욱전 하나만 봐서 감이 잘 안 잡힌다.
순욱이 시중이면서 상서령을 겸한 건 조조가 사공 -> 승상 테크 밟으면서 최고행정장관 노릇을 했기에 상서령의 역할이 축소되어서가 아니었을까? 촉에서도 승상(겸 녹상서사였지만)이 사라진 후에야 녹상서사, 상서령 같은 게 최고행정장관 역할이었으니까.
@Old_Tavern 순욱전에는 상서령을 겸한 게 아니라 대신하게 했다고 적혀있네. 수정.
제갈량 시절 중반까지 상서령은 이엄이다. 유비가 죽기 직전에 이엄을 상서령 시켜준 건 일단은 탁고대신이라 구색을 맞춰 주려 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엄의 지위는 중앙의 상서령이 아니라 바깥의 도호로서의 역할이 기대되는 모습이었고.
진서 직관지에는 시중에 대해 의식을 관장하고 황제의 어가를 따르는 등, 황제의 비서실장이라는 느낌이 드는 설명이 적혀있다. 역시 행정과는 거리가 있다. 상서령은 조조가 사공, 승상 하는 동안 사실상 필요 없는 자리였고. -_-
역시 나는 순욱이 행정 존잘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가 없다. 다른 의견 있으신 분들, 환영합니다. 많이 말씀 들려주세요.
순욱은 행정존잘 아니어도 이미 훌륭해! 장자방이니까! 그러니까 소하는 제갈찡한테 넘기세요! #실은_이것_때문에_약간_삐졌음
@곰님 아, 트윗 정리 좀 하느라 이제 봤습니다. 저는 절대 순욱이 제갈량의 밑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한 수 위라고 봅니다. 공훈 면에서도 절대 꿇리지 않죠. 다만 그 영역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조조의 표에 적힌 순욱의 공에 대해 저는 '장량'의 역할로서 쌓아올린 공훈일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조조 부재시에 대행하고 후방을 담당한 것 또한 대전략 구상 못지 않게 무시못할 공훈입니다만, 그쪽이
'소하'에 비견될 만한 행정가로서의 공훈인가 하면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는 게 제 생각인 것입니다. 순욱도 틀림없이 맡은 일을 잘했습니다만, 행정가로서의 소하는 너무 넘사벽이네요.
한편 진수가 직접 관중과 소하에 비견한 제갈량의 경우에는 행정 쪽으로는 정말 나라 하나 세우고 정비까지 마치는 무시무시한 역량을 보여줬고요. 대신 전략가로서는 그래도 장량에 비견될 사람은 아니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넹 바로 그겁니다. 굳이 하려고 한다면 제갈량도 전략 짤 수 있고 순욱도 행정 할 수 있지요. 하지만 특기분야는 그게 아니었다는 게 제 결론입지요. 그래서 순욱을 소하에 비견하거나 행정존잘이라고 부르는 말을 보면 혼란에 걸림;
왕좌지재라는 말 자체는 신기루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순욱은 동탁과 이각 곽사를 거치면서 정통성 자체를 위협받던 '헌제'라는 왕을 보좌하는 인재로서 틀림없이 별명 그대로 행했으니까요. 협천자 영제후라는 것도 돌이켜보면
조조라는 걸출한 '도구'를 이용해 할거한 군웅들이 헌제에게 도전하지 못하게 하고 종래에는 모조리 평정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죠. 실제로 헌제는 조조의 '보호'를 받고부터야 비로소 겉치레나마 천자로서의 명분과 위엄이 생기니까요.
왕좌지재라는 평 자체는 순욱이 아직 조조를 만나기 전에 들은 거니까요. 개인적으로 한나라의 신하로서의 순욱은 왕좌지재, 조조의 신하로서의 순욱은 조조의 장자방으로 별명이 나뉘는 것처럼 보입니다.
2012.11.28.
@곰님 征南(조정남) 厚重,征西(진도) 忠克,統時選士,猛將之烈 -계한보신찬. "選士"라는 부분을 눈에 보이는 대로 해석하면 뭔가 특수부대 삘조차 나는데, 성분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휘하 병졸들이 설렁설렁 노는 애들은 아니었겠지요.
유비가 공손찬을 떠나 도겸한테 갈 때 휘하에 오환족 출신 기병들이 약간 있었습니다. 운별전 대로라면 그 무렵 조운은 유비 밑에 없었습니다만, 만일 그 오환기병들이 한중까지 계속 갔다면 조운이 이끌었을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건
없겠지요. 조운의 지위에 대한 첫 기록은 主騎니까 이후로도 기병 관련으로 계속 쓰였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형주 쪽이나 촉 쪽의 이민족들도 기병이 특기였는지는 제가 알지 못해서 할 말이 없고, 그 밖에 조운이 휘하 기병을
잘 키웠을 가능성이야말로 높은 편이고. 황충 구하러 갈 때 데리고 나온 수십 기의 기병은 그야말로 정찰을 위해 "가벼운" 차림이었다는 걸 조운빠들은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근영.
전한 무제 때 그 뭐더라.. 흉노 대책으로 동네마다 말 키우는 걸 장려하고 담당 관리를 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정책 덕에 특히 흉노 피해가 컸던 하북 지역에서 순식간에 기병용 말이 늘었을 겁니다. 황하 이남은 잘 모르겠지만
하북이라면 한족이라도 좋은 기병이 적지 않았겠죠. 당장 이민족에 대해 대단히 강경했던 공손찬이 이민족 수준으로 기사가 가능한 백마의종을 끌고 다녔고, 그게 유주였던 걸 생각하면 말을 좋아했다는 우리의 유비도 기병이란 병과와 친했
을 가능성도 높고요. 조운 자신도 하북 사람이지요. 역시 운별전을 신뢰한다는 전제입니다만, 유비가 원소한테 의탁한 시절 조운이 원소군 내에서 살금살금 끌어모은 유비의 부곡들이 기병으로 컸을 가능성도 높아 보이네염.
한 마디로, 제 경우엔 유비군 기병의 기본적인 근간은 하북 출신들이 절반 나머지는 오환으로 대표되는 이민족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합네다.
기주라면 이미 춘추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 때 중국 역사 최초로 호복(胡服)을 장려하고 이민족들처럼 기병을 키운 기록이 있는 동네다보니(...)
그것까진 단언하기 어렵네요. 기주는 춘추전국시대 이전인 주나라 때 이미 9주라 해서 한족의 영역에 들어간 지역이고 그 후로 쭉 한족이 굳건하게 자리를 굳힌 지역인지라. 물론 자치통감 같은 걸 보면 상산 이남까지 이민족이 쳐들어온
기록이 종종 보이니 이민족이 같이 섞여 살았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지만, 한나라의 대 이민족 기본정책이 화이잡거를 엄격하게 막는 거니까요. 유주라면 이민족이 어느 정도 같이 섞여 산 게 확실해 보입니다. 유우전 같은 걸 보면.
후한 말기의 혼란 때 잡거가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지염. 삼국시대는 중국사에서 본격적으로 화이잡거가 일어나는 시기고.
(주 : 운별전에 기록된 한중전의 무쌍난무와 관련해, 조운이 이끌고 나간 기병 수십 기의 정체에 대해 트친과 나눈 대화)
2012.11.22.
@곰님 ㅇㅇ... 그 기록 보고 헌제 자신이 그렇게 어려서부터 황제 취급 못 받고 고생한 경험이 크구나 + 결코 바보는 아니구나 생각했더랬습죠.
아무튼 저 일 있었을 때의 헌제가 아직 스물도 안 된 나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각, 곽사한테 잡혀 장안에 있던 시절이니까. 헌제는 절대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비.
@비밀글님 파성넷에 그 이야기 나온 적이 있나요? 험.. 저는 협천자 후 헌제에 대한 조조의 태도가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적힌 걸 못 봐서, 처음엔 의대 사건이 좀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았습죠. 그게 관도대전 이전의 일인데 조조가 어쨌길래.
지금은 포기한 팬픽질 하나를 위해 가설 세워본 게 있다면, 의대 사건의 중심에 있는 동승에 대한 것입죠. 동승의 딸은 헌제의 아내이자 6촌남매였고, 동승 자신은 동탁한테 끌려가 장안에서 이각, 곽사한테 시달리다 레알 헬게 경험
하며 같이 탈출한 경험이 있습죠. 근데 탈출과정을 보면 동승이 헌제를 보호하기 위해선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생각한 건지 어쩐 건지 조조가 보호하려고 보낸 장수(조홍이었나?)를 공격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이각, 곽사
한테 재차 공격당하니까 그때서야 조조에게 도움을 청해 낙양 찍고 예주로 이동했던가... 아무튼 장안 탈출과정을 보면 이게 진짜 천자에 대한 대접인가 싶을 정도로 별 일이 다 있어서, 동승한테는 날 세울만한 이유가 있다 싶고
협천자하자마자 조조가 자기 근거지인 예주로 천자를 데려가려 하니 제3의 동탁인가 반발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고(애초에 장안천도 자체도 동탁의 근거지인 서량에 가까우니까..) 조조가 협천자하고 나서 칭한 벼슬이 또 강해서
당시 헌제와 함께 동탁->이각, 곽사 루트 타며 시달린 조정의 중신들 중 조조한테 반감 느낀 양반들이 황권 회복을 명분으로 뭉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있습죠. 넹 동승이 중심에 있지 않을까 하고요.
의대사건 타이밍이 딱 관도대전 직전인 건, 유비라는 유씨 군벌이 허도에 나타난 데다 원소와 대립하느라 조조가 상대적으로 후방을 덜 신경쓰리라 판단했던 건 아닐까 싶네요. 관도대전 중간에도 조조가 서타라는 무명 병졸한테 암살당할
뻔한 일이 있는데, 당시에 이미 여러 가지로 조조에 대한 여론이 극과 극이었을 거라 생각되더근영. 이렇게 길게 적어봤자 지금은 포기한 팬픽질을 위해 세운 가설일 뿐이지만요.
유비가 그 타이밍에 원술 때린다며 허도를 떠버린 건 어쩌면 동승한테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의지 + 밀조의 성공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고요.
ㅎㅎ 서타의 암살미수 같은 경우엔 저도 왜 일개 호위병사가 이러나 뒤에 이를 테면 원소같은 배후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 원소는 애초에 헌제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은 전력이 있어서리. 조조를 적대하는 것과 별개로
동승 일파와 협력할 가능성은 좀 낮지 않을까 싶네요. 협천자는 그족에서도 말이 나왔는데 원소가 거부한 것도 그 연장선상일 가능성이 높으니...
전 헌제가 항상 불쌍하고 가련했어여. 이 케이스는 레알 황족으로 태어난 죄.
동탁의 3대 병크로 기존의 오수전에 기반한 화폐제도 시ㅋ망ㅋ + 미친 가뭄으로 농사 똥ㅋ망ㅋ + 당시 관중은 군웅할거기가 본격 시작되는 데다 이각, 곽사가 방어한다고 사방을 틀어막아 길이 끊겨 물자유통 엿ㅋ망ㅋ
공손찬과 원소가 한창 투닥대던 193년 초에 헌제가 보낸 칙사 때문에 둘이 잠깐 휴전하는 일이 있는데, 그 칙사는 장안을 출발한 때부터 무려 반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업에 도착...
일을 빨리 끝내면 지옥같은 장안에 다시 돌아가야 하니 일부러 바깥을 뱅뱅 돈 건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도 해보긴 했(...)
기억이 안 나네요. 원소전 어드메에 칙사 이야기가 있을 텐데. 칙사 출발한 시기는 효헌제기에서 본 걸로 기억하고요.
@곰님 @비밀글님 동탁이 세운 천자라 정통성 약함 + 장안천도로 중앙이 완전히 무력화, 군웅할거 촉발 + 소전 남발 띠리링 -> 이후로 다시는 화폐가 쓰이지 않았다 (동탁전)
물론 동탁 이후 시대에도 한동안 소전, 오수전이 섞여 유통된 듯하고, 유비, 조비가 발행한 오수전이 출토되고, 제갈량도 남만의 동광을 개발해 공신력 있는 오수전을 찍어 유통시키는 등 화폐 자체는 계속 쓰였겠으나. 인구당 120전 내던 한나라의 조세는
망했습니다 아 망했어요. 조조는 화폐납인 인두세를 폐하고 호구 단위로 실물을 걷는 호포제를 실시하지요.
(주 : 헌제가 배급 곡식을 횡령한 관리를 직접 잡아낸 기록에 대해 나눈 이야기..에서 시작했는데 왜 마지막에 오수전 이야기가 나왔지?)
2012.11.20.
@곰님 이엄이 까여야 하는 건 군량 못 가져다준 것보다 자기 잘못을 남한테 뒤집어 씌운 것 아닌가요? 탁고대신이면서 일 제대로 안 한 거랑.(이건 계한보신찬의 평) 흠...
확실히 이엄은 나름 공적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못난 성깔과, 탁고대신이면서 나의 제갈찡을 괴롭힌 것 때문에 나는 깐다! 231년 병크 이전부터 촉의 중신들이 이엄을 까는데 제갈량이 실드 쳐주던 거 생각하면, 능력과 인성은 레알 별개..
@곰님 @비밀글님 저쪽에서 이엄의 과를 잘못 짚은 게 문제 아닐까 싶습네다. 개인적으로 탄핵은 탁고를 받은 때부터 자잘하게 쌓아온 밉상짓(군무 관련은 아닌듯..)이 제갈량을 중상한 것에 더해져 한꺼번에 터진 느낌입니다.
당장 생각나는 게 구석 드립이네요. 유비가 죽은 직후에 제갈량한테 구석 받으라고 권했던 것 같은데. 당장 남쪽에 반란 터지고 난리가 나서 유선의 지위가 위태로운데 조조처럼 구석을 받으라니 뭔 소리..
그냥 이엄전을 보시는 게 좋겠네요. 막 북벌 시작할 때 한중 오라니까 파주자사나 시켜달라면서 안 간 거라던가, 사마의가 부 연 것처럼 자기도 열게 해달라고 해서 타협책으로 이풍이 강주독 된 거라던가..
이엄 탄핵표문에 위연과 양의가 나란히 서명을 했던데, 둘이 엄청나게 사이가 안 좋았던 걸 생각하면 그런 양반들도 합심해서 깔 정도로 이엄에 대한 평이 나빴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제일 엽기적인 건 제갈량이 죽자 제갈량은 혹시 이엄을 복직시켜줄지 몰라도 그 후임이 될 사람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걸 본인이 알았다는 거죠. 진짜로 이엄에 대한 평이 바닥을 쳤다고 보면 될 듯...
제갈량이 이풍에게 보낸 교를 보면 "도호(이엄)가 죄과를 반성하고 한 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고, 그대(이풍)가 공염과 서로 믿고 성실하게 같이 일한다면 막혔던 길은 다시 트일 수 있고 잃었던 것도 다시 얻을 수 있다" 같은 소리라니 정녕 대인배시오;
2012.11.18.
도호 이엄은 천성이 자존심이 강해 호군(護軍) 보광과 나이와 지위가 서로 비슷했지만, 이엄은 그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계한보신찬에서 비관을 찬하는 글에 진수가 붙인 주석 中. 으악 미치겠다 중도호와 호군이 지위가 비슷하다고!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중호군은 저어기 딴 사람 있으시고, 이 무렵 촉에 호군이 진도만 있었던 게 아니구나. 헷갈리는 건 조운은 '중'호군이라고 中을 꼬박꼬박 붙이는데 이엄은 이엄전에만 '중'도호라고 붙어있는 듯하단 거. 화양국지나 기타 열전에선 다 그냥 도호인가?
아무튼2 남정 무렵 강주독으로는 비관이라는 양반이 따로 있었구나. 일전에 다른 분 타임라인에 트윗테러를 해가며 풀었던 망상썰은 말 그대로 망상썰이 될 듯... 크윽
저 보광이라는 인물의 경력에 진남장군이 있던데 征과 鎭의 의미 차이를 생각하면 조운이 정남->진동으로 옮겨감과 동시에 진남이 된 것 아닐까 싶어진다. 그럼 역시 남정 이후에?
2012.11.16.
뭐여 삼도에서 바로 근래에 이엄 옹호글이 올라왔더랬어? 난 내가 이엄을 요래조래 까고 싶어서 팬픽질을 이렇게 저렇게 하고 있나 혼자 깔깔거렸는데ㅋㅋㅋ
그리고 이엄이 상서령을 겸하면서 강주 같은 외지에 나가있던 걸로 제갈량의 신임을 못 받았다, 중앙에서 밀려났다 같은 소릴 하는 건 당황스럽다. 먼저 이엄을 상서렴 삼아놓고 중도호로서 영안에 박아놓은 건 유비다. 연호를 어떻게 써놨는지 잘 보셔.
영안은 당시 대 동오 전선의 최전방이었다. 등지가 몇 번 오에 다녀온 걸로 동맹이 회복된 줄 아나? 옹개는 오와 결탁했고 제갈량의 남정 내내 옆동네 교주에는 유장의 아들이 "익주자사"로 머물고 있던 건 아슈? 영안 방비가 어떻게 한직이야.
남정 끝난 다음 해인 226년에 이엄이 강주로 이동하지. 이것도 한직 같은가? 지도를 보슈. 강주가 레알 끝내주는 위치니까. 거긴 여차하면 오나라, 여차하면 익주 남부, 여차하면 바로 성도를 칠 수 있는 곳이다. 제갈량이 북벌하러 나가면서
"천자" 유선이 있는 성도까지 포함해 등 뒤를 이엄한테 맡긴 건데 그게 한직이냐? 신임을 못 받았다는 증거가 되냐? 이엄이 상서령을 겸하긴 했지만 이엄의 재능은 군무 쪽이고, 실제로 반란 진압 실적이 있는데, 그럼 중도호가 본업이라고 봐야는 거 아니냐
저 양반은 전부터 촉나라 쪽 인물들, 특히 제갈씨와 조씨를 못 까서 안달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렇게 지엽적인 것만 보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말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2012.11.15.
그러고 보니 제갈량은 남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이렇게 비의를 눈여겨 본다고 광고했구나. 혹시 비의가 남정 관련해 뭔가 비의전엔 안 적힌 일이라도 한 걸까?
@곰님 말씀 들으니 그럴듯하네요. 마속 또는 장완을 보조할 연배... 제갈량은 북벌을 염두에 두고 남정을 진행했으니, 뒤에 남겨놓을 행정진에 대해서도 당연히 구상했겠지요. 다만 장완은 승상부의 유부사마로 승상부 통솔시킨 게 분명한데
마속이나 비의는 참군, 중호군 편장군 같은 식으로 일단은 종군했다는 게 떠오르네요. 흠....
저도 마속에 대해서는 군사령관 쪽으로 키우려고 가정에 보냈다 생각합니다. 비의전을 보니 유비가 생전인 221년 태자사인 등을 역임하며 유선과 가까이 지냈고 남정 직후엔 손권한테 파견됐네요. 1차북벌 땐 마속처럼 참군이었던 듯..
흠 조운이 사망한 후인 230년에 비의가 조운의 후임으로 중호군 되는데, 이 관직은 무관 선발과 무관 간 조율 같은 걸 다루는 자리입니다. 비의가 양의와 위연을 중재하러 다닌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겠죠.
근데 장완 시절엔 "대장군" 녹상서사고 장완 사후엔 병권을 이어받았다고 비의전에 적혀있네요. 물론 비의 시절 실질적으로 군을 돌린 건 강유일 테고 문관 무관 구분이 비교적 뚜렷하지 않던 시절입니다만, 의외로 군 쪽에 연이 깊은 듯
어쨌거나 제갈량이 일찍부터 비의를 눈여겨본 것은 확실하고, 어차피 촉이 북벌을 계속해야 하는 이상 촉의 탑은 군무를 몰라서는 안 되니, 다 뭉뚱그려서 간단하게 뒤를 위한 밑작업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어긋나는 건 없을 듯합니다.
한편으로 마속에 대해서는 뭐... 할 말이 없네요. -_-;
장완이 한중에서 부현으로 돌아가자 비의는 대장군이 되었으며 녹상서사가 되었다. 라고 비의전에 적혀있네요. 강유한테 매번 1만 제한을 건 건 비의 맞지 않나요? 장완 사후지만.
장완 사후가 맞나? 급히 장완전을 검색합니다. 아오 파성넷 플리즈;;;
@곰님 옙 저도 방금 장완전 확인했습니다. 244년, 246년.
뭐 생전이냐 사후냐의 차이가 약간 있긴 하지만 장완이 비의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생전에 작업 다 마친 건 팩트 + 아무튼 비의가 장완 다음의 대장군 이건 확실하니 괜찮지 않을까요 ㅎㅎ
2012.11.13.
勢利之交難以經遠 士之相知 溫不增華 寒不改葉 能四時而不衰 歷夷險而益固 -제갈량
歷夷險... 매우 좋은 말이다. 그러니까 일화 한 토막이라도 전해질 법한데 #정줄상실
2012.11.10.
나는 촉빠지만 유비가 인생을 건 진짜 사업이 한조 부흥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조비가 선양받고 헌제가 죽었다는 '루머'가 도는 판에 같이 칭제해버리고 이릉 고고싱한 것까지 갈 것도 없다. 또 한조 부흥만이라면 협천자한 조조에게도 할 말이 있다.
한조 부흥은 그 시대에 머리 좀 굴리던 군웅이면 다 들던 명분이고, 유비는 유씨이기에 거기서 좀 더 우위가 있었다. 기반만 제대로 잡힌다면 광무제처럼 유씨의 한나라를 중흥한다는 명분을 취할 수 있다는 거다. 성공했으면 광무제는 중한, 유비는 후한인가?
요는, 내 보기에 유비와 제갈량이 만들고자 한 한나라는 헌제의 한나라가 아니라는 거다. 소열제 "유비"의 한나라지. 물론 유비도 조조가 그랬듯 처음부터 자신이 천자노릇 하려 한 건 아니었겠지. 적어도 입촉 이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긴 헌제는 동탁이 소제를 죽이고 세운 황제라 정통성이 매우 약했다. 그 험한 군웅할거기를 거치고도 헌제가 '천자'로 살아남은 게 조조의 공인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고. 조조가 넘사벽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유비는 헌제를 어떻게 다뤄야 했겠는가.
해서, 나는 팬픽질할 때 유비 패밀리가 진심으로 한실 부흥만을 위해 싸운다는 식으로는 못 끄적이겠다. 동탁이 낙양에 파이어월 지르고 텼을 때 한은 망한 거니까. 그래서 백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시한다. 유비 시대면 의협의 형태로, 제갈량 시대면 애민으로.
순욱이 저 세상에서 제갈량을 만나면 잡아먹으려 들지 않을까? 순욱은 동한의 신하로 죽었지만 제갈량은 동한이 망했다는 전제로 융중대를 폈고, 순욱이 조조를 통해 구현하려다 망한 걸 제갈량은 자신이 직접 완전 이상적으로 국궁진췌해버린 것도 있고(...)
2012.11.8.
훔... 역사에 if는 의미가 없는 거지만, 만일 조비가 끝내 위왕의 자리만 고수했더라면 삼국의 정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차피 조조의 자식 중 누가 뒤를 이어도 칭제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만, 적어도 그 타이밍이 달랐더라면.
1. 조조군이 193, 194년 서주를 공격했을 때 민간에 대규모 학살을 저지른 기록 2. 난을 피해 서주의 사족과 백성들이 대거 남하, 회남과 양주로 피난한 기록 3. 원술과 손책이 그런 서주 명사들을 열심히 신하로 회유한 기록
4. 서주 낭야는 194년의 2차 서주정벌 때 당한 지역 5. 제갈근이 서주의 난을 피해 계모를 모시고 양주로 피난한 기록 6. 제갈현은 195년 원술의 초청으로 양주 예장의 태수가 되어 조실부모한 어린 조카들인 제갈량, 제갈균을 데리고 간 기록
이상을 종합해봤을 때 제갈찡이 조콩의 서주공격을 직접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는 것은 팬픽질일까요? 카한테 매우 까일까요?
11.6.
@비밀글님 엄.. 집해에 들어간 주석 말인데요 초선의 이름자가 들어간 그 주석은 누가 단 주석인가요? 청대의 학자면 아무리 집해에 실린 거라도 한번은 의심할 필요가 있을지도...
엇 죄송합니다 잠깐 마비 한다는 게 시간이(...) 앞부분은 여포가 동탁의 傅婢과 사통해서 어쩌고저쩌고 근데 범엽의 후한서에 있는 공손찬전에 의하면 원소의 모친이 傅婢이니 주석을 달길 傅婢 는 시비라 그러니까 신분 천한 여인
라는 거고 뒷부분은 이장길이 지은 呂장군가에 의하면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검색해보니 삼갤에서도 한번 화제가 됐었나 보네요. 여장군가 번역인 듯한 글도 있고. 제가 후한서 본문을 보지 못해 말하기 어려운데 저런 데서 초선이라니
신기하네요. 이장길의 여장군가에 대해서는 정소문 삼국지에 "청나라 때 양장거의「낭적속담(浪跡續談‧貂蟬)」에 의하면 ‘이장길이 지은 여장군가에 초선에 관한 일을 말한 대목이 있는데 작자가 그것을 따다가 부연해 쓴 것" 같은 게.
(주 : 이상은 삼국지집해에 나온 “초선” 이야기)
@비밀글님 부마도위 자체..라기보단 공계? 라는 인물에 대한 글 같네요.
음 저도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운 게.. 일단 촉나라의 부마도위? 교위? 라면 제갈교, 제갈첨, 등량 정도가 떠오르는데 마지막 인물이 등지의 아들인 그 등량인가 하는 거죠. 등지의 나이가 몇인데 꼬꼬마 유선이랑 사돈을!!!!
등지가 251년 사망할 당시 일흔이 넘은 나이였는데 그때 유선이 만으로 44세 정도였습네다. 일흔 넘은 등지의 아들과 사십대인 유선의 딸이라면 몇 살 정도 차이가 날까요. 범위는?(...)
물론 종요와 종회 부자가 거의 조손뻘 되는 나이차였던 걸 생각하면 그 시대니까 하고 넘어가더라도 역시 그 동네는(수군수군) 그리고 알티는 사양합니다 ^^;
공계라는 인물에 대한 글을 찾아냈네요. 지금 또 인터넷이 불안정해지고 있어서 ㅣ링크부터 답니다. baike.baidu.com/view/914111.htm
그리고 첨이는 그 부마 맞습니다. 열일곱살 되자마자 유선한테 붙잡혀가서...!
물론, 등지의 아들로서 작위를 이은 등량이 유선의 항복사절로 파견된 그 부마도위 등량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참고로 둘 다 鄧良입니다.
그래서 김견습이 꿋꿋하게 밀고 있는 설정 그것은 광이 첨이랑 비슷하거나 겨우 몇 살 연상이라는 썰 #무리수
@비밀글님 심지어 등지는 거기장군이었으니까요. 촉에서 1대 거기장군이 장비였고 그 다음이 유염이었나? 아무튼 장비는 명실상부한 외척이고 유염도 나름대로 한나라 황실 유씨의 후손이죠.
역시 그 등량이 그 등량일지도... 그렇다면 등지 또한 말년에 수군수군오나라수군
통이도 다른 1세대들의 아들 세대에 비하면 어리다고 추측되는 게, 관우 장비의 아들들은 유비가 살아있던 시절에 이미 벼슬을 지내고 있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통이는 후주의 호분중랑장 :Q
개인적으로는 통이가 아무리 일찍 태어났어도 입촉 이후일 거라고 추측합니다. 어차피 장판파에서 자기 발로 도망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다면 무사하긴 어려웠을 테니(...) 관평, 장포도 나이 따져보면 장판파 땐 10대 후반쯤
아니 20대일 수도 있고 아무튼...
저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너무 기록이 없어서리 순전히 망상의 장입죠. 그리고 기왕 망상할 거라면 저의 상산남자는 바쁘게 사느라 옆집의 첨이처럼 늦게 애들 놓은 거라 칠 겁니다. 별 의도가 없든 불순한 의도에서든.(...)
장비 손자 장준이 중앙에서 일하고 있을 때 조선생 댁 둘째 아들내미는 강유 따라 답중 갔다네 ㅠㅠ
(주 : 이상은 鄧良이라는 인물의 정체에 대한 추측..은 훼이꾸고 등백묘오오오오오!!!!!!!!)
2012.11.5.
-_-? 이엄전에선 중도호라는데 후주전에서는 그냥 도호라 부르네. 일단 진서 직관지에는 도호를 따로 설명 않는듯.. 호군장군≒중호군은 보통의 잡호호군과 구별되는 느낌이었다. 근데 중도호와 도호는 뭔 차이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첨이도 도호였지.
2012.10.28.
@비밀글님 마속 죽음과 조운 죽음 사이에는 제갈교 사망도 있습니다. 228년말 내지 229년초 승상의 멘탈이 어땠을지 상상하면 무섭심다. 후에 장완이 한중으로 오고 나서 마속 얘기가 나왔을 때 승상이 울었다는 게 다른 의미로 이해감...
2012.10.24.
하작 당신 시끄러워요 기곡 퇴각은 본전에서 진수가 직접 열심히 변명해주는 건수인 거 모름? 조운이 강등된 건 정황상 제갈량과 같이 책임진 거라고 봐야 하지 않겠음? 가정이 그 모양인데 기곡은 잘 수습했으니까 상 줄 수도 있지 않겠음? 하작 시끄러워열
물론 별전이니까 후손 등등이 꾸며넣었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지만 요상하다 싶으면 송지송지배덕후 영감부터 들고 일어났겠지. 그 양반 자기가 제갈빠면서 곽충5사 까고 들어가는 키배력을 보라고.(...)
중요한 건 하작은 별전을 매우 깐다는 거지 뭐. 아으 머리가 살살 아프고 속이 뒤집힌다. 꿀물! 꿀물을 다오! 뭐 오줌이나 먹으라고?
헐. "곡식이 비싸져서 오수전을 철폐하였다." 221년 위나라쪽 기록. 그래? 출처가 어딘지 잊지 말고 나중에 꼭 찾아보자.
別傳大抵依倣諸葛子瑜書 이건 제갈근이 이릉으로 오는 유비한테 보낸 그 글 말하는 것 같다. 자치통감 8권 50쪽 체크.
하작도 호가 茶山이네. 이 양반은 청대 사람인 거 체크하고. 별전이라고 까는 하작이 얄미운 건지 별전 같은 걸 가타부타 없이 사서에 실어버린 배덕후와 사마광이 깝깝한 건지. 둘 다인 것 같다. 나는 진상스러운 악성막장조운빠니까.
하작은 엄정하게 살피려다 지나쳐서 깎을 필요가 없는 것까지 깎으려 한 것 같다. 유비 평원상 시절 이미 따르던 사람이 중간에 사라졌다가 관도 무렵에 돌아오는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님에도 지적하는 것처럼.
(이상은 삼국지집해 중 조운전에 대한 하작의 주석 3개에 대한 이야기. 중간의 오수전 이야기는 역시 집해에 실린 호삼성의 주석이 인용된 걸 찾아보려고 자치통감 보다가 발견해 급히 메모)
2012.10.9.
@비밀글님 누가 노숙을 깝니까 노숙은 오를 위해 분명한 대전략목표를 세우고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사람인데! 손권이 서주, 합비를 못 뚫은 것까지 노숙한테 책임을 지울 순 없잖아요(...)
개인적인 생각으론 우선 두 지역이 중원에 가깝고, 둘째로 조조가 적벽 이전부터 자기 세력에 편입한 지역이며, 셋째로 료래래나 진등이나 만총 같은 사기캐들의 우주방어를 강동의 육군으론 못 뚫어서(...) 아니었나 싶네요.
노숙은 유표가 살아있던 시절부터 강동 하나로는 조조에 대항하지 못한다고 판단해 형주와 연합하려 했던 사람이니, 일단 유표가 죽고 유종이 항복해 형주 북부의 알짜배기를 조조한테 뺏긴 상황에서는 유비부터 키워 유비와 손권이 같이
조조를 꺾은 다음 형주고 뭐고 결판을 내보자는 생각을 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강동 혼자 서주, 예주 방면으로 올라가는 게 어려우니까 촉에서 관중 쪽 흔들게 해 같이 때리자는 식으로.. 실제로 제갈량 북벌 때 오와 연합하면
그런 느낌으로 양쪽에서 흔들려 했죠. 물론 촉의 경우에는 형주를 잃지 않았다면 촉과 형주 양쪽에서 올라간다는 옵션이 붙겠죠. 손권의 뒷치기가 욕을 먹는 건 그럼 기왕 형주 먹은 거 북벌 때 네들이 서주 형주 양쪽에서
올라갔어야지 왜 뺏기만 하고 활용을 못해..! 같은 느낌인 것 같습니다. 음 손권 칭제 이후 오나라 쪽의 북벌사를 잘 몰라서 '느낌인 것 같다'고 추측합니다.
서주는 제갈각이 거하게 삽질한 게 생각나네요.(...) 합비는 유손연합 결성되고 200년대 초중반부터 열심히 싸웠죠. 조조가 직접 내려온 적도 있고요. 손권 입장에서는 관우 무렵 나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곰님 @비밀글님 사실, 형남의 인재들은 조조, 유비가 사이좋게 쓸어갔고 인프라 등은 형주공방 동안 말라서 손권이 들어온 무렵에는 방어나 하는 게 고작이지 거기서 낙, 허로 올라가는 게 무리였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
@비밀글님 넹 익양대치 중 조조가 한중에 들어와 유비 쪽이 정신없는 틈에 형남 4군 중 3군을 할양받았죠(...) 그 후로 그 지역 쪽이 삼국의 역사에서 부각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곰님 해양어택?? 혹시 서주 방면을 그렇게 공격해야 했다는 썰이 있나요?
음, 신박하네요. 그게 가능하면 원소가 그냥 기주에서 배 띄워서 청주 서주 먹지 청주땅 위에서 그렇게 오래 공방하진 않았을 것 같네요.
서주는 회남을 사이에 두고 양주랑 붙어있으니까 거리상으로는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네요. 근데 어느 세력이 됐든 그 시절에 바다에서 군대 데리고 뭘 해봤다는 기록은 못 본 것 같네요. 왕랑표류기 정도(...)
그래요? 전 강유 시절은 잘 모릅니다. 근데 진에서 배를 많이 만들었다는 게 장강 건너는 배인가요, 아니면 설마 바다에 페이크?(...)
2012.10.7.
삼국지에서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밖에서 들으면 난 당신 옆사람을 불러요. 왜냐면 당신 이름을 말했다가 거품이니 삼국지를 ㅈ도 모르면서 얼굴로 빠는 거라느니 별 소릴 다 들었거든. 죽간 좀 남기지 그랬소!! #제일_좋아하는_사람을_까보자
청대의 민담에 의하면 강민호 뺨치는 목성 페이스라는 설도 있던데 자안이 웅위하고~ 가 어찌 그리 해석되는지 모르겠다. 그냥 호군 생각하면 되잖아. 솔까 난 상산씨가 미주랑 같은 미남이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거든? 내 디폴트는 언제나 고화백이거든?
물론 잘생긴 양반으로 묘사되는 게 싫은 건 아니다. 유덕화의 상산남자는 좋았지...
@비밀글님 그러고 보니 그 양반이 호군자룡은 미남이 아니라고 돌려 깠군요. 호군자룡 정도면 대단히 준수했다고 보는데. 여러 모로 관장이 조운의 부하로 보일 정도였지 말입니다.(...)
호군자룡이 좋긴 한데, 그럼에도 내가 1차북벌 영화화를 상상할 때 금성공명과 덕화자룡으로 캐스팅하는 건 호군이 연기할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강철멘탈을 자랑하는 캐릭터가 될 것 같아서리. 1차북벌인데 좀 같이 무너져 줘야 재밌을 것 아녀(...)
@비밀글님 등산가 놈 소식 듣고 등지 이하 부하들이 멘붕하는 앞에서는 침착히게 후퇴 명령 내려놓고 혼자 있을 때 피 토하면 저 좋아 죽지 말입니다. 읍참마속 다음 장면에 비 맞으며 잔도 수리하다가 후출사표 넘어가면 금상첨화지 말입니다.
까 아닙니다. S 아닙니다. 진짜임.
왜 1차북벌로 영화를 안 만들어줘! 백제성 운구행렬로 시작해서 후출사표로 끝내면 땡이라니까? 기승전결 완벽하다니까?
이번에는 좀 더 다양한 주제로 잡담한 대신 상산남자 이야기를 거의 안 했군. 반성함이 마땅하다...!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