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연의에서 그 말을 득템해오는 게 상산남자인데? -_-;
이적은 자가 기백이며 산양 사람이다.(촉서 이적전)
1. 일대기
파성의 원문자료실에서 이적전에 든 글자수를 세보았다. 149자, 3줄 반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적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면 그렇게 부실하다는 촉서에 자기 이름으로 열전을 남길 리가 없다. 일단 있는 걸 정리해봤다.
촉서 이적전에 적힌 행적은 대강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a : 유표에게 의탁한 형주 시절. 유표가 죽자 곧바로 유비를 따름(208)
b : 유비의 입촉 때 수행(211). 평정 후(214) 동오에 사자로 파견(215 이후)
c : 촉과 제정에 참여
이적전에는 "젊었을 때부터 같은 고향의 진남장군 유표에게 의탁하며 살았다"고 적혀있다. 유표가 진남장군에 제수된 것은 192년에서 195년 사이의 일이다. 특히 192년 무렵에는 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다.
초평3년(192) 봄 계교 전투
4월 동탁 주살, 왕윤 집권
청주 황건적이 연주 침입, 조조에 의해 격파
5월 이각, 곽사 등등 동탁의 부곡장들이 반란 일으켜 장안 공격
6월 장안 함락. 왕윤은 살해되고 여포는 도주 (이상 효헌제기)
이각, 곽사는 헌제를 손에 넣자 우선 장안 근처의 군사력 있는 세력가들한테 벼슬을 더해줬다. 남양의 원술을 좌장군에(원술전), 양양의 유표를 형주목 진남장군에 임명하는 식이었다(유표전). 물론, 이각, 곽사의 정치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유표가 진남장군이 된 것이 이각, 곽사의 쿠데타가 성공한 192년, 늦어도 193년의 일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적은 아무리 빨라도 192년 이후에야 같은 연주 산양군 출신의 유표에게 의탁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편, 이적전은 저 문장의 바로 뒷부분에 "유비가 형주에 있을 때 항상 왕래하여 자신을 의탁했다"고 적는다. 왕래했다는 것은 이적이 계속 양양에 있으면서 유비가 있는 신야를 오갔다는 의미로 보인다. 양양과 신야 사이는 60km 거리다. 대놓고 유비를 좋아라하는 식객을 내치지 않은 유표가 대단하다 해야 할지, 원래 유표나 양양의 호족들이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이적의 입지가 좋지 않았다는 것인지. 어쨌든, 이적은 아무리 늦어도 유비가 신야에서 도망친 208년 전에 고향을 떠나 유표에게 의탁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유표에게 의탁한 것이 "젊었을 때부터"라 했으니, 이적이 형주에서 지낸 시간은 제법 길 것이다. 유비가 신야에 들기 전(201)에 이미 형주에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원문에서는 유표에게 의탁할 때 이적의 나이를 두고 그냥 少라고 표현했던데, 서른이 넘은 사람한테 그런 표현을 쓸 것 같진 않다. 유표에게 의탁한 때를 유비의 신야 입성 이전인 190년대라 가정한다면, 그 무렵의 이적은 20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비의 신야 시절인 201~ 208년 사이에는 가정이 있고 경제적 기반도 어느 정도 갖춘 30대 이상이었을 것이다.
2. 출신?
-유표는 당대에 팔준이라 불리는 명사 중 하나였다. 평판이 곧 벼슬길에 직결되던 시절인지라 식객에게 후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200년대라면 모를까, 190년대의 양양 일대는 좀 어수선했다.
190년대 초에는 원술이 양양을 공격했다.(그 과정에서 손견이 전사했다.) 193년에 원술을 쫓아냈더니 196년에는 이각, 곽사 세력에 속했던 장제가 완으로 내려왔다. 장제 때는 잘 수습했지만, 197년에는 조조가 그 완을 치러 들어와 1년에 걸쳐 장수와 싸웠다. 유표는 장수를 지원하는 입장이었다. 양양 근처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이렇다. 형주 바깥에서는 군웅할거기가 피크를 맞아 하북과 중원에서 대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깝게는 서서, 배잠처럼 형주 바로 옆에 붙은 예주와 사례주에서 피난왔고 멀리는 제갈량의 경우처럼 서주에서까지 난민이 들어왔다.
육손을 이어 오나라의 승상이 된 보즐은 본래 서주 사람인데 190년대의 난을 피해 양주로 도망쳤다. 거기서 보즐은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으며, 그 지역 호족들의 텃세에 꽤 심하게 시달려야 했다.(오서 보즐전) 보즐의 일가친척인 보부인은 비록 정식 황후가 되진 못했지만 손권이 가장 아낀 아내였다. 반쯤은 창업군주인 손권이 아무 여자와 혼인할 리는 없다. 보즐이 양주에서 만든 서주 출신의 인맥에서 손권에게 중용된 인물들이 많은데(ex.제갈근) 평민이거나 한미한 가문 출신이 그런 인맥에 쉽게 낄 수 있을 리도 없다. 보즐의 집안은 피난민 처지여도 서주에서 어느 정도 지체가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런 사람도 연줄 없이 도망쳐 들어간 곳에서는 푸대접 받고 고생해야 했다. 형주로 도망친 난민들도 처지가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재화는 한정되어 있는데 갑작스레 문화조차 살짝 다른 유입종자가 잔뜩 들어와 자리잡고 나눠 먹으려 들면 올드비들은 신경질난다. 형주 토박이들은 난민 출신들을 홀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패악스러운 게 아니라, 인지상정이다.
190년대의 양양은 이렇듯 안팎으로 어수선했으리라 생각한다. 유표가 호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도 아무나 받아줄 처지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이적이 왜 유표에게 의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타고나길 의협의 성품이 있어 떠돌다 보니 닿았을 수도 있고, 이 역시 중원의 난을 피해 도망온 처지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런 시대이다 보니, 어지간히 대단한 재주나 명망을 지닌 게 아니라면 출신도 뭣도 분명치 않은 사람을 단지 동향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진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 보는 눈이 높은 유비가 형주 분쟁으로 까다로운 시기에 손권한테 사자로 보낼 정도의 실력은 있지만, 법정처럼 재지가 특출나 중용되진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한창 젊었던 유표 시절에 유표 쪽에서 재주 하나만 보고 덥석 받을 만큼 명성을 떨치진 못했을 것이다. 실은 산양에서 중간은 가는 호족 출신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이적이 산양에서 괜찮은 집안 출신이었으리라 생각하는 다른 이유는 그가 촉과를 제정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적전에 적힌 명단에는 제갈량, 법정, 유파, 이엄 같은 화려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적은 이들과 함께 국법을 만들었다. 이 사람들을 보면,
제갈량 : 일단 형주. 유비 패밀리가 형주에서 영입한 신진들의 대표
법정 : 일단 익주. 유장 시대의 아싸, 유비의 입촉에 1등공신
유파 : 형주->익주 유입. 레알 안티유비. 유비가 싫어서 조조한테 사관하고 유비를 피해서 도망다녔으나...
이엄 : 형주->익주 유입. 형주에선 유표에게, 익주에선 유장에게 중용. 익주 호족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 여러 의미로 알 수 없는 인간 -_-;
이런 느낌이다. 분류별로 참 골고루 섞여 있다.(그리고 유비의 도량에 감탄하게 된다.) 그럼 이적은?
이적 : 일단 형주. 유비 패밀리의 올드비 대표
이게 아닌가 싶다. 뉴비와 올드비의 기준은 신야다. 위의 넷에는 그런 의미에서 유비 패밀리의 올드비가 없다.
공부를 하려면 환경이 받쳐줘야 한다. 아직 본격적인 귀족계급이 출현한 건 아니지만, 저 시대에는 좋은 인재를 키우는 토양이 가문빨이었다. 게다가 효렴과 무재에 지역 명사들의 평판이 크게 작용하는지라 입신양명을 노리는 선비라면 고향땅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대로 영천의 별이 된 순씨라든가, 200년 전 조상이 신야 출신인데 자신도 신야에서 자란 등백묘라든가.) 제갈량이 형주 인맥을 대거 끌어들이기 전까지 유비 패밀리에 '선비'가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다. 유비는 너무 자주 근거지를 잃고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런 유비 패밀리의 올드비 중에서 간손미를 제치고 법을 만드는 자리에 보냈다면, 이적에게 그 정도로 학문적 소양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물론 뒷받침되는 환경이 있었을 테고.
3. 왜 형주로 갔나?
이적이 산양에서 중간은 가는 집안 출신이었으리라 전제했을 때, 그렇다면 왜 젊은 시절의 그가 유표에게 의탁했는지로 돌아가게 된다. 서서가 영천에서 도망친 것처럼 의협스러운 사고를 치고 산양을 떠나야만 할 일이 있었을까? 아니면, 역시 난민이었을까?
이적전에 적힌 것이 너무 적어서 이 부분은 상상의 영역인 것 같다. 가정 위에 계속 가정을 쌓고 있어 불안하지만, 두 가지 정도 가정해봄직한 사건은 있다.
1) 유표가 진남장군이 된 192년에는 정말 굵직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그 중 하나가 청주 황건적의 연주 침입이다.
청주 황건의 무리들 백만 명이 연주로 들어와 임성상 정수를 죽이고 진로를 돌려 동평으로 들어왔다.(무제기)
저 다음에 이어지는 기록은 당시 연주자사였던 유대가 포신의 진언을 듣지 않고 나섰다가 청주 황건적에게 죽은 일이다. 저 백만 명이 순수 전투원만으로 이루어지진 않았겠지만 규모 자체로 이미 재앙이다. 실제로 일국의 상과 일개 주의 자사가 휘말려 죽었다. 연주의 주민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지도에서 임성과 동평, 내친 김에 산양의 위치를 찾아보았다.
내가 산양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것 같다.
아직 조조가 나서지 않은 시점에서 임성까지 내려간 황건적이 도로 북진한 이유는 모르겠다. 청주가 황폐해져 밖으로 나간 황건적이 연주에서도 먹을 것을 못 찾고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한다. 삼국지에서 4월이면 지금 달력으로 보릿고개 무렵의 초여름일 텐데 백만 명이 먹을 게 어디 있나. 어쨌든 그건 뒤의 일이고, 황건적이 임성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이미 피난행렬이 연주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단, 가까운 예주나 서주가 아니라 형주까지 갈 일이었는지는 설명이 필요하다. 특히 192년의 서주라면 도겸이 황건적을 일찍 정리한 터라 멀리 사례주에서까지 난민이 몰려들고 있었다.
2) 그 도겸을 밟는다며 조조가 서주를 박살내던 194년, 연주에서 난이 일어났다. 진궁과 장막이 여포를 끌어들인 것이다. 진류태수 장막은 조조가 서주에 처음 출병하면서 자신이 죽을 경우 가족들을 부탁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배반한 이유는 삼국지에 적혀있지 않다. 다만,
장막이 진궁과 함께 여포를 맞아들이자 군현들이 모두 호응했다.(무제기)
서주학살이 제갈량의 초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신나게 팬픽을 끄적여왔지만(실은 진짜로 서주 출병&학살의 난민일 거라 믿고 있다. 정황이 그런걸? -_-a), 역사적 사실로서 언급할 때는 좀 조심스럽다. 내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다. 이유가 어찌 됐건 서주 출신으로 그 전란을 경험했으면서도 조조에게 사관한 사람들의 예가 없지 않다. 백성들은 치를 떤 듯한데 지배계급은 어떻게 봤을지 모르겠다. 연주 사람들이 서주 문제로 들고 일어났을 것 같진 않다는 이야기다. 우선 자기들 일이 아니니까.
가장 가능성 높은 이유는 청주병이다. 항복한 청주 황건적을 받아들일 무렵 조조는 공식적으로는 연주에 속하는 군 하나를 맡은 태수에 불과했다. 연주자사 유대가 죽고 포신이 조조를 택한 천운으로 사실상 연주의 목처럼 행세하게 되었지만, 아직은 온전히 자기 기반으로 삼진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백만 명의 굶주린 입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그 입들은 연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까지 했다.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전란을 피해 도망쳐온 피난민들조차 토박이들한테 냉대받는데 하물며 진짜 살인강도 경력이 있는 무리임에야. 심지어 조조는 바로 그 다음 해에 도겸을 잡겠다며 서주를 쳤다. 청주 황건적 문제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연주를 다잡기는 커녕 군량부터 닥닥 긁어 전쟁하러 나간 것이다. 백만 청주병을 받아들인 것은 조조답게 멀리 보고 대담하며 리스크가 높은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연주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주에서 여포의 주된 근거지는 산양이었던 것 같다. 조조와 여포는 산양을 중심으로 1년여에 걸쳐 싸웠다. 어쨌거나 근거지이기 때문에 조조도 서주를 밟던 식으로 처리할 순 없었을 것이다. 여포는 열심히 퇴치해도 연주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관대했으리라. 그렇지만 그건 전투가 끝난 후의 일이다. 산양의 주민들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일단 도망치고 봐야 했을 것이다.
이적이 유표에게 의탁한 게 190년대 초반이라면, 청주 황건적의 침입이나 여포 문제 때문에 형주까지 흘러간 난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후자 쪽이 좀 더 가능성 있지 않을까 한다. 192년이면 유표도 제 코가 석 자인 때라, 바깥에서 보기에 양양이 마음 편히 도망칠 곳이었을 것 같진 않다.
190년대 후반일 경우라면 글쎄, 멀고 먼 양양까지 갈 만한 사건이 있는지 모르겠다. 우선 조조는 협천자와 완성 사건 때문에 연주 바깥에서 바빴다. 관도대전의 전초전이라면 황하 유역에서 벌어졌는데 산양은 그쪽과 약간 거리가 있지 싶다. 내가 이 무렵 연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놓친 게 아니라면, 이적이 안티조조였다 정도 밖에 그럴싸한 이유를 떠올리지 못하겠다.;
4. 208년
어찌 됐건 이적은 건안 연간에는 양양에 있었을 것이다. 관도대전이 일어난 200년 무렵, 양양 일대는 평화로웠다. 장수가 조조한테 항복하면서 완을 잃은 건 아쉬웠겠지만, 그 조조가 하북의 원소와 싸우느라 형주를 건드릴 수 없었다. 유표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땅은 평화로웠지만 양양 호족들은 그렇지 못했다. 관도대전 직전, 한숭과 괴월은 이 틈에 거병하든가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진언했다. 장수의 예를 보고 느낀 바가 있었나 보다. 일전에 선주전 때문에 자치통감을 정리하면서 적어둔 걸 보니 등희가 원소와의 동맹을 반대한 건 198년, 한숭이 허도를 방문한 건 199년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유표가 한숭을 의심해 죽이려 할 때 채씨부인이 말리며 한 말을 보면 양양 호족들은 이때 이미 조조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때에 유비가 나타났다. 조조가 그리 후하게 대해줬는데도 영웅논담 족구하라며 서주에서 거병해버리고, 관도대전의 승리로 모두가 조조의 우세를 점칠 때 혼자 허도를 습격하겠다며 여남에서 닥돌했다가 장렬히 산화할 뻔한 그 유비 말이다. 한술 더 떠 유표는 유비를 받아줬다! 양양 호족들이 육성으로 미친!!! 이라고 내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왜 역사 속의 유비가 서주거병 이후로 그토록 평생을 걸고 안티조조를 외쳤던 건지, 촉빠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팬픽질을 위해 망상해둔 건 있는데 여기서 풀 거리는 아니고, 확실한 건, 유표의 어영부영한 태도 때문에 양양의 여론도 208년 그때까지 쭉 갈라져 있었다는 것이다. 잃을 게 많았던 양양 호족들은 대세가 된 조조를 지지하거나, 유비가 떠났을 때 그냥 조조한테 갔다. 한숭, 괴월처럼 관도대전 이전부터 대세와 상관없이 조조를 높이 평가해 귀의할 것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한편으로 같은 양양 호족이어도 안티조조를 외친 사람들 또한 없지 않아서, 방통 같은 경우에는 주유가 사망했을 때 직접 운구하더니 조조가 점거 중인 고향이 아니라 아직 세력이 약한 유비한테 갔다. 호족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왕위라는 사람은 항복을 받아낸 직후라 조조군이 해이해졌을 이때를 틈타 조조를 생포하자며 진언하기도 했다.(유표전에 인용된 한진춘추) 심지어 연의를 통해 어린애 이미지가 굳어져 있는 유종조차도 괴월, 한숭 등이 조조한테 귀의하자고 진언했을 때 처음에는 반대했다. 유표가 했던 그대로 형주땅을 보전하면서 관망하자는 것이었다.(유표전)
이적은 후자였다. 굳이 신야에 가서 살지 않고 먼 길을 왕복한 것은 낭만적으로 생각하면 거둬준 유표에 대한 의리일 테고,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형주에서 지내는 동안 가족과 자신의 삶의 터전을 양양에 만들어서가 아닐까 한다. 조조가 들이닥치고 유비는 신야를 버린 그때, 이적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유비냐 양양의 삶이냐. 유종이 일부러 서두른 탓에 유비는 조조가 완까지 내려오고서야 형주의 항복을 알았다. 가산을 정리하거나 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렇게 급작스런 상황에서까지 유비를 따르려면 몸만 따라가야 한다. 형주 사람들은 서주의 대부호였고 대호족이었던 미축이 유비를 선택했다가 어떻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비는 신야마저 잃으면 정말로 갈 곳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모험을 하기 쉽지 않은 나이에 이적은 10만명의 바보들처럼 유비를 택했다. 이후의 전개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마성의 유예주에게 잘못 걸린 남자들처럼 몇 번 만나보고 그냥 반한 건지, 유비가 가진 안티조조 아이콘(유씨에 의한 한나라 부흥으로 대표되는)에 신념을 걸었는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어떤지를 석줄 반짜리의 짧은 글로는 못 읽어내겠다. 단지, 혹시라도 이적이 190년대 초 청주병 내지 여포 사건 때문에 산양을 떠나야 했다면 이후 헌제가 핍박당한 일까지 더해져 조조의 행보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은 한다. 조조는 나름의 신념을 위해 열과 빛을 뿜으며 치열하게 살았지만, 그 불이 강렬했던 만큼 원치 않게 불똥을 뒤집어쓰고 돌아선 사람도 많았다는 생각 또한.
5. 몰년
촉서 이적전은 이적이 촉과를 제정할 때 참여했다는 데서 끝났다. 이적의 관직은 익주 평정 때 좌장군 종사중랑이었고 촉과를 제정할 때는 소문장군이었다. 유비 패밀리는 입촉 직후 한번 대거 승진하고, 한중전이 끝났을 때 다시 대거 승진했다. 이적이 소문장군으로 오른 것은 219년 한중왕 선언 무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촉과는 언제 제정되었을까? 촉과 제정자에 법정과 유파가 있다는 것이 걸린다. 법정은 220년, 유파는 222년 사망했다. 그렇다면 유비가 제위에 오른 221년 이후는 아닐 것이다.
촉과라는 게 한나라의 국법과 비교했을 때 국회제정법률에 대한 지방의회조례 같은 위치인지 그냥 일국의 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데서 촉과에 대한 말이 나와야 말이지. (법정이 제갈량한테 너님 법은 너무 엄격한 거 아님? 하고 태클걸자 제갈량이 ㅋㅋ님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름 우린 이렇게 해야 함 하고 반박해서 밀고 나갔다는 말이 있다. 이게 혹시 그 촉과 이야기인가 생각할 수 있는데, 정체는 배송지가 나의 공명찡은 그러치안아!! 를 외치며 진위여부를 가열차게 까대는 곽충5사 그 첫번째다. 궁금한 분은 파성 제갈량전 고고싱) 어쨌거나 한나라에 대한 명분이란 게 있으니,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독자적인 법률을 입촉하자마자 만들었을 리는 없다. 역시 한중왕 이후에 만들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적은 최소한 219년 무렵까지는 생존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진수가 쓰다 만 것처럼 갑작스럽게 기록이 끊어지니 이상한 노릇이다. 여기서 나는 이적이 동오에 간 사자였다는 걸 생각해 본다.
이적이 동오에 간 것은 입촉과 촉과 제정 사이의 일이다. 손권은 이적의 기를 꺾는답시고 대뜸 "도(道)가 없는 군주를 섬기느라 수고" 운운했다.(이적전) 익주 평정이 끝난 214년에서 한중왕 선언의 219년 사이는 유손연합의 분위기가 가장 험악하던 시절이다. 그런 시기에 유비는 이적을 택했고, 손권은 유비가 보낸 사자를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외교적 성패는 둘째치고, 이적은 그 까다로운 손권의 눈 밖에 나진 않았다.
가만 보면 촉에서 오로 간 사자의 계보가 꽤 재미지다.
제갈량(208)->이적(214~219 사이)->비의(222? 223?, 225, 227?), 등지(223)->종예(234)
제갈량과 등지는 말이 필요없는 키배러다. 비의는 진수가 관대하고 널리 사랑했다고 성품을 평했으며, 한편으로는 제갈량과 장완을 이어 촉을 이끌게 될 재목이었다. 종예의 경우 그 사람 좋은 비의조차 피한 성깔의 등지 앞에서 굽히지 않은 일이나 제갈첨과 관련된 일화를 보면 뚝심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런 인물들과 나란히 끼어있는 걸 보면 이적도 보통 사람은.. 아니 성격은 아니었을 것 같다. 진수는 미축, 간옹, 이적을 가리켜 "포용력 있는 태도로 풍자의 논의를 받들었다"고 평했다. 역시 언변에 대한 평이다. 이적과 같은 카테고리에 든 진복의 경우 어딘가 예형이 연상되는 키배러이기도 하다. 결국 이적은 말 잘한 것으로 이름을 남겼나 보다.
물론 저들 사이에 오간 사자도 많을 것이다. 가령 이릉 직후 아직 유비가 살아있을 때 비의 뿐 아니라 송의라는 사람도 파견되었다. 등지 직전에는 정굉이라는 사람이 파견되었는데 이쪽은 손권한테 가열차게 디스당했다.(등지전) 유비가 사망한 직후 제갈량은 동오에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어 고민했다. 유비의 죽음을 두고 위나라에서는 이제 한시름 놓았다는 분위기였고 손권은 동맹을 계속해도 되는지 의문을 품었다. 외교적으로 아주 조심스러운 상황인데 웬만한 사자로는 손권의 마음에 찰 수 없었다. 그걸 경험자인 제갈량 본인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바쁜 승상이 직접 갈 순 없는 노릇이고 비의는 아직 파릇파릇했다. 유비가 사망한 것은 223년 여름 4월, 등지가 오에 간 것은 같은 해 겨울 11월이다.(오주전) 촉의 존망이 걸려 있어 한시가 급하던 때였다. 손권이 거부하지 않은 사절이 있는데도 제갈량이 그 사람을 제껴두고 오랜 시간 동안 누구를 보낼지 고민했을까?
이적이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정황상, 갑자기 대륙 전체에서 많은 인재들이 죽어나간 220년 그 무렵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쭉 쌓아온 가정대로 가보자면 그 무렵의 이적은 이제 4, 50대의 중견이었을 것이다. 이 가정대로라면 법정이나 유파처럼 촉과 제정에 참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것이니 기록이 거기서 끊기는 게 설명된다. 이래저래 이릉을 전후한 무렵의 촉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