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9/5

 

배우에 대해선, 연예인에 관심이 없다보니 누가 누군지 몰라 넘어가고.

드디어 기대하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시작되었습니다. 여태까지 제작된 이순신 장군 관련물을 보면 특히 영상매체를 거친 작품들은 그렇게 인기를 끄는 걸 보지 못했던 듯 합니다. 그로 인한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시청 결과.

아, 이거 기대는 할 만 합니다.

이순신 장군 관련물들이 그리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저는 첫째로 작품들이 대체로 정형적이고 둘째로 사람들이 그런 작품들에 식상함을 느껴서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은 호국의 성웅으로 항상 나라걱정과 왜구 때려잡기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인물이고 원균은 천하의 개망나니이며 왜적은 재수없는 상판에 정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이고 명나라는 거만하지만 어쨌든 결국에는 장군께 감화될 천병(天兵)이란 정형은 '이순신'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게다가 군사독재시절부터 어린이들에게 귀 따갑게 위대하다고 주입시켜온 군인영웅이다보니 그 위인을 존경한다는 말을 꺼내기도 왠지 머쓱하지요.
그런데 이 드라마는 최소한 이순신과 진린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형 뒤집기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고니시의 첩자들이 본 것은 이순신을 위시한 조선의 장수들이 명나라 장수들과 서로 칼을 겨누고 살기등등하게 맞선 것입니다. 시기로 봐선 노량해전 직전인 듯 한데, 아직도 진린은 공을 세우는 데에 혈안이 된 뭣 모르는 외국인으로서 장군과 충돌하고 있더군요. 또한 여태까지 우리가 알고 있고 또 늘 묘사된 이순신이라면 진린을 부드럽게 타이르고 타일렀을 테지만 드라마의 장군은 노기충천해 진린에게 상처를 낼 만큼 칼을 들이대고 있었으니,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무식하게 돌진했다가 뻘에 갇힌 진린을 구하기 위해 부하를 버리는 장면은 더더욱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문헌으로 접한 그 전투는 무술년의 해전 치고 너무 피해가 컸다 싶었을 뿐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조명연합을 어떻게든 붙들어 전쟁을 끝내겠다는 명분이었다면 확실히 설명되긴 합니다만, 영상으로 보니 어쩐지 충격이 더 컸던 듯 합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어딘가 좋은 의미에서 흔들리고 있달까요.^^
하지만 아쉬운 건, 일본군은 여전히 정형을 따르고 있었더란 겁니다. 고니시의 말투가 좀더 가라앉고 무게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적을 멋있게 묘사할수록 주인공도 멋있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인인 걸 강조하기 위해 그런 과장된 말투를 쓸 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숨걸고 맞서야 했던 강력한 적이 겨우 이런 인물의 지휘를 받는다는 건 역시 끔찍한데요.;
아무튼 그 고니시가 "이순신은 적이 많다."고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되었습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일본 뿐 아니라 유성룡의 정적과도 (그들 멋대로의 해석에 의한) 적이었으니까요. 저는 장군이 완벽한 호국충정의 상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쟁 터지고 나라가 온통 생지옥으로 변해갈 때 전라도만은 보존했습니다. 누구의 지원도 없이 물량공세를 펼치는 적과 맞선 수군 덕이었지요. 그런데 정부는 그 수군의 머리를 너무나도 가볍게 베어버리려 했습니다. 고문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지만 정부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장군은 충분히 자기 인생에조차 회의를 느꼈을 겁니다. 게다가 풀려나자마자 어머니와 아들의 상을 연달아 당했지요. 보통 인간이 이런 상태라면 미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장군은 상복 대신 갑주를 입었습니다. 장군은 절대 조정과 사직에 대한 끓어오르는 '충정'이 아니라, 민초가 불쌍해서, 칼 찬 자로서 부끄러워서 전장에 임한 겁니다. '호국'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의 위대한 군사독재정부가 강조하고팠을 정부에 대한 '충정'의 상징은 아니지요.

어찌 됐건..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장군이 좀더 정형에서 벗어나 줬으면 합니다. 나라를 위해- 라는 끔찍한 소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뇌리에 세뇌된 것처럼 새겨져있는 소리일 터지만 적어도 삼도수군통제부의 누군가가 읊을 때엔 공허한 어조로 들렸으면 합니다. 아직 1화밖에 방송되지 않았으니 더더욱 바라건대,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 특히 원균은 화석같은 정형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지금 일본은 nhk2에서 방영하는 <신선조!>가 꽤 인기를 누리는 모양입니다. 저도 신선조의 팬으로서 할 수만 있다면 보려고 하지요. 조금은 씁쓸합니다. 신선조는 좀 심하게 말해 극우파 야쿠자같은 집단이었습니다만 최후최강의 무사집단이라는 낭만 때문인지 나라가 어지러우니까 우로 기우는 일본의 상황 때문인지 온갖 작품을 토해내며 환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작품'들이 중요합니다. <바람의 검심>의 와츠키 씨 가라사대 역사 연표를 노려보다가 신선조 팬이 된 사람 없다고, 저도 검심 아니었으면 신선조 따위 알지도 못했을 것이요 알아도 좋아할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 신선조가 현대에 멋있는 무사집단으로 이미지가 잡혀가는 건 적당한 미화가 곁들여진 멋진 작품들 덕이지요.
우리나라에는 왜 그런 게 없는 것인지. 일본이 신선조를 발굴해낼 때 우린 왜 의열단조차 -신선조가 극우 야쿠자면 의열단은 극좌 테러리스트다앗!- 제대로 살리질 못하는지. 저는 그 미화된 신선조를 좋아해 그 조직의 구성과 역사는 줄줄이 꿸 정도입니다만, 문득 삼도수군통제부의 조직과 구성과 역사는 거의 머리속에 들어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아찔해졌습니다.(..그 조직과 구성을 알아 뭣 하려 했냐면, 혹시 이쪽도 신선조처럼 팬픽을 써낼 수 있는 곳일까 싶어져서..와핫핫;)
문화의 힘은 군사력보다 강한 겁니다. 아무쪼록 이 드라마가 멋지게 성공했으면 합니다. 제가 오늘 밤 <신선조!>를 포기하고 <불멸의 이순신>을 택하려는 건 그런 바람 때문입니다.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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