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 2012년의 중반에 이른 지금은 여기 적은 것과 생각이 좀 다릅니다. 그냥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던 적도 있었다고 저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내버려두는 포스팅임다.)
계한보신찬 때문에 뭘 좀 찾아보다 발견한 건데, 촉서 왕련전(王連은 왕련인가 왕연인가?)에 나를 자극하는 문장이 있었다.
건흥 원년(223) ... 당시 남방의 여러 군이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제갈량이 직접 그들을 정벌하려 했다. ... 제갈량은 장수들의 재능이 자신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마음 속으로 반드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 (촉서 왕련전)
아니 이보쇼?! 뭐라는 거야?!
5달 지나서 다시 보니 잘못 안 것, 잘못 추측한 부분이 잔뜩 보이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겠네;;;
223년은 유비가 사망한 해다. 그 해에 남중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제갈량은 국상을 당한 터라 바로 군사를 일으키진 않고 우선 오에 사신을 보내 화친했다.(제갈량전) 이 무렵의 사건을 정리하면 유비의 죽음이 223년 4월, 관이 성도로 돌아온 게 5월, 등지가 오나라에 도착한 게 11월이다. 후주전에는 여름(즉 4~6월 사이) 남4군(장가, 월수, 익주, 영창)에서 각각 반란이 일어났다고 적혀있다.
아마도 이 무렵 조운이 정남장군에 봉해졌다.(조운전) 파성넷의 장군직 관위표를 보니 사정장군은 외정사령관이며 이름자 그대로(征) 정벌전쟁을 주로 담당했던 것 같다. 언젠가 적었지만 조운의 정남장군직은 남중의 반란을 염두에 두고 이뤄진 인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우리의 승상께서는 정남장군까지 다 임명해놓고 장군들 믿을 수 없다 내가 직접 가야 한다 이러고 있었으니. -_-;;
그건 남중 반란의 성격이 단순히 치고받고 싸워서 이기면 끝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제갈량이 출정을 앞두고 마속과 나눈 대화를 보면, 처음부터 그쪽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안정과 북벌 양쪽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장기적인 결과가 나오도록 조용히 수습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촉장들의 주축은 유비 패밀리 출신으로 우선 정치 하던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유비가 죽은 직후였다. 아무리 성격 좋고 냉정할 땐 냉정한 조운이라지만 본질적으로는 유비 빠돌이다. 오나라 정벌에 반대하던 때야 그게 명분으로나 실리로나 촉나라와 유비의 캐치프레이즈가 걸린 문제라 냉정하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내부문제인 남중을 어떻게 다루겠냐고 물었을 땐 선제폐하께옵서 승하하시어 나라가 위태로운 이 때에 감히 반란을 일으키다니 죽어!!! 같은 마인드로, 웬일로 강경하게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제갈량이 마속의 발언을 높이 산 것도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유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제갈량의 계획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기 때문일 수 있다. (마량전에 인용된 양양기에는 남중으로 떠나던 제갈량이 전송나온 마속더러 "오랫동안 모의하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음 ㅇㅇ"이라 말하고 그러자 마속이 한 대답을 택해 남중 평정에 적용한 것처럼 적혀있다. 이미 군사를 내어 당장 출정하는 마당에 제갈량처럼 신중한 사람이 마속 한 사람의 말을 듣고 갑자기 전쟁의 목적을 바꿨을 리는 없다. 제갈량은 처음부터 마속과 같은 생각을 했지만 촉나라 내부에서는 야이 반란군노무시키야 니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 지금 전차군사를 몰고가서 니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이런 분위기가 다수파였다는 증거로 생각된다. 마속은 몇 안 되는 지지자였고.) 즉, 나에게는 왕련전에 적힌 제갈량의 마음의 소리가 전쟁 뿐 아니라 정치도 자신의 구상대로 할 수 있는 장수가 자기 빼면 없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왕련전만 보면 이후 225년 친정에 나설 때까지 약 2년쯤 되는 시간 동안 제갈량이 왕련의 간언을 받아들여 친정을 미룬 것처럼 되는데, 겨우 건강 문제 하나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을 리는 없다. 우선은 형주 상실과 이릉을 전후해 날려먹은 국력을 보충하느라 전쟁할 힘이 없었을 테고, 동시에 내가 꼭 친정을 해야 하나, 달리 내가 바라는 대로 전쟁과 정치를 동시에 수행할 사람 없나 찾았겠지. 근데 승상님 그쯤 되면 이미 군인이 아니라 카이사르에서 야심 성분을 뺀 굇수를 바란 것이지 싶으요...;
어. 갑자기 충실하게 문관 테크를 밟던 등지가 대뜸 무관으로 옮겨간 거나 가정에 마속을 보낸 이유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망상이 지나쳤나? -_-;;;
여하튼, 정권교체시기에 일어난 반란은 신속히 바로바로 제압해야 한다. 그런데 223년은 곤란했다 쳐도 왜 224년이 아니라 225년에 출정한 건지 의문이다. 이릉의 후유증이 그렇게 컸던 걸까?
같은 시기, 손권은 223년에는 쳐들어온 조진을 상대하고 위나라로 도망간 배신자를 공격하느라 좀 바빴던 것 같다. 224년에는 조비가 내려왔다고 한다.(오주전) 정작 조비는 223년엔 조용했고 224년엔 회수(즉 위와 오의 서주 방면 국경지대)까지 수군을 끌고 한번 내려간 적이 있긴 한데 전쟁을 치른 것 같진 않다. 225년에야말로 손권을 정벌하겠다며 다시 수군을 데리고 회수까지 간 모양인데, 역시 이렇다 할 전투는 없었던 것 같다.(문제기)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비는 이릉 패전과 유비의 죽음으로 국력이 약해진 촉은 언제든 칠 수 있다 보고 오를 더 만만하게 여긴 건가 싶다. 그래서 우선 간 보러 갔다가 입맛만 다시고 온 거고. (223년에 내린 조칙에는 "이제 겨우 천하가 평정되었는데" 라는 대목이 있다. 유비가 죽었으니 난세는 사실상 끝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동오 지못미 +추가 : 문제기를 다시 읽어보니 이게 223년 1월에 내려진 조칙이었다. 1월이면 아직 유비는 살아있던 때다. 이릉 건으로 촉이나 오나 국력이 저하되었다고 본 건 다르지 않은 듯하지만. 죄송합니다.;) 한편으로 224년의 촉은 관문을 닫고 군사를 쉬고 농사를 권면하는 등 내정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인다.(후주전)
역시 형주상실과 이릉패전 콤보로 후유증이 컸던 모양이다. 이런 때에 조비가 촉이 아니라 오에 집적댄 건 천운이라고 할 밖에. 승상의 노심초사, 그리고 월화수목금금금의 승상부가 눈에 보인다. -_-;;;
추가로, 정남장군 조운은 곧 진동장군으로 옮겨갔다. 쭝궈를 잘 모르니 쉼표로 구분된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223년 조운이 중호군, 정남장군, 진동장군 테크를 밟았다는데, 중호군은 중앙군으로 내직이고 정남과 진동은 지방의 외직이다. 그럼 우선은 중호군에서 정남장군으로 옮겨간 게 아닌가 싶다. 그보다는 정남에서 진동으로 간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227년 조운이 제갈량을 수행해 한중에 갔을 때 진도가 영안으로 가 동쪽 방위를 담당했다는데(이엄전)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조운이 영안에 있었나 싶고. 중호군, 정남, 진동 테크가 모두 같은 223년에 일어난 일인지, 그것이 가장 의문이다. 내 머릿 속에서는 남중 문제를 두고 처음엔 당연히 조운을 보내려 했더랬는데 이 양반이 예상과 정반대로 열을 내다가 승상과 한판 하고 진동으로 돌려졌나 하는 망상마저 뭉글뭉글 솟고 있다. 물론 그런 일이 진짜로 있었다면 조운전 본전의 글자수가 늘어났겠지.(...) 글쎄, 기록은 없지만 조운이 남중까지는 정남장군으로 따라갔다가 공을 세워 영창정후에 봉해졌고, 평정이 끝난 225년 이후에 진동장군으로 옮겨간(그리고 그와 관련해 영안에 간) 것일 수는 있다. 그러니까 망상은 망상일 뿐 근거로 삼을 기록이 없다는 게 레알 문제이긴 한데...-_-;
다시 추가로, 사진장군은 방위 담당이며 사정장군과 병설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참고한 장군직 관위표에서는 사진장군이 사정장군보다 격이 떨어진다는데, 조운의 경우에는 격의 문제가 아닐 거라 생각된다. 진동이면 동쪽 방위라는 건데 동쪽에는 오나라가 있지 않은가. 이릉대전 끝내고 간신히 화친하나 싶었는데 군부의 수장을 "정동"장군 만들면 오나라가 좋아할 리 없다. 같은 이유라 여겨지는데, 오나라에도 정서장군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264년 "정서"장군 유평이 출동해 나헌과 붙긴 하는데, 그때 쯤이면 유선이 이미 항복한 후니(263년) 위나라 땅이라 생각하고 쳐들어간 것 같다.
(+추가? 정정? 제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며, 본문에도 오류일 가능성이 높은 부분이 있어 따로 적습니다. 조운은 중호군 자리를 겸하면서 정남/진동을 수행한 거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이쪽 링크로)
p.s. 계한보신찬 건은 거기 이름이 실린 순서 문제 때문임. 황충까지는 연공서열인갑다 싶은데 그 다음부터 조운과 진도 사이에 들어간 익주 인사들이 아스트랄함. 직위 순서인가 생각하면 "교위" 따위가 장군들보다 먼저 언급된 게 괴이하고 사망한 연도 순서인가 생각하면 이릉 때 일찌감치 사망한 마량이 말미에 적힌 게 묘하고. 선생님 가르쳐주세요!
p.s.2. 역시 계한보신찬을 보다 든 생각인데 위연의 연령대와 영입시기가 아리송함. 위연전에는 그냥 "의양 사람, 부곡으로서 유비를 수행해 촉에 들어갔다"고 되어 있음. 의양군이 후한말 남양군과 강하군에 걸친 지역이니 빠르면 신야 시절, 늦어도 형남평정 때는 들어왔으리라 생각됨. 아문장이 된 게 입촉 후니까 아무래도 형남평정 때라고 보는 게 시기는 맞겠지만. 그래서 정확한 출신지가 의양의 어디냐고. 남양 쪽이면 신야 시절, 강하 쪽이면 형남평정 무렵이려니 망상추측이라도 때리겠는데 왜! 의양 다음에 어디라고 기록이 없는가, 위문장! 현 단위로 고향을 묻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구가 없었느뇨!
같은 건 훼이크고, 위연이야말로 난세이기에 실력 하나만 믿고 출세할 수 있었던, 고향도 뿌리도 모르는 평민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p.s.3 짧으니 여기에 붙이겠음. 일전에 조운의 편장군 영 계양태수직에 대해 망상질 포스팅을 하면서 제갈량과 조운이 입촉 전까지 임증에 있었다는 투로 끄적였는데, 아무래도 기간이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음. 우선 결혼동맹 문제. 조운이 손씨와 동오 사람들을 상대했다는 운별전을 믿는다면 그 무렵 조운은 임증 같은 구석 변두리가 아니라 공안에 있어야 함. 그럼 210년은 몰라도 211년엔 조운이 공안에 있었다고 봐야. 운별전 쪽이 틀리거나 조운이 애초에 임증 내지 계양 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할 말이 없고. 뭐어, 운별전을 부정한다 해도 어차피 제일 큰 줄기는 변경할 게 없어 보임요. 군사행동이 가능한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제갈량이 남쪽에서 일을 잘 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더 후덜덜해질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