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고 선생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사회에는 법률과 풍습으로 말미암은 처벌이 존재하여
그것이 문명 속에 인위적으로 지옥을 만들어내어
신성한 운명을 인간의 불행으로 뒤얽히게 하는 한,
그리고 이 시대의 세 가지 문제,
프롤레타리아 탓으로 남자가 낙오되고, 굶주림으로 여자가 타락하고,
어둠 때문에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또 어떤 지역에서 사회의 질식 상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한,
다시 말해 좀더 넓게 보아 이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있는 한
이러한 책들이 쓸모 없지는 않을 것이다.
왜 제목이 <불쌍한 사람들 Les Miserables>이겠는가. 이 소설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장 발장, 팡틴, 코제트가 범죄자, 타락한 여자, 학대받는 아이가 된 건 크게는 두 가지에서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모르던 앙시앵레짐 하의 가혹한 법제도와 천민자본주가 횡행하는 빈곤이다(무지는 빈곤의 소산이다). 전자의 옹호자가 자베르고 후자의 대표가 테나르디에다. 전자는 이미 18세기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기에 소설의 배경인 왕정복고 시대에도 차근차근 부정당하고 있었는데, 후자는 19세기에 근대자본주의 개념이 잡히고 마르크스가 나올 때까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만 알지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인간의 가치척도가 되던 계급이 혁명으로 부정당하자 그 위치에는 자본, 보다 구체적으로 돈이 들어섰다. 애써 왕정을 복구하려 하지만 이미 시대의 대세를 떠난 귀족과 그들이 옹호하는 세계도 결국은 새로운 대세인 돈에 기대게 되었다. 땅으로부터 땀 흘려 정직하게 먹을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팔아서 사야 하는 시대,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의 상위에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도시에 살던 빈민인 발장이나 팡틴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베르에게 돌려질 책임은 그 이후에 있다. 개인이 짊어질 수 없는 빈곤 때문에 사회에서 낙오된 자들까지 철저하게 배제하며 가진 자에게 봉사하는 제도를 맹목적으로 옹호한 것이다.
정의를 구현하겠다며 법공부를 시작하는 새내기가 있다면 나는 우선 롤스의 사회정의론에 대한 이야기나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연히 그리스 철학자 삘로 옳고 그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씌여있겠지 했는데 웬걸, 시작부터 경제 이야기가 나오고 분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 우리가 흔히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형태의 '정의'는 법감정 차원의 이야기는 되지만 법의 실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법은 단지 그 사회의 기틀을 잡고 그것을 유지하는 규칙일 뿐이다. 입법자나 사법부가 재량껏 '정의로운' 내용으로 채우고 적용할 수는 있어도 본질은 그것이다. 국가란 사람을 이롭게 하려고 존재하는 도구->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정의이며 법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고로 법은 정의로워야 한다 뭐 이런 논지를 전개할 수야 있겠지만, 생각해보자. 유신헌법도 법이다. 정의로운 법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참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법은 정의롭다는 명제는 무조건 거짓이다. -_-
자베르는 장 발장이나 팡틴과 마찬가지로 빈민 출신이다. 빈민이 거기서 벗어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떼돈을 버는 것이겠지만 그게 안 되는 보통 사람들은 (윤리적 타락을 포함해)범죄를 저지르거나,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것 뿐이다. 자베르는 세 번째 케이스였으며, 그 결과 어느 정도 입신하긴 했기 때문에 더더욱 법을 자신의 정의로 삼고 목숨처럼 옹호했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법이 인간의 도리에 비추어 그 자체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법을 다루는 자가 '정의롭게' 행사해야 비로소 정의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베르는 자신이 그렇게 열성바쳐 수호하고자 한 법제도와 사회체제가 어떤 내용물을 담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맹목적으로 법과 국가의 권위에 순종하는 걸 보노라면 어떤 의미로 참 평범하고 무지한 촌부가 연상될 정도이다. 유서에다가 감옥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몇몇 부당한 처우를 금지하라고 적어놓을 만큼 나름 공명정대한 사람이지만 기본은 그런 것이다. =_= 법을 행사하고 법이 적용될 '사람'은 망각한 채 그 법 자체로써 '정의'로 삼는 정의는 그 뿌리부터 약하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존중의 정의를 들고 나온 발장한테 결국 깨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거짓 정의에 매달려야 빈민을 벗어나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 야수는 그렇기에 위고 선생이 온갖 아쉬움을 더해 멋지게 묘사한 '불쌍한 사람'중 하나였던 것이고. (작가가 대놓고 대천사라고 부르더만)
사실 빈곤이란 어느 시대에나 있었기에 아베세 학생들은 자세하게 원인을 따지기보단 혁명만 하면 그것도 해결되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은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시대의 빈곤은 왕당파에 전적으로 책임지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뭐 마르크스 자신도 좀 다른 종류의 계급투쟁이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해결방법으로 들먹이는데 그게 실현된 러시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누구나 아는 거고, 경제문제가 혁명으로 해결된다면 민중은 농경이 시작된 이래 몇 번이라도 혁명을 일으켰겠다. =_= 여하간 민중들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존엄을 여지없이 박살내는 빈곤이었다. 그래서일까. 작가 자신이 한 때 혁명한다고 몸바쳤던 이상주의자였던 데다 구체제보다도 돈에 더 큰 죄를 물어서 그런지 앙시앵레짐의 자베르에 대해선 연민의 시선까지 느껴지는데 최악의 악당이자 천민자본주의의 테나르디에에 이르러서는 이뭐 -_- 아니 테나르디에가 발장 묶어놓고 가난을 저주하는 대목을 보면 정말 뼈가 저린다만, 뭐 그렇지 이상주의자는 대개 속물근성을 혐오하지. =_=
여하간 위고 선생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건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겠지. 우선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저 두 가지를 극복해야 했다. 그렇게 나락에 떨어져 인간의 도리까지 저버린 사람이 다시 선해질 수 있는가는 그 이후의 문제인 것이다. 장 발장이 코제트를 구원한 구체적인 방법이 벌어둔 재산에 바탕한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원체 악당인 테나르디에는 굳이 비참한 민중의 양대 적 중 하나인 빈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사람은 선하게 변할 수 있는가'라는 테마에 무리없이 집어넣을 수 있겠다만, 또다른 적인 앙시앵레짐의 편이지만 근본은 민중이기에 너무나 올곧은 저 자베르한테 그런 테마를 들이대면 개그가 되어버린다. 그 친구는 선인은 아니지만 악인은 더더욱 아니거든. 본줄기가 아닌 게 본줄기 위치에 들어가니까 막판의 애니 자베르가 내 자베르가 아니게 되어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야. 테나르디에에게 착해지라는 요지의 일장훈계를 하는 자베르라니 다시 생각해도 뭔가 웃기네 쿠울럭;;;
그래도 말이지... 할리우드 버전 레미제라블에선 리암 발장이 눈 앞에서 몸을 던진 제프리 자베르를 죽으라고 냅두고는 저는 좋아 죽어라 웃으면서 가버려 대략 정신이 아득해졌던 기억이 난다. 사실 자베르가 멀쩡히 살아남아 역날도를 쥔 사이토가 되어버린 거 하나 빼면 =_= 오리지날 스토리도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게 들어간 애니 쪽이 좋은 배우들 썩히던 그 영화보단 백배 천배 나았다. 아니, 자베르를 살린 게 그런 최후를 맞은 영화쪽 보다는 나은 결말이군. =_=
p.s. 말 나온 김에 다시 10주년 컨프런테이션 들으러 갈래염. 콤발장과 콰스트 자베르, 이 콤비가 흩뿌리는 포쓰는 정말 장난이 아니에염. 이 드림캐스트로 실황을 보는 건 말 그대로 꿈이겠지. OTL
p.s. 2 테메레르 왔다. 만국의 용이여 단결하라!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