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배들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가끔은 좋은 학회장이 어떤 건지에 대한 말도 오간다. 그에 대한 선배들의 결론은 한결같았다. '아무 것도 안 하는 놈.' 더 길게 말하면 '남은 있는대로 부려먹고 지는 가만히 있는 놈.'
단체를 이끄는 자는 무슨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같이 엄마친구아들 내지 그 업그레이드 버전일 필요는 없다. 그는 그저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배치하고, 맡겼으니 전문가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기만 하면 된다. 그가 전면으로 슬쩍 나서는 건 전문가끼리 말이 안 맞거나 단체를 대표해야 할 때 정도. 핵심은, 일단 맡긴 이상 뭔가 하는 중인 사람을 신뢰하면 된다는 거다. 자신이 단체 돌아가는 일을 구석구석 눈에 담아두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은 이것저것 자기 품에 껴안으려다 다 놓치기 십상인 것이다.
물론, <하얀 늑대들>은 지도자론 같은 거창한 걸 다룬 건 아니다. 서두에 저런 구질구질한 소리부터 끄적대는 건 캡틴 울프가 자신의 자격에 대해 괴로워 할 때마다 내가 그런 자잘한 기억부터 떠올렸기 때문이다.
카셀 노이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 뿐, 그는 소위 말하는 양산형 판타지에서 성립요건이자 효력요건이자 존속요건처럼 여겨지는 '먼치킨 주인공'은 절대로 네버네버 젯타이 아니다. 이게 연재되는 동안 시작부터 끝까지 칼 잡고 설쳐본 일이 없고(아, 딱 한 번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살인이지 검술을 선보인 거라고는 할 수가 없다) 마법사나 궁병이나 격투가나 하다못해 공병(...) 같은 특수병과조차 아니며 때리면 그냥 맞고 픽 쓰러지는 허약한 농부에게 독자들은 끝까지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그래도 뭔가 배우겠지' 라며 기대했다던가.
그 무슨 섭한 말씀을, 그래서는 적과 하얀 늑대들의 강함이 주인공한테 파묻혀버리잖아? 카셀이 혼자 다 해먹는 놈이었다면 아즈윈 잘난 거, 쉐이든 멋진 거, 게랄드 끝내주는 거, 로일 천재인 거, 던멜 무서운 거, 제이메르 미친 것이 제대로 드러났겠나? 그냥 그런 놈들 득시글한 게 당연한 세상이 되어 라스트보스와 익셀런 기사단의 강함이 식상해졌겠지.
1부에서 하얀 늑대들이 비리비리한 카셀 놈을 보호하는 동안에는 그들을 당해낼 자가 세상천지에 정말로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등장할 때는 그야말로 먼치킨의 표상과도 같던 아즈윈도 이후에 보니까 출연 중 한 1/3 내지 1/4은 피투성이로 굴러다녀야 했고 하얀 늑대를 죽이는 놈도 있었다. 그런 것들과 그런 것들보다 더 센 것들이 적이었다. 외려 비슷한 시간대에 괴물들 물량러시 앞에서 일기당천(실은 합쳐야 세 자리수지만)의 위용을 자랑하던 루티아의 하얀 늑대들(+제이메르)이 정상이며 당연한 것으로 보였으면 할 말 다 했지. 이렇게 새겨진 절망적으로 강한 적에 대한 느낌이 로크 공방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작가분께 사정이 있었는지 좀 허술한 것 같아 눈살 찌푸리며 봤던 2부와 3부는 실은 오로지 로크에 그런 무대를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고, 하얀 늑대들이 엄청 잘 나가는 1부는 그들이 무지 고생하는 2부와 3부를 받쳐주는 대칭점으로서 예비된 것이었다.
그래. 괜찮은 정반합이었다. 그리고 이게 다 '아무것도 안 하고 후방에만 있는 것 같아' 혼자 애간장 태우던 카셀 그녀석이 끌어낸 것이었다. 1부에서는 혀만 잘 돌아가는 비리비리한 사기꾼 이미지로, 2부에서는 이 자식 없으니까 일이 묘하게 안 풀린다는 느낌으로, 3부에서는 그의 동료와 적이 어떤 인물들인지 보다 확실히 드러내는 거울로, 그리고 결말에서는 '마법사'로서. 그래, 그 드래곤이 카셀을 가리켜 마법사라고 한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전선에서 싸울 능력이 없던 그는 대신 본래대로라면 움직일 수 없었던 대륙의 운명을 움직였다. 세상의 인과율을 깨고 있을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는 게 마법사라면, 그가 바로 그것이다! 그 모든 게 테일드의 선견지명 안에 들어있었다는 건 좀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어쨌든 카셀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신뢰와 함께 맡겨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목숨 걸고 해냈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안 한 것 같다니 그 무슨 등잔 앞이 깜깜한 소리냐!
거기에 묘한 감동이 있었다.
카셀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농부에 불과함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운이 이상하게 굴러가 패잔병 신세에서 졸지에 자신의 우상인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캡틴 울프로서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우상들에게 누가 될까봐 자기 한 목숨 보살피려고 배짱 부리던 때 이상으로 목숨을 던져서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냈다. 그가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말발과 잘 돌아가는 머리가 상당히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맨몸뚱이 진심으로 부딪쳐 들어가 친구를 만들 줄 아는 진솔함이었다. 각자가 너무 잘나서 차라리 제3자의 명령을 받는 게 편하다던 하얀 늑대들이라지만 그 제3자가 아무나 되어서는 역시 그들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얀 늑대들 하나하나와 친구가 되고, 인간 사냥꾼인 제이메르를 허물없이 대하고, 레미프들 중의 살인자인 라이를 인격자 대 인격자로 대하고, 마법사 타냐의 마지막 믿음이 되고, 자기보다 강한 자가 아니면 절대 고개 숙일 리 없는 울프 기사단이 스스로 감복하게 만들었던 그는 결과적으로 그런 만남들을 통해 '운명(기더)'이란 거대한 그림을 스스로 짜맞춘 것이다. 처음에는 캡틴 울프의 지위가 사람을 만들었겠지만, 결국에는 그 지위가 카셀에게 어울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느 분이 말씀하신 대로 카셀의 진짜 강함은 말발이 아닌 것이다.
지레를 써서 무거운 뭔가를 움직일 때 돋보이는 건 역시 길쭉하니 눈에 잘 들어오는 막대다. 그러나 실로 바위를 움직인 것은 움직이지 않고 막대를 밑에서 괴어주는 축이다. 나는 카셀이 그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받침대같다고 생각한다. 칼 들고 맨 앞에서 설치는 능력이 없기에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타인을 위해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줄 알았던 그는 평범한 자가 어떻게 기적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p.s. 1 ..어. 그런데 쓰고 나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나 분명 언젠가 모니터 노려보면서 하얀 늑대니 캡틴 울프니 하는 단어를 가지고 뭔가 조잡하게 주워섬기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 소설의 존재를 전혀 모르던 작년 무렵....?;;; 마비노기 흰늑이냐? 캡틴 토마스냐?! 이 어이 없는 느낌은 뭐지?;;;
p.s. 2. 문득 테일드가 남긴 가루를 누가누가 써버렸나 되짚어보고 싶어졌다. 첫타자는 아이린이요 두번째는 아즈윈, 세번째도 아즈윈, 마지막은 타냐. 그런데 사내색퀴인 로일은 다 죽는데도 못 쓰게 했었지? 옳거니. 나는 그 약의 비밀을 알아냈다! 그 약은 남자가 쓰면 약발이 안 받는 것이었다!!(두둥!) ..님들아, 믿으시면 골룸이에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