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이도 스타

낚였다 2006. 2. 19. 22:27
2005/9/11



1.
흠. <카레이도 스타>를 처음 접한 건 작년 초 뉴타입을 들춰보던 때입니다. 잡지 중간에 한일합작 어쩌고 라는 내용의 광고가 끼어있었지요. 그때는 '한일합작이면 뻔하다. 우리가 하청받아 작화 정도는 했다는 거겠지'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리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죠.
올해 7월 투니버스를 돌리다보니 마침 그 <카레이도 스타>를 첫회부터 방영하더군요. 그냥 한번 봐 볼까 하고 첫 회를 보고 나서 저는 버럭했습니다. "왜 겨우 두 편밖에 안 보여줘! 다음 편을 보고 싶다!"

2.
카레이도 스테이지는 서커스와 마술을 섞은 종합 엔터테인먼트 쇼입니다. 주인공 나에기노 소라는 어릴 적 부모님과 본 카레이도 스테이지의 환상적인 무대를 동경해 자신이 그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일념으로 혼자 미국에 갑니다. 1년에 단 한 번 있는 오디션을 보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왔건만, 막상 도착한 순간부터 사고에 휘말려 시험 자격조차 박탈당합니다. 그래도 스테이지의 오너 칼로스가 재능을 알아본 덕분에 특례 입단을 할 수 있게 되고, 이후 좌충우돌하며 카레이도 스타가 되어갑니다. 아주 짧게 줄이자면 이 애니는 흔하디 흔한 성장만화죠.

3.
성장 시나리오는 어린이 /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들의 주요 주제입니다. 처음에는 싹 정도만 있어 보일 뿐 애송이 중의 애송이이던 녀석이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최고가 되어가는 과정은 그 나이대의 시청자들에게나 보다 나이 많은 세대에게나 감동이지요. (성장만화의 고전 중의 고전이 <슬램덩크>죠. 요즘 것으론 <나루토>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만큼 널리 써먹히는 주제이기 때문에, 평범해서는 진부하게 느껴질 위험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혹시 팬이 계실지 몰라 말하기 좀 주저됩니다만, 요즘 늘어질대로 늘어지고 있는 <더 파이팅>은 내용이 참 지겹습니다. 시합 장면이야 훌륭하지만요.-.-;).

덜렁대는 열혈노력파 소라는 극중 인물들도 하는 말입니다만 참 아슬아슬합니다. 그녀는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해서 언제 어떻게 실수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위의 파이팅과 자신의 노력으로 결국 인정받게 될 결과가 나올 거란 건 누구나 예상하고 봅니다. 그거야말로 성장만화의 정석 스토리라인이니까요.

그런데 소라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나아가는 모습에선 절대로 꾀병 같은 걸 볼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단순무식하게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합니다. 하다가 힘들어서, 또는 너무 엄한 오너한테 매운 소리를 들어서 자신감을 잃고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노력한 만큼 보답 받는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주장하며 다시 노력합니다. 그렇게 노력했어도 결국 실패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음을 준비하며 노력합니다. 이 단순함.

90년대 후반 이후 보이는 몇몇 만화들의 특징이라면, 세상 물정 다 아는 듯한 '애늙은이'들이 많이 보인다는 겁니다. 이러이러해도 결국 저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며 시니컬한 표정을 짓고, 어딘가 약삭빠른 모습들을 보이죠. 노력, 열정, 새하얀 재만 남을 때까지 불타버리는 열혈, 꿈, 희망, 이런 것은 진부한 소재라 여겨지나 봅니다. 실제로도 진부합니다. 만일 나루토가 매 회마다 다른 건 안 하고 "나는 최고의 닌자인 호카게가 되겠다!"라며 날뛴다면 녀석은 진즉에 간판 내렸을지도요.(웃음)

하지만 진부하다는 건 그만큼 시공 초월해 널리 공감을 얻는 것이란 뜻입니다. 위의 단어들은 나이를 먹어감에따라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자꾸 어린 아이들을 위한 공허한 소리 정도로 여겨지게 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자신의 꿈이 이뤄지리란 희망을 품고 모든 열정과 열혈을 다해 노력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당장은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해도 무던하게 웃어버리며 묵묵히 제 갈길을 가는 모습은, 세상과 타협해버려 어릴 적 멋모르고 품었던 꿈들을 다 잊어버리고선 할 수 없다며 체념하는 모습들이 대부분인 우리들에게 때론 세속을 초월한 존재같이 여겨질 정도입니다. <20세기 소년>의 켄지 일당이 코흘리개에서 서른 넘은 어른이 되어 바쁘게 살아가던 중 지구를 지키자던 어릴 적 꿈을 되새길 때 느낀 기분이 무엇일는지.

<카레이도 스타>의 저 단순함 역시 성장만화의 주인공이 필수적으로 갖추는 정석입니다. 하지만, 진부하면 어떻습니까? 성장만화를 보는 건, 어느 만화건, 어느 세계에 살건, 자신이 가는 길을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독자가 공감하고 같이 울고 웃으며 그 단순함을 지지하게 되는 그 순간, 그 때 괜히 느껴지는 묘한 떨림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카레이도 스타>에는 그런 의미에서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번쩍번쩍 세련된 작품들 사에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채 건강하게 성장하는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랄까요(저는 지금도 그런 떨림을 느껴보려고 <타이의 대모험>같은 작품을 보고, 또 감동해버립니다.(웃음)) .

4.
또한, 카레이도 스테이지에 서는 배우들은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관객을 즐겁게"입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관객들에게 기쁨을 주려는 목적으로 힘든 쇼를 하고, 그걸 기꺼워 합니다. 관객이란 매정해서 조금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매서운 평을 하게 마련이죠. 하지만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만든 작품은 그런 마음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전해집니다. 저는 카레이도 스타를 보면 제작자들도 시청자가 정말 재미를 느끼고 감동받게 하고 싶다는 열정으로 만든 게 느껴집니다. 소라를 비롯한 카레이도 스테이지의 배우들이 그곳의 관객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제작자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라는 것 말입니다.

현실이란 냉엄한 것이라 만화 주인공처럼 노력한대로 보답받는 등가교환 따윈 없다는 것은 거의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집니다. 사람들의 일상은 정말로 일과 사람과 자신의 감정과의 자디잔 투쟁의 연속이죠. 그런 중에 잠시 마음을 풀고 평안을, 씩씩하게 일어설 힘을 얻고 싶으니까 사람들은 엔터테인먼트를 즐깁니다. 그래서 재미 없는 엔터테인먼트는 필요 없습니다.-ㅅ-

<카레이도 스타>는 중심되는 줄거리가 진부함에도 제작자들이 그것을 풀어가는 게 재미있습니다. 화려한 기술들과 만화적인 오버액션들, 비록 정형적인 면이 없진 않지만 노력과 열정이라는 단순함을 품은 것에선 주인공 못지 않은 조역들이 주인공과 함께 시련을 겪고, 함께 땀흘리며, 각자의 삶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장면들을 빛내줍니다. 카레이도 스테이지를 잃어버려도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며 다른 스테이지에서 공연을 계속하는 단원들, 기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아직 자신에게는 부족한 주인공에 맞춰 스스로의 몸을 괴롭게 하는 톱스타의 모습 같은 건 진하진 않아도 잔잔한 감동이 있습니다(어떤 분들은 레이라의 이런 태도가 마리미테의 언니 동생 모드랍디다..;;). 더군다나 이런 재미와 감동은 제작자가 억지로 유발하는 게 아니라 무덤덤하게 보여줌으로써 시청자가 스스로 느끼는 것이어서 더욱 다가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는 고시생(表見입니다만...;)입니다. 안 풀릴 때 혼자 버럭하고 화내다가도 <카레이도 스타>같은 단순함의 힘이 있는 작품을 보고 나면 웃으며 다시 공부하게 되더군요. 엔터테인먼트라면 이런 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WWE는 실패..쿨럭;)

5.
<카레이도 스타>는 요즘 보는 애니들 중에서 다른 분들께도 권하고 싶은 몇 안 되는 작품입니다. <풀 매탈 패닉 후못후>처럼 제 상태가 어떻든 자지러지게 웃어버리게 만드는 작품은 아닙니다만, 잔잔하게 웃으며 오늘 괜찮은 작품을 보았다는 그런 느낌이 들게 하네요.

6.
그나저나 소라를 맡은 투니판 성우 김서영 씨의 연기가 정말 마음에 드네요. 자연스럽게 대화하듯 말하는 연기가 가장 어렵다는데,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소라가 울 때의 연기는 어떤 장면이 됐든 정말 끝내주는군요. 절로 감정이입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소라가 연습하다 힘들어서 눈물을 참으려고 떨며 말하는 장면과 레이라가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걸 알고 울부짖던 장면이 마음에 듭니다) 애니의 생명은 역시 50% 이상을 성우분들이 맡고 있지요. 이 분이 맡을 다른 역들도 기대됩니다.^^


이상 두서없는 감상 끝.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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