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성 자료정리
들어가기 전 깔아두는 전제 몇 가지 :
-일단, 이하의 망상잡담은 제갈현과 그의 조카들이 서주학살 무렵까지 서주에서 살았다는 가설을 전제로 한다.
-제갈현의 행적에 관해 제갈량전과 헌제춘추에는 명백히 상충되는 대목이 있다. 어느 쪽이 보다 정확한지 확신이 없기에 어느 쪽도 배척하지 않을 생각이다.
-단 2번은 제갈현이 살아서 형주에 갔다는 제갈량전 기록을 전제로 둔다.
1. 제갈현의 가족관계?
제갈량전에는 제갈현을 제갈량의 종부(從父)라고 기록한다. 종부는 백숙을 아우르는 말이므로, 제갈현은 제갈규의 형일 수도 있고 아우일 수도 있다. 진수의 삼국지만 기준으로 본다면 이 점은 불분명하다.
장남인 제갈근이 174년생이니 제갈규는 이르면 155년생인 조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많은 연배일 거라 생각된다. 제갈현이 형이라면 거의 가후(147년생)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약간 어린 연배일 듯하다.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에는 예장에 임명될 때 조카인 제갈량과 제갈균을 데리고 부임한 것만 언급될 뿐 정작 제갈현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먼저 사망한 제갈규는 슬하에 이미 자녀가 다섯이었다. 제갈현이 제갈규의 형이라면 대를 이어야 할 책임 때문에라도 당연히 자녀를 봤을 텐데 그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다.
한편으로 제갈현이 동생이라면 조조 내지 유비(161년생)와 비슷한 연배일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에는 예장에 갈 무렵에 30대 중후반 이상이었으리라. 역시 그 당시 개념으로는 가족이 있는 게 당연해 보인다.
2. 제갈씨의 인맥
여기서 수상한 것이 제갈씨의 인맥이다. 제갈현이 생전에 만들어두고 떠난 것인지 제갈량이 후에 노력해서 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형주에서 제갈씨는 제법 무서운 인척관계를 구축했다. 당시 형주에서 이름을 떨치던 집안들을 보면 채씨, 방씨, 황씨, 괴씨, 습씨, 마씨, 양씨 등등이 나온다고 하는데. 제갈량의 두 누이가 시집간 집이 괴씨와 방씨이다. 각 집안의 유명인사를 불러보자면 우선 괴량, 괴월과 방덕공, 방통이 나온다. 방통은 방덕공의 조카이고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이 제갈량의 누이와 혼인했으니 와룡과 봉추는 한 다리 건너 친척이다. (첨언하자면 방통의 동생 방림은 습씨에게 장가들었는데 그 습씨는 마씨와 인척이었다고. 마씨오상의 그 마씨다.) 한편 제갈량의 장모는 채씨인데 바로 유표의 아내로서 유비를 꺼렸던 그 채씨부인의 자매이다. 심지어 이 채씨들의 친고모가 당시 태위였던 장온의 아내이다.(추가:장온의 지위에 대해 효헌제기는 위위, 양양기구기 채모전은 태위라 적고 있음. 장온 본인은 동탁에게 살해당했음) 뭐냐 이 인맥은?
방산민에게 시집간 누이가 작은 누나라 하니(방통전에 인용된 양양기 기록) 두 누이가 다 누나라는 건데, 제갈근과 제갈량이 7살 차이니까 사이에 다른 형제자매가 있는 게 납득이 간다. 그 말은 제갈량이 예장에서 형주로 갈 무렵 두 누이가 이미 혼인적령기였다는 뜻이다. 195년의 제갈량은 만 14살의 꼬꼬마였으니까. 본디 서주에 적을 둔 난민의 딸들이 대뜸 형주 호족의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여기까지는 제갈현이 해뒀으려니 싶다. 제갈현과 유표가 얼마나 친분이 깊었는지는 저언혀 알 수 없다. 하지만 난민 입장에서 괴씨와 방씨는 형주목 정도 되는 인맥을 통하지 않고서야 얻을 수 없는 인척일 거란 생각이 든다. 그 전까지는 제갈씨가 따로 유명세를 얻은 적이 없으니까. 여기까지 보면 제갈현 씨는 상당히 야심찬 양반이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이라면 형주의 호족들과 인척을 맺을 때 자기 자식을 우선시할까, 조카를 우선시할까. 나이가 무척 어리지 않고서야 자신의 자식부터 앞세우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그런데 제갈씨의 이 위엄 쩌는 인척관계는 제갈현의 자녀가 아니라 조카들이 형성했다. 아마도 제갈현이 조카딸들을 먼저 보내 터를 닦고, 장성한 후의 제갈량이 이어받아 완성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서 제갈현의 가족은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제갈현의 가족관계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는 점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왓에버.
3. 원술과의 관계
진수 평왈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고 음탕하였으므로 자신의 일생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로라, 열전이 동탁과 한 카테고리로 묶였다.(...) 여기에 내가 필요할 때 찾기 위해 달아보는 삼갤 링크.
원술과 인재들 (작성자 이안맥클로크 님)
위의 글에는 없지만 주유도 원술의 부름을 거절한 사람 중 하나다. 노숙이 원술에게 딱지를 놓고 주유한테 간 것이(그리고 쌀창고를 내준 것이) 그 직후인 듯하고. 하긴 손책-손권 라인의 초기 신하들 중 많은 이들이 원술의 부하가 될 기회는 있었네. 기회만이라면. 꿀공 지못미.(...)
그런데 제갈현은 저 눈 밝은 사람들과 반대로 행동했다. 원술이 던져준 태수자리를 덥석 받은 것이다.
인재들이 원술을 거부하게 된 결정타는 아마도 197년의 칭제였으리라 생각된다. 그 전까지는 원술의 평판이 아주 바닥을 치진 않은 것 같다. 조조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중원의 일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던 서주 사람들이라면 원술에 대해 아는 것이 사세삼공 명문의 적자라는 것, 그리고 반동탁연합에 참가했으며 원소가 유우를 황제로 세우겠다고 한창 병크를 터뜨릴 때 (페이크지만) 대놓고 반대한 '충신'이라는 인상 정도 밖에 없지 않았을까? 마침 서주에 난이 터져 도망쳐나온 194년~195년의 제갈현으로서는 생계가 막막할 터에 그 유명한 원공로께서 관직을, 그것도 무려 태수를 주신다니 황송해하며 덥석 받을 법하긴 한데.
일단 원술에게 능력이 있다고 여기거나 그가 좋아서 간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당시 원술은 조조에게 집적거리다 실컷 얻어맞고 회남으로 쫓겨나 있었다. 조정이 임명한 정당한 양주자사인 유요가 원술 때문에 내려가지 못하고 1년 가까이 치고받는 꼴도 다 봤으리라. 195년 쯤이면 슬슬 원술의 성품과 꿍꿍이에 대해 의심을 품을 법한데, 그럼에도 제갈현은 원술이 주는 자리를 받았다. 2번 항목에서 내가 상상한 걸 전제로 깔면 제갈현은 제법 손이 빠르고 눈치도 좋은 사람이다. 제갈현이 어느 정도 깔아둔 기반이 있었기에 제갈량이 황씨와 혼인하고 더 나아가 형주의 젊은 선비들 간에 형성되는 인맥에서 좀 더 수월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그런 전제를 깔 때, 195년의 제갈현이 원술을 따른 건 묘한 일이다. 내가 1800년 전 사람의 속내를 알 리는 없고, 우선 제갈량전과 헌제춘추의 상충되는 기록부터 보자.
제갈량전을 따르면 제갈현은 나중에 도착한 정식 태수 주호에게 곧장 양보하고 형주로 물러난 것처럼 보인다. 반면 헌제춘추는 양자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을 가능성을 살짝 내비치며, 한술 더 떠 제갈현이 예장의 치소인 남창 근처에 주둔한 걸 기록해 태수 자리를 깨끗이 단념하지도 않았다는 느낌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자를 따르면 제갈현은 원술의 태수 임명에 내포된 병크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늦게나마 현명한 처신을 한 게 되지만 후자를 따르면 혹시 조정에서 주호가 아니라 자신 쪽을 밀어주지 않을까, 원술이 뭔가 손을 써주지 않을까 하는, 사람이니까 품음직한 미련이 엿보인다.
얼마 전 친절한 비밀글님의 지적 덕에 제갈현의 최후에 관한 한 헌제춘추 쪽이 오류일 가능성 쪽으로 마음이 크게 기울었다. 형주에 형성된 제갈씨의 인척관계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제갈량전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렇지만 헌제춘추의 기록이 모두 오기일 리 없고, 기자가 아무 이유 없이 저런 식으로 썼을 리도 없다. 헌제춘추가 제갈현의 죽음을 착융의 최후와 혼동한 것뿐이라고 단정짓고 말기에는 197년 정월이라고 분명한 시기를 밝혀 적은 것이 묘하다. 착융은 살인강도와 배반을 일삼다가 195년 이름 없는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양자의 사망에 관해 기록된 시기가 다를 뿐더러, 제갈현의 경우에 적힌 시간대는 참고한 기록이 있으니까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나로서는 여기서 어느 쪽이 오류이고 어느 쪽이 보다 팩트에 가까운지 정확히 가려낼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그건 망상의 영역에 제껴두도록 하고, 제갈현이 살아서 예장을 떠났다는 제갈량전 쪽 기록에서 그 '결과'만 취해보자.
이게 왜 문제냐면, 제갈현이 '형주목 유표'에게 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시 유표는 원소의 동맹으로 원술과는 적대관계였다. 원술이 첫 근거지인 남양을 잃은 일에는 유표가 상당히 깊이 개입되어 있다. 원술에게 받은 자리를 포기하고 유표에게 갔다면, 제갈현은 앞서 링크로 따온 숱한 인재들처럼 원술을 버린 것이다. 제갈량전을 따라간다면 제갈현 쪽에서 원술에게 가망이 없음을 늦게나마 깨닫고 적극적으로 그를 버렸다고 상상할 수 있고, 헌제춘추 쪽을 따라간다면 자신이 임명한 태수를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원술이 그 책임을 방기한 탓에 이도 저도 아닌 우스운 입장이 된 제갈현이 실의에 빠져 원술을 떠난 거라 상상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태수 자리를 받은 이유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후자의 경우 더 고약한 것은 제갈현이 입었을 심리적 타격이 전자의 경우와 비교가 되지 않으리란 것이다. 2번에서 내가 망살질로 추측한 걸 끌어오자면, 제갈현은 난민 주제 낯선 형주땅의 호족들이 맺은 인척사회에 곧바로 제갈씨를 편입시킨 사람이다. 나한테는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중류층 남자가 그려진다. 그런 사람이 그렇잖아도 병크를 터뜨리고 다니는 원술 밑에서 조정이 인정하지 않는 관직을 받아 체면만 구기고 돌아왔다면 홧병이 나지 않을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때문에 병을 얻어 197년에 사망한 것일지 누가 아나.
4. 여기서 재미로 보는 위키피디아
중웹의 제갈현 항목 :
생몰연도 불명, 유표의 부하. 예장태수에 임명되었다가 주호에 밀려 형주의 유표에게 갔고, 그 후 병을 얻어 사망했다, 당시 제갈가의 의사였던 장중경이 돌봤다. 뭣! 신뢰도가 대폭 하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장태수로 임명한 사람이 원술인지 유표인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음. 불분명하니 '임명되었다' 라는 확실한 팩트 하나만 적은 듯.
가족관계로는 제갈규의 자녀 다섯명, 즉 조카들에 대해서만 나왔음. 유표의 부하라고 적어놓은 걸 보니 이쪽 편집자는 원술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쪽인 듯. 하긴 나라도 그 제갈씨가 꿀공과 관련되는 건 싫여.(...)
일웹의 제갈현 항목 :
?~197. 여기선 원술이 임명한 기록으로 시작. 흥미로운 점은 제갈현과 주호 사이에 전투가 있었으며 제갈현은 거기서 패해 서성으로 물러났다는 식으로 적어뒀음. 197년 서성에서 반란이 일어나 살해당했다 라고 끝맺었는데, 이쪽은 제갈량전으로 시작해 헌제춘추로 마무리한 듯. 일단 촉서 제갈량전 / 헌제춘추 및 오서 유요전에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고 주석은 달려있음. 엥? 유요전에도 상충되는 부분이 있던가? 제갈현과 주호의 대립 자체는 자치통감에 정리된 대로 195년의 일로 보는 것이 맞다 생각함. 유요가 원술(정확히는 손책)한테 밀려나 예장을 엿본 게 195년의 일이니까. 일웹 위키 편집자는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고 예장태수로 임명하자 제갈현은 올곧은 사람이라 명령을 받았드래요" 대략 이런 내용으로 적어 놓았던데, 아니 잠깐 웃고ㅋㅋㅋㅋ 이 친구도 나처럼 제갈량전과 헌제춘추가 충돌하는 부분을 말이 되게 이어보느라 두통 좀 앓았구만. 근데 아무리 봐도 제갈현은 원술이 황제를 자처하기 전에 예장에 간 지라. 덕분에 신뢰도가 소폭 하락.
5. 그래서 결론은?
197년이든 언제가 됐든, 예장을 떠난 후 제갈현이 오래 살지 못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겨우 10대였던 제갈량과 제갈균은 어디서 지냈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제갈현의 가족 또는 시집간 누이들이다. 그런데 제갈현은 가족관계가 불분명하고, 시집간 누이들에게 신세지자니 참 눈치보였을 테고. 제갈현이 조카들을 아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문 부흥에 적당한 야심을 품었으리라 상상되는 제갈현이 싹수가 보이는 조카한테 무슨 사상을 주입시켰을지도 궁금하다. 그러므로 승상을 향한 나의 망상질은 여기서부터다!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삽질을 하였는가! 나의 쩌는 잉여력이란! 캬캬캬
p.s. 이탈리아 위키에도 제갈현 항목이 있었다. 정작 영문웹에는 없는데?! 뭐랄까, 좀 신기했다.
하긴 노자경은 카탈루냐에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쪽 언어로도 있었다. 울 승상님은 더 화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