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포스팅은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트위터의 폐해가 이렇듯 심각합니다.(...)
비욘드의 플롯과 이야기는 매우 단순해서 얼핏 보면 미리니름을 주의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 있는 중요한 반전이 트레키에게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며 이걸 빼고 비욘드를 이야기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포스팅을 하려고 로그인을 할 때는 접힘글을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접힘글로 작성하고 미리니름을 실컷 하는 게 좋겠네요.
영화가 시작될 때 커크는 목적지 없이 장기간 심우주를 탐사하고 다닌 세월에 지친 모습을 보입니다. 쌍제이 리붓 영화에서는 패러렐월드를 만들기 위해 원작 TOS에선 멀쩡히 살아있던 커크의 아버지를 요절시켰으며, 쌍제이의 새로운 설정 위에 빚어진 크리스 파인의 제임스 커크는 요절한 것으로 설정된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게 된 지금 왜 자신이 스타플릿에 남아서 이 지루한 심우주 탐사를 계속하는(영화를 찍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자신의 정체성에도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욘드에는 커크보다 앞서 "스타플릿"으로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처가 활약하던 ENT 시대-_-;;;에 초래된 혼란으로 반평생 진디 같은 외계의 세력들과 전쟁을 치렀던 그 인물은 종전 후 평화가 도래한 시대에 혼란을 느꼈습니다. 새 시대는 진 로덴베리가 처음 스타트렉이라는 SF장르의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주제로 추구했던 이상이 차차 달성되기 시작하는 세계로, 인류는 물질뿐 아니라 이성과 도덕 면에서도 진보해 무력보다는 이성을, 갈등보다는 평화를 거의 본성에 가까운 차원에서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인류가 아직 진화하기 전 세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처럼 불신과 무력을 더 신뢰하는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 이제껏 잘 수행해왔던 군인 역할을 버리고 평화와 이성을 믿는 신세계의 탐험선 선장이 되어야 했으니 혼란스러워질 만도 합니다. 장기간의 심우주 탐사 중 배와 함께 사고를 당한 그 인물은 스타플릿에서 억지로 억눌렀던 자신의 가치관이야말로 진실이고 커크 시대의 연방이 잃어버린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것이 비욘드의 사건사고를 일으켰습니다.
비욘드는 이게 전부입니다. 감독은 이 단순한 플롯과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번 영화는 작중 인물들의 세계를 엿보는 "관객들"과 자극적이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집어넣고 싶어 안달인 "제작자들"한테 감독이 스타트렉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목적지 없이 탐험만 하는 장기간의 여정이 작중 인물들뿐 아니라 관객도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서 스타트렉이라는 타이틀을 단 작품에 단지 자극적인 흥미를 일으키기 위한 목적의 소재, 가령 액션이 목적인 전쟁과 음해, 모략을 끌어와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커크가 태어나 자란 TOS의 시대는 메인빌런인 인물이 알았던 1세기 전의 시대, 달리 말해 관객들이 살고 있는 지금 시대를 은유하는 그때와 달리 인류가 평화와 이성을 본성에 가까운 것으로 획득하여 진화를 이룬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스타플릿은 군대가 아니며, 인류와는 다른 다양한 지적 존재들과 만남으로써 인류 자신도 보다 넓은 시야를 얻고 보다 평화적이고 보다 이성적으로 진보하기 위해 미지의 심우주를 탐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러한 "이상"을 전제로 20세기 내지 21세기의 관객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불합리를 비판하고 반성하면서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진보하기 위한 생각들을 모색하는 것이 스타트렉인 것입니다.
비욘드는 커크의 입을 빌리고 쌍제이가 만든 엔터프라이즈를 부쉈다가 새로 지어가면서 위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ENT에서 망가지고(어떤 트레키들은 DS9 때부터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쌍제이의 리붓 영화에서 아예 잃어버렸던 스타트렉의 본질을 되찾기 위해서겠지요. 한편으로 스타트렉을 떠나 독립된 한 편의 영화로 보면 단점이 보입니다. 메인빌런의 행동은 기존 트렉 시리즈들이 쭉 전개되어 왔던 흐름과 스타트렉이라는 이야기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바보 같고 뜬금없어 보일 것입니다. 커크가 영화 초반에 지쳐서 로그를 남기던 때와 결말 사이의 러닝타임 동안 그 행성 위에서 벌어진 일들은 감독이 그렇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주제와 찰떡처럼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곳곳에서 주제와 사건사고가 따로 노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앉아있었던 상영관에서는 딱 2시간 밖에 안 되는 러닝타임 동안 두세 명의 관객이 중도에 그냥 나가버리더군요.;; 종합해보면 이번 영화는 한 편의 완결된 영화로서보다는 영화 속편 내지 스타트렉이라는 시리즈의 방향을 세우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지금 방영을 준비 중인 새로운 드라마 시리즈 디스커버리가 최소한 트렉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만은 잃진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p.s. 비욘드 트레일러가 처음 나왔을 때 잠깐 공개된 메인빌런은 짐하다(또는, 젬하다)냐 아니냐로 난리가 날 만큼 DS9의 짐하다와 외양이 유사했습니다. 저도 만에 하나 짐하다일 경우를 가정하고 이런저런 망상을 하다가 켓라셀화이트가 없는 걸 보고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비욘드를 보고 나온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외양은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짐하다는 DS9의 메인빌런인 도미니언 제국의 병사 종족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저스틴 린 감독은 진 로덴베리가 추구했던 이상에서 벗어나 폭력과 갈등을 옹호한 "인간"이 변한 모습을 짐하다와 유사하게 표현함으로써 그러한 인간들이 이룬 세계를 DS9 내지 쌍제이 버전의 세계에 비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p.s.2 그 경우 트레키가 아니라 DS9팬인 저로서는 이해하면서도 잠시 빡치는데(...) DS9의 갈등과 폭력은 TOS와 TNG의 인류가 정말로 이상을 달성하여 진보했을까, 사실 인간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로부터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불신과 폭력 충동을 본성 차원에서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TNG 후기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트렉 세계의 휴머노이드형 종족들이 본래 동일한 하나의 종족에서 갈라져 나와 각기 진화했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외계종족끼리 혼혈이 가능한 것도 그때문이고요. 그런데 DS9의 메인빌런인 체인즐링은 형체변형이 가능한 비 휴머노이드로 아예 조상이 다른 종족입니다. 이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들 종족의 관점에서 타자인 휴머노이드 종족에게 제노사이드나 마찬가지인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휴어노이드 종족들을 불신하고 선제적인 폭력으로 대응하게 되었으며, 휴머노이드 종족이 주류인 연방도 자신과 전혀 다른 타자인 체인즐링 종족을 본능 차원에서 불신합니다. 휴머노이드 종족의 일원인 쿼크가 체인즐링인 오도를 붙잡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듯이, 이것이 도미니언 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다양한 타자들이 서로 접촉할 때 서로에 대한 무지와 이해의 부족으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이런 갈등들이 피카드가 열심히 노력해서 해내곤 하던 것처럼 이성과 합리로 극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로덴베리는 워프항행이 가능할 정도로 진보한 종족은 이성적으로도 진보했기 때문에 식민지배 같은 폭력이 난무할 리 없다고 설정했지만, 스타트렉 시리즈를 시청하고 이 시리즈를 통해 반성하며 생각에 잠기는 현실의 우리는 그런 이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DS9이 제작될 무렵의 미국은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을 슬슬 잃어가기 시작하던 시절이기도 하고요. 심지어 DS9이 종영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9.11이 터지면서 부시 정부가 보인 행보들은 DS9의 세계에서 올드 트레키들한테 모질게 매를 맞았던 에피소드들과 매우 유사했습니다. 마치 DS9에서 예언이라도 했던 것처럼요. DS9은 그런 갈등과 폭력, 전쟁과 음모를 단순히 눈요깃거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TOS와 TNG를 통해 쌓아온 이상 자체를 현실 세계에 비추어 돌이켜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연방 관점에서 볼 때 타자인 종족들이 연방에 가하는 신랄한 비판과 스타플릿 소속 인물들의 반성, 그리고 다양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실적인 갈등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던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DS9은 스타트렉의 전통에서 대척점에 있는 듯하면서도 매우 스타트렉다운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시리즈, 특히 쌍제이가 그런 맥락적인 고민 없이 무조건 빵빵 터뜨리고 보는 우주활극용으로 폭력을 활용하고 섹션31 따위를 남용할 수 있게 길을 틔워버린 것은 DS9의 영향일 수 있으나, 쌍제이가 트레키는 아니었고 오히려 트렉 자체에 무관심했다는 특수성을 고려해주면 좋겠습니다. DS9 좀 고만 까라고 -_-;;;;;
p.s.3 한편으로 개인적으로는 엄청 지엽적인 데서 감동받았습니다. 우주기지 요크타운 말입니다. 처음엔 매펙의 시타델을 연상했다가 착륙해서 막 통로에 들어온 순간, 으악ㅠㅠ 딥스페이스9이 21세기 기술로 극장에서 구현되었다면 프로미나드는 분명 이런 느낌일 거라는 감동이! 체콥이 내리자마자 달려간 술집은 틀림없이 쿼크의 바 같은 곳일 거라는 흥분이! ㅠㅠ 이 감독은 DS9에 매우 비판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한 3초 지나간 컷에 멋대로 감동해버렸습니다 ㅠㅠ
p.s.4 그리고, 다시금 고 레너드 니모이 옹과 고 안톤 옐친의 명복을 빕니다... 퀸토는 그 장면에서 영 스팍이자 재커리 퀸토로서 니모이 옹을 추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