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지는 자가 백묘이고 의양 신야 사람으로 한나라 사도 등우의 후손이다. 한나라 말 촉으로 들어갔지만 ... ... (촉서 등지전)
3. 사도 등우와 화희황후 등씨
출신지를 찾았으니 이번에는 등지의 먼 조상인 등우에 대해 찾아봤다. 다른 참고자료를 몰라 자치통감만 봤다.
등우는 남양 사람이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의 28장 중 서열1위로 책정된 공신이다. 손녀인 등수는 화희황후 등씨다. 젊어서는 현명함과 인덕으로 이름이 높았고 후에는 태후로서 섭정하는 지위에까지 올라가지만, 그때 친족과 환관을 중용한 것이 후에 후한이 기울어지는 원인으로 심화되는 모양이다. 섭정 후반에 대해서는 특히 외척 문제로 평가가 갈리는듯. 결국 등태후가 세우고 섭정한 안제는 등씨 외척을 축출하고 그중 상당수를 죽였다. 후에 생존자들을 복권해주긴 했지만 그때부터 등씨는 크게 기울었다고.
중웹 위키에는 등우와 등태후를 남양군 신야현 출신이라고 적어놓았다. 등태후 사후 몰락한 후손들이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신야를 중심으로 남양군에 돌아가 조용히 살았을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후한 말에 이르러 유표가 형주를 다스리던 시절 양양 부근에서 쟁쟁하던 호족 중에 등씨는 보이지 않는다. 등지의 대에 이를 때까지도 위세를 회복하지 못한 건가 싶다. 하긴, 등태후가 사망한 게 121년, 등지가 170년대생 추정이면 등태후 사후의 숙청을 아는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을 무렵이긴 하다.
(신야 바로 근처인 극양 출신의 등애도 어쩌면...? 그렇지만 등우 정도 되는 조상을 뒀다면 기록을 안 할 리가 없으니, 패스)
4. 후한말 신야 근방의 사정
184년의 황건난 이전에 신야 내지 남양군 전역에 걸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잉여력이 닿는 범위 내에서 삼국지에 남양이 처음 등장하는 사건은 원술과 관련된다. 동탁이 소제를 폐위하려 들 무렵 원술이 동탁에게 당할까 두려워 도망친 곳이 남양이었다.(189년) 원술 시절의 남양이 어땠느냐면 "남양의 호구수는 수백만 명이었지만, 원술은 사치스러웠고, 음란했으며, 욕망대로 행동해, 세금을 징수함에 있어서도 제한을 두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그것을 고통스러워했다.(원술전)" 라고 한다. ㅉㅉ
190년, 영제가 사망한 후 아직 반동탁연합이 본격화되기 전, 장사태수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를 죽였다. 손견의 배후에는 원술이 있으니, 아마도 자신이나 자기 사람을 세워 형주 전체를 삼킬 속셈이었나 보다. 조정은 왕예에 이어 유표를 형주자사로 임명했다. 물론 원술과 유표는 사이가 향기롭지 못했다. 유표가 원소와 연합하자 원술은 손견을 시켜 신야에서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 유표는 양양으로 퇴각했고, 양양을 포위한 손견은 강하에서 유표를 구원하러 온 황조에게 당해 전사했다.(효헌제기에 인용된 후한기. 손견이 전사한 해는 손견전에 의하면 192년, 사마광의 판단에 의하면 191년)
192년, 이각, 곽사가 유표를 형주목으로 올렸다.
193년 봄 유표가 원술의 보급로를 끊었다. 원술은 흑산적과 연합해 연주의 진류를 건드렸다. 아마도 남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어 그런 선택을 한 것 같은데, 결과는 po조조wer 의 철저한 응징이었다. 원술은 회남으로 쫓겨났다.
196년, 이번에는 남양에 동탁의 잔류세력에 속하는 장제가 들어왔다. 장제는 남양의 양(穰)을 공격하다 전사했다. 적이 죽었으니 축하할 일인데 묘하게도 이때의 유표는 장제의 남은 세력을 받아들이고 잘 대해줬다. 그때부터 장제를 이어 장수가 완에 주둔했다. 이후 조조와 장수가 대립할 때 유표가 보인 태도를 보면 부하는 아니고 객장 지위였나 싶다. 완은 주위에 방벽처럼 산을 끼고 있다. 내 생각인데 유표는 장수군을 동쪽의 예주에 있는 조조와 서쪽의 사례주를 휘젓는 이각, 곽사에 맞서는 방파제 쯤으로 사용하려 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무렵의 유표는 말이 형주목이지 남군과 강하군을 벗어난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상당히 약했다.
197년, 조조가 완을 쳤다. 장수는 항복했으나, 이 다음은 다들 아시는 바 추씨 이벤트와 절영 이벤트다. 조조는 분노한 장수에게 패해 퇴각했다. 이후 198년 여름까지 조조가 계속 장수를 공격해 꾸준히 남진하지만, 유표의 지원에 힘입어 장수는 끝내 방어에 성공한다. 198년 가을부터 조조는 여포와 원술을 공략하고, 유비를 정리하고, 관도대전 밑밥을 깔고(이때 장수가 조조에게 항복해 완을 비롯한 남양군의 일부가 넘어갔다. 유표가 의탁하러 온 유비를 신야에 주둔시킨 것은 장수를 완에 주둔시킨 것과 같은 이유라 생각한다. 이미 전례가 있어 전적으로 믿진 못했겠지만, 조조는 막고 봐야 하니까.) 하북을 평정하느라 형주에는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 어정쩡한 평화 상태가 208년 유표의 사망 때까지 계속되었다.
헉, 헉, 아무튼 남양군은 190년대 내내 전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조조가 원소를 상대하느라 눈을 돌린 그 10년 동안 겨우 숨을 돌렸으려니 싶다.
5. 동시대의 익주 사정
배송지가 속한서를 인용해 단 주석을 보면 유언이 익주자사 겸 목으로 임명된 것은 유우가 유주목, 유표가 형주목이 된 시기와 비슷하다 한다. 그렇지만 유우가 유주목이 된 것은 영제 때의 일이고 유표가 형주목이 된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헌제 때의 일이다. 또, 배주에서 다시 인용된 한"영제"기에 유언을 익주자사로 삼은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대략 유우가 유주목이 된 때 정도로 생각해야 할 성 싶다.(188년) 이후 유언은 마등과 연합해 이각, 곽사를 치려다 실패하고, 성도에서 앓다가 194년에 죽었다.(촉서 유언전, 효헌제기)
유장은 유언을 섬긴 신하들의 추대로 새 익주자사가 되었다. 유장의 치세는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사람됨에서 꽤나 얕보인 모양인데, 한중의 장로는 대놓고 무시했으며 유언 시절에 중임되었고 유장을 익주자사로 직접 추대한 사람이 익주 전역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자잘한 반란이 잦았다. 예전에 나는 유장이 아버지 대부터 할거한 게 있으니까 익주 내를 제법 다잡았으려니 했다. 웬걸, 장송이나 법정 같은 사람들이 유장을 배반하고 바깥에서 온 양반한테 붙은 게 이유가 있구나. 익주 인사가 형주 인사로 대표되는 유비 세력과 충돌을 일으켰다면 그건 유씨 부자에 대한 충성 때문이 아니라 그냥 외지 사람에 대한 반발이었구만. 그리하여 211년 유비가 입촉하는데... (...)
6. 그 시절의 등백묘 망상
농경민족의 특성인지도 모르겠는데, 중국인들은 되도록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역에 계속 눌러 살려 하는 성질이 있나 싶을 때가 있다. 앞서 등우를 언급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게다가 한나라의 관직임용은 향거리선제에 기반한다. 지방관들에 의한 "천거"인 만큼, 지역 호족의 입김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지역의 유력한 호족과 인맥을 맺으려면 제법 오래 눌러살며 명망을 쌓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신분이 높을수록 고향을 떠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등지는 조상 대대로 살았을 신야를 떠나 불안정한 익주로 들어갔다. 열전에 보이는 등지의 성품은 차라리 어그로를 끌지언정 어디 가서 아부를 할 사람은 못 된다. 그러니 제갈현 같은 재주를 부릴 수 있을 리도 없다. 실제로 익주에 들어간 등지는 유비를 만날 때까지 쭉 무명으로 지내야 했다. 이렇게 되면 시절이 하 수상하던 때라지만 그런 불이익을 감수해서라도 신야를 떠나야 할 일이 있었으리라 상상하게 된다.
190년대의 남양군은 엉망진창이었다. 당시의 굵직한 이벤트 중에서 신야가 위협받은 사건은 원술이 손견을 보냈을 때, 그리고 조조가 신야 바로 코앞인 양까지 내려와 장수를 포위했을 때 정도일 듯하다. 전에 신야와 융중 사이의 거리를 구하면서 첨부한 지도에도 나왔듯이, 신야 인근은 온통 평야지대다. 전쟁 나면 겁나서 살겠나. -_-; 외척 노릇할 때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몰락했다지만 등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티고 살았을 사람들이다. 나름 명문이던 시절의 기억이 있으니 원술 같은 작자를 참아내지 못하는 성깔도 있었을 터, 원술이 남양을 탈탈 털어먹던 189~193년 사이에 떠났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가능성인 조조의 침공 무렵을 보자. 197년 조조는 완에서 자기 실수 때문에 스스로 항복한 성과 자식을 잃었다. 그렇잖아도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서주에서 일을 낸 게 193, 194년의 일이다. 조조에게 그럴 생각이 없어도 그쪽 민심은 ㅈ됐다는 분위기였을 듯하다. 거기에 이런 기록까지 있다.
(추씨 이벤트, 절영 이벤트 후 퇴각하면서) 공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내가 장수 등을 항복시켰으나 실수로 인질을 잡아두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내가 패한 이유를 알만 하오. 제경들은 이를 잘 살펴 지금 이후로 다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무제기)
태조가 장수를 정벌하니 조인은 따로 주변 현들을 돌며 남녀 3천여명을 붙잡았다.(위서 조인전)
정말 ㅈ됐다는 분위기였을 듯싶다.(...) 그 때문인지, 197년 후반에는 조조가 점령한 남양의 여러 현들이 다시 모반해 장수에게 붙는 일이 일어난다.(무제기) (그때 조조가 대응해 보낸 장수는 조홍이었다. 잘 진압했느냐면, 물론 좌절했다.ㅋ 첨언하자면 당시 참전한 조조군 장수로 조인, 조홍, 악진, 우금, 허저를 찾아냈다. 아직 조조군 로스터에 장료, 장합이 추가되기 전이다. 게다가 북쪽에는 원소, 동쪽에는 여포, 남쪽에는 원술이 집적거리던 시절이다. 조조는 단기간에 장수를 제대로 밟아줄 생각으로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휘하 장수들을 닥닥 긁어모아 출병한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장수는 유표의 지원과 가후라는 끝내주는 모사의 버프를 받고 결정적으로 위태로울 때는 반대방향에서 여포가 어그로를 끌어준 덕을 봤다. 그렇지만 1군이라면 허한 것 같아도 1.5군보다는 강해 보이는 저 로스터를 상대로 장수는 그럭저럭 버텨냈다. 장수한테 독립군세로 쓸만한 장군이 있긴 했던가? 아무튼 장수 대단하다. -_-;) 장수가 그 세력에 비하면 정말 잘 버티긴 했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조조가 쳐들어오는 방향으로부터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야 일대는 평지다. 조조가 장수를 한창 쪼아댈 때 제일 멀리 내려간 곳이 양이고, 그 바로 옆이 신야다. 그곳 주민들에게는 원술의 공격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진 않은 호러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때에도 조조는 장수를 오래 공격하지 못하고 곧 허도로 돌아가 여포를 상대하게 되지만, 당시에는 조조가 지구 끝까지 장수를 쫓아가 족치려는 걸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 무렵 신야를 나가 익주로 갔을 가능성도 높다.
양과 신야의 거리가 저 정도다. 신야에서 양양이 60킬로니 양-신야 구간은 대략 30킬로 대이겠거니 싶다. 게다가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와 예주가 동쪽에 있으니 오가는 길에 신야를 쳐도 된다. 왜 조조가 신야를 손대지 않은 건지 갑자기 궁금해지네. 목표는 장수 한 사람이지 유표가 아니라고 어필함으로써 유표로부터 본격적으로 어그로를 끄는 것만은 피하려 했던 걸까?
7. 의문, 그리고 결어
어느 경로를 탔든 등지가 신야를 떠난 것은 유비가 신야에 입주하는 201년 전의 일일 거라 생각된다. 유비가 신야에 있는 동안에는 유명한 공신의 후손이 선조가 살던 땅을 버리고 갈 만한 사건사고가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의문인 게, 어떤 경우라도 등지에게는 가까운 양양에 간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양양을 성벽처럼 둘러싼 남양군과 강하군에 외부의 공격이 끊이지 않아서 그렇지 양양 자체는 그런대로 안정적이었다. 왜 양양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엉망진창이던 익주에 갔을까?
원술 시절이면 190년대 초반이고, 장수 시절이 190년대 후반이다.170년대생이라는 전제를 뒀을 때 190년대의 등지는 10대에서 20대 사이에 걸치는 파릇한 연배가 된다. 아직 파릇한 청소년인 등지가 독자적으로 익주에 넘어갔을 리는 없고, 가족 단위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 전자는 유언의 시대고, 후자는 유장의 시대다. 유장 때의 익주는 정말 뒤죽박죽이었지만 유언은 나름 야심을 품고 일부러 익주에 들어가고자 했다. 원하던 게 '왕노릇'이어서 문제지만, 형식만 잘 갖추면 고조 유방이 봉지의 왕으로 황족인 유씨만 세울 수 있도록 한 규칙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유언도 일단은 황족이니까. 등씨 집안이 익주를 선택했다면 유장이 아니라 유언을 보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봐야 금방 죽을 사람이었지만.
혹시 조조가 내려올 무렵에 떠난 거라면... 모르겠다. 그 경우에 내가 신야를 떠난 난민의 입장이었다면 일단 강 건너 양양으로 도망쳐 상황을 보지 막 정권이 이양되면서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던 익주로 갈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신야가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고, 양양에 눌러살 수도 있다. 게다가 양양은 교통이 좋아 어디든 갈 수 있다. 꼭 익주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뭐어, 어차피 기록이 없는 이상 가능성과 추측과 망상의 문제다. 무슨 난이 있어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나는 실컷 끄적였지만 다 허황된 추측질일 뿐이고 진실은 성도에 사는 친척 아즈씨가 불렀어요 'ㅅ'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알 게 뭐냐.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등지한테 관심 갖는 사람은 나 뿐일 텐데.(...)
p.s. 조인은 서주정벌 때도 참전했다. 독립된 기병을 이끌면서 태산군과 서주 여기저기를 휩쓸고 다녔는데, 학살이 청주병 이외의 조조군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조인군일 가능성이 꽤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항복한 장수가 조조의 잘못으로 반기를 들었을 때 인근 주민들을 잡아온 것도 조인군이다. 규범적으로만 말하자면 참 더러운 역할인데 조인은 조용히 따랐다. 조조가 조인을 신뢰하고 조인이 조조를 섬긴 것은 보통 신뢰관계가 아니었을 듯.
p.s.2 근데 팬픽질을 위해 망상하는 입장에서는 유비가 신야에 들어올 무렵까지도 등지가 거기서 살았더라면 재미있어지겠지 싶은데. 양양 근처를 쏘다니다 미래에 상관이 될 건방진 청년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도 있고, 신야를 배회하다 역시 미래에 직속상관이 될 아직은 젊은 장군님을 미리 볼 수도 있고.(,,,)
1. 등지의 생몰연도
내가 그런 걸 알면 중국 사학계에서 돈 주고 모셔가지 않을까?(...)
알려진 바, 등지는 생년은 불명이고 251년에 사망했다. 등지가 나이 가지고 개드립을 친 것이 247년의 일인데 이때 이미 일흔이었다 하니(촉서 종예전) 생년을 따지려면 251-(70+n)을 해야지 싶다. 제갈량보다 연상인 것은 확실하다. 제갈량이 181년생이니 등지는 170년대생일 가능성이 높다.
2. 의양? 신야???
진수가 쓴 등지전에는 등지가 의양 신야 사람이라 적혀있다. 의양? 자치통감에는 등지가 의양 사람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권교수님이 단 주석에 의하면 지금의 하남성 信陽현이라고. 그런데 현대의 신양은 한대의 형주 강하군에 위치한다. 군국단위 행정구역에서 "의양"이라는 지명은 후한말 지도나 삼국시대 지도에는 없다. 그걸 발견한 곳은 좀 엉뚱한 지도였으니.
서진 시대 지도였다. 진수 이 양반아! 예끼! -_-;
의양이 어디인지 몰라 이 포스팅을 비밀글로 돌리고 며칠 삽질했는데 갤에 문의하니 바로 해결되었다. 의양의 행정단위와 위치를 추측하느라 설왕설래한 내용을 싹 지우니 매우 홀가분하다. (참. 지도에서 극양에 친 빨간 상자는 의미 두지 마시길. 의양의 위치를 찾을 때 등지전과 등애전 중심으로 머리를 쥐어뜯은 게 억울해서 찍은 거임. 파성넷 등애전에는 등애가 의양군 조양현 사람이라고 옮겨졌던데 역자의 실수 아닌가 싶음. 극양현임) 여하간! 등지의 출신지는 후한 기준으로 남양군 신야현이다.
3. 사도 등우와 화희황후 등씨
출신지를 찾았으니 이번에는 등지의 먼 조상인 등우에 대해 찾아봤다. 다른 참고자료를 몰라 자치통감만 봤다.
등우는 남양 사람이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의 28장 중 서열1위로 책정된 공신이다. 손녀인 등수는 화희황후 등씨다. 젊어서는 현명함과 인덕으로 이름이 높았고 후에는 태후로서 섭정하는 지위에까지 올라가지만, 그때 친족과 환관을 중용한 것이 후에 후한이 기울어지는 원인으로 심화되는 모양이다. 섭정 후반에 대해서는 특히 외척 문제로 평가가 갈리는듯. 결국 등태후가 세우고 섭정한 안제는 등씨 외척을 축출하고 그중 상당수를 죽였다. 후에 생존자들을 복권해주긴 했지만 그때부터 등씨는 크게 기울었다고.
중웹 위키에는 등우와 등태후를 남양군 신야현 출신이라고 적어놓았다. 등태후 사후 몰락한 후손들이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신야를 중심으로 남양군에 돌아가 조용히 살았을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후한 말에 이르러 유표가 형주를 다스리던 시절 양양 부근에서 쟁쟁하던 호족 중에 등씨는 보이지 않는다. 등지의 대에 이를 때까지도 위세를 회복하지 못한 건가 싶다. 하긴, 등태후가 사망한 게 121년, 등지가 170년대생 추정이면 등태후 사후의 숙청을 아는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을 무렵이긴 하다.
(신야 바로 근처인 극양 출신의 등애도 어쩌면...? 그렇지만 등우 정도 되는 조상을 뒀다면 기록을 안 할 리가 없으니, 패스)
4. 후한말 신야 근방의 사정
184년의 황건난 이전에 신야 내지 남양군 전역에 걸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잉여력이 닿는 범위 내에서 삼국지에 남양이 처음 등장하는 사건은 원술과 관련된다. 동탁이 소제를 폐위하려 들 무렵 원술이 동탁에게 당할까 두려워 도망친 곳이 남양이었다.(189년) 원술 시절의 남양이 어땠느냐면 "남양의 호구수는 수백만 명이었지만, 원술은 사치스러웠고, 음란했으며, 욕망대로 행동해, 세금을 징수함에 있어서도 제한을 두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그것을 고통스러워했다.(원술전)" 라고 한다. ㅉㅉ
190년, 영제가 사망한 후 아직 반동탁연합이 본격화되기 전, 장사태수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를 죽였다. 손견의 배후에는 원술이 있으니, 아마도 자신이나 자기 사람을 세워 형주 전체를 삼킬 속셈이었나 보다. 조정은 왕예에 이어 유표를 형주자사로 임명했다. 물론 원술과 유표는 사이가 향기롭지 못했다. 유표가 원소와 연합하자 원술은 손견을 시켜 신야에서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 유표는 양양으로 퇴각했고, 양양을 포위한 손견은 강하에서 유표를 구원하러 온 황조에게 당해 전사했다.(효헌제기에 인용된 후한기. 손견이 전사한 해는 손견전에 의하면 192년, 사마광의 판단에 의하면 191년)
192년, 이각, 곽사가 유표를 형주목으로 올렸다.
193년 봄 유표가 원술의 보급로를 끊었다. 원술은 흑산적과 연합해 연주의 진류를 건드렸다. 아마도 남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어 그런 선택을 한 것 같은데, 결과는 po조조wer 의 철저한 응징이었다. 원술은 회남으로 쫓겨났다.
196년, 이번에는 남양에 동탁의 잔류세력에 속하는 장제가 들어왔다. 장제는 남양의 양(穰)을 공격하다 전사했다. 적이 죽었으니 축하할 일인데 묘하게도 이때의 유표는 장제의 남은 세력을 받아들이고 잘 대해줬다. 그때부터 장제를 이어 장수가 완에 주둔했다. 이후 조조와 장수가 대립할 때 유표가 보인 태도를 보면 부하는 아니고 객장 지위였나 싶다. 완은 주위에 방벽처럼 산을 끼고 있다. 내 생각인데 유표는 장수군을 동쪽의 예주에 있는 조조와 서쪽의 사례주를 휘젓는 이각, 곽사에 맞서는 방파제 쯤으로 사용하려 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무렵의 유표는 말이 형주목이지 남군과 강하군을 벗어난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상당히 약했다.
197년, 조조가 완을 쳤다. 장수는 항복했으나, 이 다음은 다들 아시는 바 추씨 이벤트와 절영 이벤트다. 조조는 분노한 장수에게 패해 퇴각했다. 이후 198년 여름까지 조조가 계속 장수를 공격해 꾸준히 남진하지만, 유표의 지원에 힘입어 장수는 끝내 방어에 성공한다. 198년 가을부터 조조는 여포와 원술을 공략하고, 유비를 정리하고, 관도대전 밑밥을 깔고(이때 장수가 조조에게 항복해 완을 비롯한 남양군의 일부가 넘어갔다. 유표가 의탁하러 온 유비를 신야에 주둔시킨 것은 장수를 완에 주둔시킨 것과 같은 이유라 생각한다. 이미 전례가 있어 전적으로 믿진 못했겠지만, 조조는 막고 봐야 하니까.) 하북을 평정하느라 형주에는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 어정쩡한 평화 상태가 208년 유표의 사망 때까지 계속되었다.
헉, 헉, 아무튼 남양군은 190년대 내내 전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조조가 원소를 상대하느라 눈을 돌린 그 10년 동안 겨우 숨을 돌렸으려니 싶다.
5. 동시대의 익주 사정
배송지가 속한서를 인용해 단 주석을 보면 유언이 익주자사 겸 목으로 임명된 것은 유우가 유주목, 유표가 형주목이 된 시기와 비슷하다 한다. 그렇지만 유우가 유주목이 된 것은 영제 때의 일이고 유표가 형주목이 된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헌제 때의 일이다. 또, 배주에서 다시 인용된 한"영제"기에 유언을 익주자사로 삼은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대략 유우가 유주목이 된 때 정도로 생각해야 할 성 싶다.(188년) 이후 유언은 마등과 연합해 이각, 곽사를 치려다 실패하고, 성도에서 앓다가 194년에 죽었다.(촉서 유언전, 효헌제기)
유장은 유언을 섬긴 신하들의 추대로 새 익주자사가 되었다. 유장의 치세는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사람됨에서 꽤나 얕보인 모양인데, 한중의 장로는 대놓고 무시했으며 유언 시절에 중임되었고 유장을 익주자사로 직접 추대한 사람이 익주 전역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자잘한 반란이 잦았다. 예전에 나는 유장이 아버지 대부터 할거한 게 있으니까 익주 내를 제법 다잡았으려니 했다. 웬걸, 장송이나 법정 같은 사람들이 유장을 배반하고 바깥에서 온 양반한테 붙은 게 이유가 있구나. 익주 인사가 형주 인사로 대표되는 유비 세력과 충돌을 일으켰다면 그건 유씨 부자에 대한 충성 때문이 아니라 그냥 외지 사람에 대한 반발이었구만. 그리하여 211년 유비가 입촉하는데... (...)
6. 그 시절의 등백묘 망상
농경민족의 특성인지도 모르겠는데, 중국인들은 되도록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역에 계속 눌러 살려 하는 성질이 있나 싶을 때가 있다. 앞서 등우를 언급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게다가 한나라의 관직임용은 향거리선제에 기반한다. 지방관들에 의한 "천거"인 만큼, 지역 호족의 입김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지역의 유력한 호족과 인맥을 맺으려면 제법 오래 눌러살며 명망을 쌓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신분이 높을수록 고향을 떠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등지는 조상 대대로 살았을 신야를 떠나 불안정한 익주로 들어갔다. 열전에 보이는 등지의 성품은 차라리 어그로를 끌지언정 어디 가서 아부를 할 사람은 못 된다. 그러니 제갈현 같은 재주를 부릴 수 있을 리도 없다. 실제로 익주에 들어간 등지는 유비를 만날 때까지 쭉 무명으로 지내야 했다. 이렇게 되면 시절이 하 수상하던 때라지만 그런 불이익을 감수해서라도 신야를 떠나야 할 일이 있었으리라 상상하게 된다.
190년대의 남양군은 엉망진창이었다. 당시의 굵직한 이벤트 중에서 신야가 위협받은 사건은 원술이 손견을 보냈을 때, 그리고 조조가 신야 바로 코앞인 양까지 내려와 장수를 포위했을 때 정도일 듯하다. 전에 신야와 융중 사이의 거리를 구하면서 첨부한 지도에도 나왔듯이, 신야 인근은 온통 평야지대다. 전쟁 나면 겁나서 살겠나. -_-; 외척 노릇할 때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몰락했다지만 등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티고 살았을 사람들이다. 나름 명문이던 시절의 기억이 있으니 원술 같은 작자를 참아내지 못하는 성깔도 있었을 터, 원술이 남양을 탈탈 털어먹던 189~193년 사이에 떠났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가능성인 조조의 침공 무렵을 보자. 197년 조조는 완에서 자기 실수 때문에 스스로 항복한 성과 자식을 잃었다. 그렇잖아도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서주에서 일을 낸 게 193, 194년의 일이다. 조조에게 그럴 생각이 없어도 그쪽 민심은 ㅈ됐다는 분위기였을 듯하다. 거기에 이런 기록까지 있다.
(추씨 이벤트, 절영 이벤트 후 퇴각하면서) 공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내가 장수 등을 항복시켰으나 실수로 인질을 잡아두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내가 패한 이유를 알만 하오. 제경들은 이를 잘 살펴 지금 이후로 다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무제기)
태조가 장수를 정벌하니 조인은 따로 주변 현들을 돌며 남녀 3천여명을 붙잡았다.(위서 조인전)
정말 ㅈ됐다는 분위기였을 듯싶다.(...) 그 때문인지, 197년 후반에는 조조가 점령한 남양의 여러 현들이 다시 모반해 장수에게 붙는 일이 일어난다.(무제기) (그때 조조가 대응해 보낸 장수는 조홍이었다. 잘 진압했느냐면, 물론 좌절했다.ㅋ 첨언하자면 당시 참전한 조조군 장수로 조인, 조홍, 악진, 우금, 허저를 찾아냈다. 아직 조조군 로스터에 장료, 장합이 추가되기 전이다. 게다가 북쪽에는 원소, 동쪽에는 여포, 남쪽에는 원술이 집적거리던 시절이다. 조조는 단기간에 장수를 제대로 밟아줄 생각으로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휘하 장수들을 닥닥 긁어모아 출병한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장수는 유표의 지원과 가후라는 끝내주는 모사의 버프를 받고 결정적으로 위태로울 때는 반대방향에서 여포가 어그로를 끌어준 덕을 봤다. 그렇지만 1군이라면 허한 것 같아도 1.5군보다는 강해 보이는 저 로스터를 상대로 장수는 그럭저럭 버텨냈다. 장수한테 독립군세로 쓸만한 장군이 있긴 했던가? 아무튼 장수 대단하다. -_-;) 장수가 그 세력에 비하면 정말 잘 버티긴 했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조조가 쳐들어오는 방향으로부터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야 일대는 평지다. 조조가 장수를 한창 쪼아댈 때 제일 멀리 내려간 곳이 양이고, 그 바로 옆이 신야다. 그곳 주민들에게는 원술의 공격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진 않은 호러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때에도 조조는 장수를 오래 공격하지 못하고 곧 허도로 돌아가 여포를 상대하게 되지만, 당시에는 조조가 지구 끝까지 장수를 쫓아가 족치려는 걸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 무렵 신야를 나가 익주로 갔을 가능성도 높다.
양과 신야의 거리가 저 정도다. 신야에서 양양이 60킬로니 양-신야 구간은 대략 30킬로 대이겠거니 싶다. 게다가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와 예주가 동쪽에 있으니 오가는 길에 신야를 쳐도 된다. 왜 조조가 신야를 손대지 않은 건지 갑자기 궁금해지네. 목표는 장수 한 사람이지 유표가 아니라고 어필함으로써 유표로부터 본격적으로 어그로를 끄는 것만은 피하려 했던 걸까?
7. 의문, 그리고 결어
어느 경로를 탔든 등지가 신야를 떠난 것은 유비가 신야에 입주하는 201년 전의 일일 거라 생각된다. 유비가 신야에 있는 동안에는 유명한 공신의 후손이 선조가 살던 땅을 버리고 갈 만한 사건사고가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의문인 게, 어떤 경우라도 등지에게는 가까운 양양에 간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양양을 성벽처럼 둘러싼 남양군과 강하군에 외부의 공격이 끊이지 않아서 그렇지 양양 자체는 그런대로 안정적이었다. 왜 양양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엉망진창이던 익주에 갔을까?
원술 시절이면 190년대 초반이고, 장수 시절이 190년대 후반이다.170년대생이라는 전제를 뒀을 때 190년대의 등지는 10대에서 20대 사이에 걸치는 파릇한 연배가 된다. 아직 파릇한 청소년인 등지가 독자적으로 익주에 넘어갔을 리는 없고, 가족 단위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 전자는 유언의 시대고, 후자는 유장의 시대다. 유장 때의 익주는 정말 뒤죽박죽이었지만 유언은 나름 야심을 품고 일부러 익주에 들어가고자 했다. 원하던 게 '왕노릇'이어서 문제지만, 형식만 잘 갖추면 고조 유방이 봉지의 왕으로 황족인 유씨만 세울 수 있도록 한 규칙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유언도 일단은 황족이니까. 등씨 집안이 익주를 선택했다면 유장이 아니라 유언을 보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봐야 금방 죽을 사람이었지만.
혹시 조조가 내려올 무렵에 떠난 거라면... 모르겠다. 그 경우에 내가 신야를 떠난 난민의 입장이었다면 일단 강 건너 양양으로 도망쳐 상황을 보지 막 정권이 이양되면서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던 익주로 갈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신야가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고, 양양에 눌러살 수도 있다. 게다가 양양은 교통이 좋아 어디든 갈 수 있다. 꼭 익주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뭐어, 어차피 기록이 없는 이상 가능성과 추측과 망상의 문제다. 무슨 난이 있어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나는 실컷 끄적였지만 다 허황된 추측질일 뿐이고 진실은 성도에 사는 친척 아즈씨가 불렀어요 'ㅅ'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알 게 뭐냐.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등지한테 관심 갖는 사람은 나 뿐일 텐데.(...)
p.s. 조인은 서주정벌 때도 참전했다. 독립된 기병을 이끌면서 태산군과 서주 여기저기를 휩쓸고 다녔는데, 학살이 청주병 이외의 조조군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조인군일 가능성이 꽤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항복한 장수가 조조의 잘못으로 반기를 들었을 때 인근 주민들을 잡아온 것도 조인군이다. 규범적으로만 말하자면 참 더러운 역할인데 조인은 조용히 따랐다. 조조가 조인을 신뢰하고 조인이 조조를 섬긴 것은 보통 신뢰관계가 아니었을 듯.
p.s.2 근데 팬픽질을 위해 망상하는 입장에서는 유비가 신야에 들어올 무렵까지도 등지가 거기서 살았더라면 재미있어지겠지 싶은데. 양양 근처를 쏘다니다 미래에 상관이 될 건방진 청년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도 있고, 신야를 배회하다 역시 미래에 직속상관이 될 아직은 젊은 장군님을 미리 볼 수도 있고.(,,,)
Posted by 양운/견습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