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의 묘

영화, 뮤지컬 2006. 10. 25. 21:59
공부하기 싫으면 영상매체로 도피하는 이 슬픈 습성부터 좀 어떻게 해 봐야 하겠지만..OTL
아무튼 영화나 애니 재탕도 지긋지긋해서 이름있는 작품 중 아직 안 본 것을 고르다 이걸 뽑았습니다.





1945년 종전 직전을 중심으로 전쟁고아가 된 두 일본인 남매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그린 애니입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어린이'인 남매의 비극을 강조함으로써 일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그렸다는 비난을 듣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한창 독도 문제로 뒤숭숭하던 우리나라에선 이 작품을 결국 상영하지 못했습니다.

가해자는 어른이지 아이가 아니란 점에서 이건 피해자 가해자를 떠나 전쟁이 초래한 인류적 비극이라는 이야기도, 전쟁은 자기들이 벌인 주제 원폭 맞고 피해자인 척 하는 더러운 일본놈이라는 이야기도, 다 맞습니다. 이 남매는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이 남매의 비극은 종전을 전후해 일본의 약자들이 맞아야 했던 비극의 일면에 불과합니다. <2사6방의 7인>에서 전쟁을 벌인 건 남자 어른들인데 대가는 여자와 아이들이 치른다고 찌르던 대사 그대로지요. 근데, 무지도 죄란 말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일본은 일제에 의해 피해를 입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가해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데에 대단히 소극적이었습니다. 독일의 누구 총리처럼 위령비나 독립기념관 앞에서 무릎 꿇는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일본인들이 역사상 가해자였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분위기이길 바랄 뿐입니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종전 때부터 천황을 전범에서 제외하는 등 어떻게든 잘못을 인정하는 데 발을 빼고 빙빙 둘러대려 했으며, 그 결과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까마득한 노인이 된 지금의 젊은이들은 아예 그런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일본이 가해자였다는 걸 안다 해도 '그건 할아버지 세대의 일이지 나와는 상관 없어. 왜 내가 사과해야 해'가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피해자'라는 것만 강조하는 말을 가해자인 그들의 후손이, 그리고 피해자의 후손인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형법에는 과잉방위라는 게 있습니다. 정당방위를 해야 할 상황이라 방위하긴 했는데, 정도가 지나쳐서 가해자가 외려 피해자같은 꼴이 된 겁니다. 야밤에 여자 혼자 길을 걷고 있는데 흑심을 품은 놈이 달려들자 겁에 질린 여자가 냅다 근처에 구르던 각목을 휘둘렀더니 어랍쇼 그놈이 죽어버렸네 같은 상황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미국이 원폭을 던진 건 좀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잘못한 것이긴 하지요. 과잉방위도 정도가 정말로 지나치면 그냥 고의범 내지 과실범으로 형사처벌을 한단 말입니다. 원폭은 그런 것이니 접어두고, 일본 본토 공습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일본은 세계 제 2차대전을 일으킨 독일 및 이탈리아와 동맹이었으며, 스스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법논리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과잉방위한 사람이 못된 놈입니까? 아니 누가 먼저 강간따윌 시도하래?

제가 반일정서 극심한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색안경을 끼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미 끼고 있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안경에 색칠을 한 건지는 좀 따져봐야 겠습니다.

<간장선생>에선 일본 전역에 간염이 횡행하는데도 정부가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왜? 간염에 대한 처방은 잘 먹고 푹 쉬는 건데 그래서야 쌀 한톨도 퍼부어야 할 전쟁에 도움이 안 되니까요. 도망친 연합군 포로를 치료해주고 그의 도움으로 간염 바이러스를 발견한 주인공들에게 일본 정부는 폭력행사로 답하지요. 일제의 그런 비틀린 행태는 사실 일제 뿐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존재합니다. 그런다고 그들의 횡포가 일으킨 결과를 리바운드 먹은 일반국민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폴라리스 랩소디>의 명대사 하나 인용해 볼까요. 죄는 정부한테 물으라는 소리는, 길 가던 처녀를 덮쳐놓고서 그 죄는 바지 속의 그 놈에게 물으라고 말하는 꼴인 겁니다.

분명 일본의 일반국민들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이 좋든 싫든 가해자 집단에 끼어 있었음을 인정한 후에야 그들 역시 피해자라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피해자로서의 슬픔만을 강조하는 <반딧불의 묘>가 환영받을 수 없는 건 전쟁이 초래한 진짜 비극이 가해자로서의 죄를 은폐하고 가해자 스스로 '그래, 나도 실은 피해자야'라고 합리화하는 용도로 쓰임으로써 왜곡당하기 때문입니다.







p.s. 이거 보고나서 <화씨9/11>을 연달아 봤습니다. 미국인도 아닌 제가 미국 대통령이 하는 짓은 커녕 거기 신문도 알 수 있을 리가 없는 고로, 마이클 무어 감독이 이러저러한 거 아니냐고 톡톡 쏘면 그냥 긴갑다 듣고만 앉아있게 되더군요.; 뭐 부시 음모론은 둘째치고...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 가해자란 걸 분명하게 인정하면서 미군 전사자의 희생과 그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를 같이 하니 이 편이 저 애니보다는 더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기득권이 보장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긴장상태를 유발하는 한편 빈곤층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형식으로 전장에 내몰고 다시 그들의 피로써 돈을 번다, 시공 초월해 인류 사회에서는 그 짓거리가 계속 반복되어 왔다. 네놈들도 못됐지만 우리도 속는 건 작작 하자! 이렇게 정부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영화? 다큐?;;; 아무튼 표현물을 제작하고 큰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자라며 그렇게 떠드는 게 어쨌든 용납되는 사회라서 비바 아메리카올시다. 그런 의미로써만 피흘려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일 텐데.. 아, 이라크 전쟁을 비추는 장면에서는 잔혹한 장면이 연출이 아니라 실제상황으로 담겨 있습니다. 비위가 약한 분은 좀 각오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욱하는 한이 있어도 눈 돌리지 말고 보십시오.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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