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좋은 작품은 볼 때마다 다른 게 읽히는구나.

내 중학 시절 만화광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바람의 검심>이 애장판으로 나오고 있다. 게다가 근래에 밸리에서 내가 특별히 불타올랐던 검심 캐릭터에 대한 언급이 실린 포스트를 본 바람에 잠잠했던 불이 확 붙어서, 단행본을 다시 복습했다. 잊을 만 하면 복습하다 보니 나 같은 바보라도 매번 다른 걸 발견하게 되더라.

검심의 테마는 켄신의 불살과 속죄겠지만 켄신 녀석에 그다지 정이 없는 나는 그쪽엔 관심 없고(...). 그보다는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좀 더 주의깊게 보게 된다.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유신지사로서 공이 큰데도 자리를 박차고 나그네 길을 택한 켄신을 제외하면, 중요한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패배' 내지 '몰락'을 경험한 자들이다. 그것은 일본의 막부 말기 혼란상이라는, 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때문이겠지. 카오루와 야히꼬, 라이쥬타의 신세는 검 또는 사족의 몰락을 상징하고, 사노스케는 가짜 관군이란 오명을 쓰고 척살당한 적보대의 생존자에, 메구미는 끝까지 막부 편을 든 죄로 지옥같은 참상을 겪어야 했던 아이즈 번 출신, 아오시는 설 자리를 잃어가는 닌자 어정번중의 대장이다. 사이토와 시시오 같은 걸출한 캐릭터들을 내놓은 교토편에 이르러서는 무슨 한풀이같은 느낌조차 든다. 인벌편은 뭐..-_-; 에니시 놈이 그 난리를 친 배경도 따지고 보면 다 켄신이 막말에 해야 했던 일들(원죄) 때문이다. 그저 맛이 갔을 뿐인 악당들도 있긴 하지만.

그 '패배한 자들'의 입장에 대해선 사이토 하지메가 가장 명쾌하게 이야기한다. '유신지사들은 자기들끼리 메이지를 세운 줄로 착각하지만 우리 막부 측 사람들도 패배자라는 입장에서 메이지를 구축했다'는 그 대사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정치적 신념이 한 번 부정당했는데도 꺾이지 않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고고한 자긍심이 담겨있다. 카오루와 야히꼬는 도장을 계속 이어가고, 메구미는 의사로서 소임을 다 하고, 어정번중은 평범한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고, 사이토는 검을 버리지 않은 채 메이지 정부 밑에서 경관이 되는 식으로, 결국 그들은 나름대로 살아갈 길을 찾아냈다.

그래. 검심의 진짜 테마는 시대의 아픔이다. 그리고 그런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아등바등 살아가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그걸 지키기 위해 피 흘리는 마지막 검객들(미안하다 사노. 그 친구들을 싸움꾼이라고 할 순 없잖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도 켄신이 승리자의 입장인(데다 소년만화 주인공인)지라 약간 계몽적인 -_-;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긴 하다만, 패배한 자들을 어떻게든 보듬어주면서 그들의 관점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러티브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와츠키 씨는 애초 이 정도로까지 스케일 키울 생각 없었던 듯 한데다 끝까지 소년만화 같지 않네 어쩌네 꿍얼거리고 있긴 한데, 그러면서도 이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그게 더 대단하다.


남들 다 아는 <바람의 검심>에 대한 잡소리는 이쯤 하고, 이제 제목에 걸맞는 이야기를 써야지. 갑자기 이런 횡설수설을 늘어놓게 된 건 그 남자, 사이토 하지메 때문이다.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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