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건진 위 주소에는 형주8군설과 9군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간체를 보면 눈이 아려서 정독은 못 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장릉"이라는 郡이 도대체 어디냐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연의와 함께하는 9군설은 제껴두고, 8군설에 일단 집중할까 한다.
위 링크의 본문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1) 한서 지리지와 후한서 군국지는 기본적으로 형주를 7개 군으로 표시하는 모양이다. 다들 아시는 바 남군, 강하, 남양, 장사, 무릉, 영릉, 계양이다. 내가 가진 후한, 삼국, 서진 지도에도 장릉이라는 지역은 없다.
3)번은 장릉이라는 지역이 언급되는 기록들이다. 작성자가 한서와 후한서에도 불구하고 제 8군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적은 듯하다. 유표 시절에는 괴월, 채모가 장릉태수를 지낸 듯하고, 조조 시절에는 조엄이라는 인물이 검색된다. 어찌 됐든 헌제 때는 장릉"군"이 있었다.
2) 문제의 장릉은 남양에서 분리된 듯하다. 위 링크글에 의하면 현 호북성 조양시 남쪽에 있는 광무제 유수의 고향에 성이 있다는 것 같다. 위키 검색을 가보면 유수의 고향은 채양이라 되어 있다. 일단 지도부터 보자.
서진 지도다. 현대의 조양은 옛 채양과 가까운 듯하니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김원중 역과 파성넷 등애전에 적힌 조양이라는 지명은 현대의 棗陽을 적은 것 같다. 후한, 삼국, 서진 지도에는 그런 지명 없으니 역시 등애는 棘陽 출신이라 생각된다. 이건 이제 그만!) 아무튼 이 말 대로라면 장릉은 남양에서 분리된 지역이되 대략 서진의 의양과 위치가 겹치는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남양 서쪽의 남향군을 장릉군으로 보는 썰도 있는 듯하다. 그 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이, 본 포스팅 맨 처음에 인용한 무제기의 기록 때문이다. 이 기록은 조조가 한창 장수를 정벌한다고 형주에 드나들던 197년에 관한 것이다. 당시 조조의 움직임을 보면 예주를 출발해 무음을 전진기지 삼아 완으로 쳐들어갔던 것 같다. 위 지도에서 보듯 무음은 남양의 동부에 있다. 한편으로 남향은 어디냐면,
그러하다.
장수가 조조에게 밀려 가장 멀리까지 내려간 게 남양군 양(穰)현이다. 첫번째 지도 중앙의 의양국 신야라고 적힌 부분 왼쪽에 있다. 장수가 항복했을 때 조조에게 넘어간 곳이 완과 예주 사이의 지역인지, 아니면 서진 시대의 남향에 해당하는 남양 서부 지역까지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장수를 잡겠다고 조조가 오간 경로를 생각하면, 197년 당시에는 완과 무음 사이의 일대가 대략 조조의 점령지였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다. "공이 무음에서 돌아온 후 남양, 장릉의 여러 현들이 다시 모반했다"는 기록이 나오려면 장릉은 그 사이 지역에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쥐꼬리만한 정보만 토대로 생각하자면 장릉은 서진 시대의 남향은 아니고, 한대의 남양에서 동부에 위치하지 않을까 싶다. 서진의 남양과 의양에 걸치는 지역이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의양 자체도 남양에서 분리된 지역이긴 하지만.
장릉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으니 그 시절 신야가 남양 소속인지 장릉 소속인지 어디 하늘나라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 망상대로라면 장릉은 신야에서 멀지 않다. 장릉태수가 괴월이든 채모든간에 신야 시절의 유비는 그쪽 태수한테 좀 쪼이고 살았을 것 같다. 모두까기 손성이 매우 비웃는 바이기는 하나 세설신어에 괜히 단계 이벤트 같은 게 실리진 않았으리라. 나도 손성의 말에 동의하긴 하지만, 괴씨, 채씨로 대표되는 양양 일대의 거대호족이 유비를 매우 싫어했으리라는 정황근거 정도의 의미는 있지 시포요. 그런데 진짜 장릉이 정확히 어디야?;;;
p.s. 괴월, 채모가 장릉태수를 지낸 것은 유표 시절이 아니라 조조 시절이었다는 반전이 낄 가능성은 있겠다.(...) 이쯤 되면 진수가 삼국시대를 쓰면서 서진시대 지명을 기준으로 한 게 이해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