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영상을 자막달린 버전으로 보다가, 시쳇말로, 빡쳤다. 내가 촉빠이기에 낙불사촉 드립에 성질이 뻗치고, 삼국지빠이기에 유선의 고인 드립과 사마소의 이상가 드립을 용서할 수 없다. 특히 고인 드립과 이상가 드립은 후한말부터 1세기 가까이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인생을 모조리 비웃고 부정하는 중2의 어조가 아닌가. 시대가 변했고 당대를 살아가는 주역들이 바뀌었기에 시대정신 또한 달라졌음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그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되는 거였다. 천통미션을 달성한 진나라는 어찌 되었던가? 반세기만에 오호십육국과 남북조시대라는, 중국사에서 최악의 막장 혼란기를 도래시키고 끝장나버렸다. 왜였을까? 단지 사마씨들이 등신이라서?
(Q : 왜 나는 제갈량 같은 신하가 없나요? A : 너님은 제갈량이 여럿 와도 답이 없음 ㄲㄲ)
전쟁은 정치의 한 수단일 뿐이나 나라의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다. 전란 전과 후의 나라는 같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역사는 동화가 아니다. 큰 전쟁을 이기거나 통일을 이룸으로써 해필리 에버애프터가 성취되진 않는다. 난세이기에 처방된 극약 같은 정책이 치세에도 통하는 것은 아닐 뿐더러, 전란 자체로 인하여 비롯된 혼란,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과 그로 인해 극도로 줄어드는 조세수입, 대외관계 재정립, 기타 등등 처리해야 할 문제가 무식하게 산적되어 있다. 그때 그때 문제되는 현상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정책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순되는 정책끼리 부딪치는 데다, 정책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이익집단의 불만을 해소하거나 사회내부적으로 순응시킬 방법 - 손해를 납득시키거나, 적어도 인내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댈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해소될 수 없는 불만이 계속 쌓이면 총칼을 쥐고 싸운 기억이 아직 선명한 이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수단으로 정치가 아니라 총칼을 택하는 것이 보다 쉽게 느껴질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6.25 이후로 우리 나라가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을 겪어야 했던 혼란기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때문에 전란을 극복한 정부가 신속하게 나라를 안정시키려면 전후의 나라를 어떤 모습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대개 그러한 지향점은 혼란기 중에 형성되며 혼란을 끝내기 위한 세력을 결집시키면서 명백해진다.
가령, 초한시절 보다 강성하고 보다 천통에 가까운 존재는 초패왕 항우였지만 결국 천하 제후와 인재와 민심은 유방에게 몰렸다. 유방 개인의 인품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조 유방은 진시황의 지독한 법가정책에 대항해 약법삼장으로 대표되는 유가정책을 내걸었고 그것이 전한 후한 400년의 기풍을 세웠다. 그를 따르는 집단에는 단지 중국통일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어떤 형태의 나라를 세울 것인가에 대해 제시하는 '이상'이 있었다. 고대의 중국에서는 그것을 명분 또는 대의라고 표현했다.
사마씨의 진나라에는 그것이 없었다.
(잠깐 딴소리. 소하가 장수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공신서열 1위로 세워진 것은 전쟁 내내 보여준 무시무시한 병참능력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 소하는 조참과 더불어 통일 후 법제를 정비하고 한나라 400년의 기틀을 닦은 재상이다. 유방이 소하에게서 가장 높이 산 것은 바로 그 점에 있는 게 아닐까? 진수가 제갈량의 기량을 소하에 비견한 것도 같은 의미로 생각된다)
삼국시대가 중국사적으로 갖는 의의는 화이잡거의 본격화에 있다. 곧, 한족과 이민족이 한데 뒤섞여 살기 시작한 것이다. 한나라의 이민족정책은 한 마디로 기미부절(覊縻不絶)이었다. 이민족은 한족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으니 양자를 분리하고 고삐를 채워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그러나 삼국이 정립되어감에 따라 중원을 벗어난 지역에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형성되면서 삼국에는 적극적으로 이민족과 접촉할 필요가 생겼다. 현지인이 자기 땅을 다스리게 한 촉의 정책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위의 정책은 한나라의 정책을 그대로 계수한 건지 이민족에 대해 적대적인 편이었다. (물론 가비능의 선비족이 끝까지 뻗댔고 촉의 북벌 시기에는 이민족들이 그에 호응하는 등, 위로서는 마냥 회유할 수만은 없는 사정이 있긴 했다.) 위로부터 선양받은 진도 체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이민족들은 마치 제정로마 후기의 게르만족처럼 꾸준히 중국 본토 안쪽으로 유입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팔왕의 난 때 이민족을 용병으로 끌어들였다가 오호십육국으로 이어진 것은 사마씨 황제들의 무능함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언제까지고 한족 중심의 세상이 이어질 것처럼 전제한 채 권력다툼을 하느라 화이잡거가 대세로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에 대응하지 못한 탓이었으리라. 위진남북조시대가 수나라의 통일로 끝나고 수나라도 삽질로 짧은 세월만에 망한 후 일어선 당나라는 선비족 출신의 황제가 지배했다. 당나라의 이민족 정책은 여전히 기미정책과 이이제이가 골자를 이룬다. 그러나 당나라에는 빈공과가 있었다. 이민족이 당나라의 관직에 진출할 기회는 문관 뿐 아니라 군권을 쥔 무관에까지 널리 인정되었다. 이민족을 무조건 분리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통일정부(당나라)가 화이잡거의 시대에 대해 내놓은 답이고 이상이었다. 그리고 당나라는 300년을 갔다.
(빈공과의 급제자 순위를 두고 신라 사람과 발해 사람이 싸운 이야기는 그냥 낄낄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발해는 어느 나라를 이었던가? 그 나라는 어떻게 멸망했던가?)
전란이 길어지면 백성들만 고달파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시대는 무력에 의한 통일만이 답이었던 건 아니었다. 새로운 나라의 모습에 대해 적절한 이상을 제시하지 못한 채 선행된 무력은 또 다른 무력집단에게 그 나라 또한 언제든지 아무 이상을 갖추지 못한 무력에 의해 뒤집어져도 괜찮다는 인식을 줬다. 결국 진나라는 그렇게 멸망했다. 엔딩 동영상에 나온 유선과 사마소의 드립은 그것을 간과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