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을 평정하는 데 종군하여 편장군이 되고 계양태수를 겸하여 조범을 대신했다.(운별전)
선주는 마침내 강남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를 거두어 군실을 채우게 했다.* (제갈량전)
*영릉선현전 주석 : 제갈량이 이때 임증에 머물렀다.
1. 공안 시절 관장조의 직함
적벽대전이 끝나고 주유와 조인이 남군에서 대치하던 209년, 유비는 형주목이 된다. 209년은 그때까지 별다른 기반이 없던 유비가 드디어 기반다운 기반을 얻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해에 유비 패밀리는 강남의 4군을 평정했다.
210년 무렵 유비군의 1군 엔트리에 속하는 관장조는 모두 태수직을 받았다. 관우는 탕구장군 겸 양양태수로 장강 이북에 주둔했고 장비는 정로장군 겸 의도태수->남군태수로 옮겨갔다. 조운은 본전에는 언급이 없고 운별전에 편장군 영 계양태수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음, 파성의 관우전은 저 부분 원문이 ?襄陽太守, 장비전은 ?宜都太守 라고 되어 있어서 저게 그냥 태수인 건지 영직 같은 옵션이 붙은 건지 잘 모르겠다. 같은 게시글의 조운전에는 글자가 깨지지 않고 멀쩡하게 나와있으니 다른 글자를 썼겠지 싶긴 한데.) 파성의 번역에는 "계양태수를 겸하여"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은 領桂陽太守 이다. 조운의 계양태수직은 영직이었다. 자명님의 설명에 의하면 영직이란 자신이 맡은 관직 이외에 다른 관직을 겸하는 것으로 대개 본래 관직보다 낮은 관직을 겸했다고.(참고 : 자명님의 글 領, 行, 守)
2. 각 임지의 위치
관우와 장비가 제수된 지역은 형주 북부에 치우쳐있다. 남군은 후한말에도 이미 독립된 군이었지만 양양과 의도는 아예 행정구역의 단위가 바뀌었다. 208년의 적벽대전을 전후해 형주땅에 조유손 세 세력이 한꺼번에 들어와있던 때라 각자 세력을 주장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개편해댄 탓일 것이다. 그림을 보는 것이 빠르다.
후한말 유표가 다스리던 시절까지는 크고 아름답던 형주 북부 지도가
위 지도들은 본 포스팅에 당장 필요한 자료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형주분쟁을 알아보긴 해야 하니 만약을 위해서 올렸다. 저기에 210년에서 219년 사이의 세력분포 및 변화를 더하면 끝내주(게 머리 터지)겠지만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손이 닿지 않는다.
어쨌든, 관우와 장비가 제수받은 지역들은 위치선정 자체가 상당히 호전적인 느낌이다. 관우가 제수된 양양은 유종이 항복한 때부터 이미 조조의 세력권이었다. 관우의 주둔지도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장강 이북이었다. 장비가 처음 태수로 임명된 의도는 저 무렵 어느 세력권에 속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후에 남군태수로 옮겨간 것은 문제가 있다. 남군에서 강릉 일대의 장강 이북지역은 주유가 주둔하던 곳으로 일단 손권의 세력권이었다. 그리고 주유는 210년에 사망할 때까지 남군태수였다. 분위기를 보면 유비가 주유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남군태수 자리에 장비를 넣은 거란 생각이 든다. 손권은 주유가 죽자 정보를 남군태수에 임명했는데(노숙전) 장비가 먼저인지 정보가 먼저인지 선후를 잘 모르겠다. 둘 중 어느 한쪽은 연주자사 선경 급의 허울일지도 모를 노릇이고. 확실한 것은 유비가 정말 적극적으로 형주를 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유비에게는 명분이 있다. 형주목으로서 형주 전체를 진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정에서 정한 관직과 관할이 유명무실하던 저 시절 실질적으로 남의 세력권에 속하는 땅에 제 신하들을 임명해 형식적인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일견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대놓고 정치적인 이 행동은 우리나라 헌법 제3조의 영토조항이 갖는 의미에 빗대어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북한애들이 뭐라고 떠들어도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다. 따라서 북한도 대한민국 땅이다. 현실이 어떻든 우리는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
형주 북부는 보다시피 세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최전방인 셈인데, 싸움을 오래 하려면 필연적으로 안정된 후방의 지원이 따라야 한다. 유비 패밀리에게 있어 후방은 형주 남부였다.
3. 군사중랑장 제갈량
강남평정 때 유비가 손에 넣은 지역은 무릉, 영릉, 장사, 계양이다. 제갈량은 210년에 군사중랑장이 되어 이중 셋인 영릉, 장사, 계양을 관할하게 된다. 왜 무릉은 관할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인데 그건 잘 모르겠다. 넘어가자. 제갈량은 210년부터 212년 내지 213년에 익주로 소환되기 전까지 짧은 시간동안
손권은 210년 무렵 장사군 일대의 행정구역을 임의로 개편했다.(제갈량전에 인용된 영릉선현전) 제갈량이 3군을 다스리는 동안 머문 곳은 임증이다. 후한말 지도에는 임증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손권이 행정구역을 손댈 때 임증현이 설치되었고 그 직후 제갈량이 그곳으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유비 패밀리가 스스로의 실력행사로 얻은 땅을 임의로 손댄 걸 보면 손권은 유비를 대등한 군주로 보지 않고 다루기 까다로운 객장 정도로 생각한 건가 싶어진다. 유비가 노골적으로 남군을 욕심내니 보복삼아 정치적인 실력행사를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강릉은 지금도 강릉이고, 임증은 현대의 후난성 헝양(衡陽)인 듯하다. 공안이 강릉 근처이니 강릉에서 형양으로 구글어스를 찍어보았다.
....공안에 있는 유비와 연락 한 번 하려면 넉넉잡아 왕복 한달은 잡아야 할 것 같은 거리감이 느껴진다.
물론 물길이 있다. 공안에서 장강을 타고 내려가다 동정호에서부터 상수(湘水)를 거슬러 올라가면 임증이 나온다. 그래도 상당히 먼 길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군을 셋이나 맡긴 것은 당장 장강 이북이 중요한 마당에 저 먼 곳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 귀찮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임증 일대가 상당히 복잡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곳은 현대의 후난성에 속한다. 후난성에는 40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섞여 살고 있다. 삼국시대에도 초 지역에는 산월이나 무릉 만이로 대표되는 '오랑캐'들이 자리잡았다. 제갈량은 유비의 주력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유비를 위해 징병하고 세를 거둬야 했다. 요역과 부세는 언제나 피치자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힘으로 제압할 수도 없다. 강동의 태도 또한 문제다. 북쪽에서 대치 중인 유비의 주력에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병력을 자꾸 빼내는 건 무리다. 아마도 제갈량은 단단히 작정을 하고 내려갔을 것이다.
그런 상황들을 염려했던 것인지 유비는 제갈량에게 한 사람을 같이 보내줬다.
4. 편장군 영 계양태수 조운
관우와 장비의 임지는 장강 근처였다. 조운은 정반대방향인 남쪽의 계양에 제수되었다. 계양은 제갈량에게 맡겨진 3군 중 하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안과 임증의 거리는 300킬로가 넘는다. 제갈량은 210년에 만으로 스물아홉이었다. 게다가 유비 패밀리 내에서도 출사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신참이었다. 아무리 능력자라 해도 어린 신참을 혼자 멀리 보내는 것은 안심이 되지 않으리라. 한편으로 조운은 군부의 고참이며 관우 장비에 버금가는 유비의 최측근이다. 우리 아마추어들 사이에서는 전장에서 유비의 직속부대를 이끌었으리라는 썰이 설득력있게 따라다니기도 한다. 조운을 보내는 것은 유비가 제갈량에게 자신의 최측근 중 하나를 선뜻 내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이 무렵은 유비 패밀리에 형주인사가 유입되기 시작한 때다. 제갈량은 형주인사의 대표다. 제갈량에 대한 대우는 유비의 고참들과 섞이기 시작한 형주인사에 대한 대우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들을 늘어놓고 보니 제갈량에게 조운을 보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로 크게 두 가지 정도가 망상된다. 정치적으로는 제갈량을 위시한 형주 출신의 신참들이 그만한 신임을 받고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는 여차하면 제갈량이 가진 적은 병력(명확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에 유비가 제갈량 쪽으로 돌릴 수 있는 병력이 그리 많았을 것 같진 않다. 제갈량을 저 지역에 보낸 것은 장강 저편과 입촉을 대비한 후방지원이 가장 큰 목적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으로 최대한의 실력행사를 할 수 있으면서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무관으로 최고의 카드를 보낸 것이 된다. 조운의 성격상 유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린 신참을 상관으로 모시면서도 원만히 지내리라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조운은 어린 신참 밑에서 신임장 셔틀 노릇이나 하러 간 것일까?
이 무렵 조운의 정식 직함은 편장군이었다. 편장군이 후한말 군부 내에서 정확히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위나라 쪽 고참들을 보면 관도대전을 전후해 편장군에 제수된 인물들이 많다.(우금, 장합, 서황 등등) 그렇지만 조조 시절 위나라 인사들의 관직은 '위나라'가 아니라 '한나라'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아직은 헌제에게 충성하는 외관을 갖춰야 하는 고로 관직도 '한나라'의 신하로서 받기 때문이다. 한나라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를 전제로 둘 때 편장군이란 하급장교에서 상급장교로 올라가는 중간다리 같은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비 패밀리는 그런 점에서 애매하다. 유비는 한나라의 관직체제를 엄격하게 따르지 않았다. 한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유비 패밀리는 사방장군 중 하나의 밑에 딸린 조그만 부곡의 무리에 불과하다. 규모부터 다르니 한나라의 관직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위나라 쪽의 사례는 기준이 되는 참고자료 정도로 보고, 삼국정립 이전 시대에 위나라 바깥에서 편장군에 제수된 예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같은 시기의 강동에 그런 예가 있다. 사망할 무렵의 주유는 편장군 겸 남군태수였다. 뭐?
물론 동오에서 주유가 차지하는 위상은 유비 패밀리에서 조운이 차지하는 위상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벼슬만 따지자면 간손미가 군사장군보다 높지 않던가. 게다가 유비 때문에 아스트랄해진 촉한의 관직체제를 생각하면 상식적인(?) 기준으로 관직의 의미를 따지는 것은 좀 곤란하다. 극단적인 상상인데, 동오측 군부의 대표인 주유가 편장군이라면 이쪽에서는 고굉지신이되 관우 장비의 다음 위치에 불과한(...) 인물도 그런 자리를 받는다고 뻥카를 치는 것처럼 준 직함일 수도 있다. 유비의 성격이라면 불가능하진 않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직함이 아니라 실세다. 나 같은 아마추어는 거기서부터 촉서의 부실함을 핑계로 gg치고 도망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동오 군부의 수장이었던 주유가 가진 지위였다. 영직에 대한 자명님의 설명에 의하면 편장군이 일개 군의 태수직보다 위일 가능성이 높기도 하다. 상과 태수가 동격인데 일단은 평원상 시절의 유비보다도 높은 분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3개 군을 맡은 제갈량에게 힘이 되려면 여차할 경우 3개 군 전체를 상대한다는 가정 하에 필요한 병력을 이끌 권한이 있었으리라는 상상도 가능하고. 어쨌거나 형주 시절의 조운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우스운 위치는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5. 결론
리퀘 완료.
p.s. 약간의 내용 추가는 클릭 <- 여기서 맨 아래의 뱀발 3번.
p.s.2 유비 패밀리 및 촉한 내에서 조운의 역할과 관련, 참고하면 좋은 글 :
강유는 제갈량과 조운의 후계자 맞다 by 올드캣 님
p.s.3 조운의 계양태수직, 어쩌면 제갈량 임증 시절의 기간과 관련 있는 메모용 포스팅:
209년을 전후한 형남4군 쪽 정리용 메모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