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블로그가 방치되고 있는 원인의 9할은 트위터에 있다. 끄흠;;;;;;
중간에 다른 분과 답글을 주고받은 부분은 그분의 닉을 @닉 형태로 표시했다. 그분들의 답글을 포스팅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진 않았으므로 내 트윗만 올린다.
2012.10.4.(10.3. 트윗에 이어서)
아, 전에 끄적이다 만 강주 성쌓기 말인데, 이거 제갈량이 북벌 동안 후방의 안전을 다 이엄한테 맡긴다는 의미 아닌가 싶다. 지도 보니 강주가 남중, 동오 방면 뿐 아니라 성도를 곧장 바라보는 위치다. 실제로 이엄한테는 한중공방전 중에 광한 쪽에서
일어난 반란을 자기 휘하의 병력 약간으로 진압한 실적이 있다. 강주를 기지로 삼아 방비하다가 뭔 일 있으면 알아서 다 막으란 거겠지. 즉 226년 이엄의 이동과 성 쌓기는 북벌 앞두고 군부를 정리하면서 이뤄진 일일 거라 생각된다.
신뢰해주면 뭐하나 능력이 있으면 뭐하나 본인이 비뚤어지면 말짱 헛거지... 이평 개새끼
@올드캣님 제 머릿속을 읽으시다니(...) 사실 만일 이엄이 본격적으로 딴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강주에다 성 쌓은 건을 조금 들춰보고 있었습죠.
이엄이 강주에 있었던 시기가 226년~230년인가 까지니까 시간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일단 그 정도로 제갈량이 촉 내에서 중앙, 지방을 아울러 꽉 잡았고 신망이 깊었던 거라 생각할까 합니다.
엇 (제갈량이) 강양에 머문 적이 있었나요? 아까 강주 지도를 보다가 강양이라는 지명을 보긴 했는데 성도에서 남중 방면 가는 길목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갈량전부터 다시 봐야겠네요. 그리고 조운 강주독 건은 화양국지였나 어디에 기록된 역대
강주독 리스트에 조운의 이름은 빠진 걸 누군가가 찾아낸 적이 있어서, 조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독강주'로서가 아니더라도 그냥 강주 쯤에서 자기 병력 통솔하며 머무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요.
예, 운별전입니다. 정남장군 떡밥이라던가 중호군이 출정 나가는 대장군 직속인 것도 있고 해서 저도 '독'은 아니어도 강주에 분명 군사를 이끌고 머문 적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독강주로 관할을 고정시키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네요. 남정 당시 정남장군 조운이 제갈량 따라 움직였을 경우를 전제하는 겁니다만, 제갈량의 본대가 남중을 정리하는 동안 조운이 동오, 성도 방면의 불온한 움직임을 견제하고 여차하면 남중을 백업하기 위해 강주에 있었을
거라 상상해봄 직도 하네요. 그렇게 가정할 경우 북벌하러 조운이 한중으로 이동할 때 중도호 이엄이 그 역할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도 있고요. 어 이거 재밌는 떡밥인데요?
제갈량의 입촉 때 강 타고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깐 곳이 혹시 강주 부근 아닌지요? 파군의 주부소재지가 강주던데. 각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은 진짜로 조운빠의 망상질입니다. 제갈량이 남중에서 성도로 돌아온 게 225년 12월
입니다. 후주전은 그 다음 226년에 대해 이엄이 강주로 가서 성 쌓았다 한 줄만 적고 227년으로 넘어갑니다. 조운이 중호군 정남장군으로서 남정 때도 제갈량을 수행했는데, 그 역할이 본격적인 참전은 아니고 강주에서 남정 백업 및
후방 안정이었다, 근데 남중은 제갈량 본진이 쓸었고 성도는 안전해서 별 일 없었기에 조운전 본전에도 적을 게 없었다고 가정해봄 직도 합니다. 후방 안정을 언급하는 건 당장 223년 초반 유비가 영안에서 갈락말락 하던 시절에도
촉군 바로 옆인 군에서 반란이 있었으니까요. 오나라는 여전히 유천을 교주에 박아놓고 남중의 반란지역과 연계하려 했으니 중요한 요충지인 강주에 믿을맨을 두는 것도 제갈량의 성격상 할 만한 일입니다. 한편, 전출사표가 올라간 후에야
촉에 "중령군"이 등장하는데, 상총을 중령군으로 추천하면서 기대했음직한 업무내용은 언젠가 제가 블로그에 끄적였듯 호군™이 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조운전 본전을 보면 조운은 227년 제갈량을 따라 북벌하러 가기 때문에, 상총이
'성도'에서 조운이 하던 일을 이어받은 거라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조운이 남정 때 강주에 머물렀으리라는 제 망상썰이 가능한 게, 분명 226년에 이엄이 강주로 이동했으니까요. 226년 내내 조운은 제갈량과 같이
성도로 돌아가 상총이 맡게 될 일을 수행했다고 가정하면 시간대에도 문제 없습니다. 어차피 이
망상에서 조운이 강주에 머문 건 어디까지나 총대장 제갈량을 수행하는 "중호군"으로서지 "독"이 아니기도 합니다. 망상 끝!
*진수가 쓴 삼국지 촉서 조운전은 중호군 임명부터(223) 1차북벌을 위한 한중 주둔(227) 사이에 공백이 있습니다. 위 10월 4일자 트윗은 그 공백기간 동안 조운이 어디서 무엇을 했을지에 대한 망상입니다.
2012.10.3
226년 이엄이 영안에서 강주로 이동해 큰 성을 쌓았다(후주전)는 대목은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제갈량이 남중에서 성도로 돌아온 건 225년 12월, 한중에 주둔한 게 227년 봄, 1차북벌은 228년 봄(이상 후주전) 근데 명제기를 보면 1차북벌은 228년 1월이니 한중 주둔도 227년 되자마자 시작했을 가능성은 있음.
촉서 좀 봐야겠는데 파성이 망해서 나도 망했네. 뭐 됐어. 시간도 없는데 얼버무리자.
음 영안은 빼도 박도 못하게 대 동오전선의 최전방이고 강주는 영안이든 남중이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요충지. 막 남중 평정이 끝난 시점에 성 하나 지어놓으면 혹시 남중 쪽이 다시 잘못되어도 신속하게 쳐들어가고 여차하면 오와 연결하지 못하도록 차단..은
훼이꾸인 게 남중은 어차피 남쪽의 교주 통해 동오와 연결될 수 있으니까... 이건 지도를 봐야겠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덕질하자.
이엄이 강주에 성 쌓은 게 제갈량의 지시인지 이엄의 독자적인 행동인지 그것만 확인하면 되는데.
근데 이엄한테 그럴 권한이 있는지 여부도 모르겠다. 중앙에서 뭐라 한 흔적은 없는 듯하니 일단 문제는 없었던 듯한데.. 이것도 관직 이야기로 가나? 중도호?
근데 이엄이 강주로 옮겨가선 한중에 불려갈 때까지 쭉 눌러앉지 않았나? 영안은 진도한테 떠넘기고.
음 이엄이 좀 더 후방으로 내려가고 그보다 하급자인 진도가 영안에 남은 게 동오에 대한 어떤 제스쳐였을 가능성이 있으려나... 어쨌든 오늘은 덕질 그만.
내가 제갈량이라면 북벌 앞두고 동오가 뒤통수 못 치게 완전히 화해할 필요가 있으니 그 관점에서 보면 이엄의 이동은 제갈량 지시인데, 이게 유천이 교주에 머물던 시기와 이회가 남중 쪽에서 도독 노릇하던 시절이랑 어떻게 겹치는지 확인이 필요해.
그래서 성은 왜 쌓았냐고. 아오 그만! 이래서 내가 탈덕해야 한다는 거다.
2012.9.28
연의에선 조운이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다 한다. 한편으론 제갈량이 사망했을 때 후주가 금병산이 무너지는 꿈을 꿨다고 한다. (*주 : 이것도 연의) 근데 그 금병산이 어디 있나?
현재 조운묘(廟말고墓)가 있는 곳은 大邑이라는 현인 듯. 지도 중앙의 원형 순환도로에 둘러싸인 게 성도, 북서쪽에 도강언시가 보이고, 두 도시와 대략 이등변삼각형을 찍는 위치에 주황색 상자로 표시된 곳이 조운묘.
좀 더 보기 편한 구글지도 버전
그래서 금병산이 어딘데?
나본 미워 퉷퉷
2012.9.24
사정, 사진장군 > 중호군, 중령군 등등이라고 보기도 뭣한 게 중호군 편장군 비의 > 호군 정서장군 강유. (중호군>호군) 물론 비의는 중앙 쪽 실세 라인이라는 어드밴티지가 있으나, 그렇다면 이번엔 비의의 중호군직 전임자인 중호군 정남장군 조운(..)
물론 조운의 생전과 사후를 비교하면 장군호 인플레로 같은 관직이라도 위상이 많이 달라지지만(군부에서 탁고대신인 이엄 빼면 실질적으로 윗사람이 없다시피 하던 정남장군 조운의 위상이 위로 줄줄이 있는 정서장군 강유의 위상과 같을 리 없잖(...))
여튼 실제 서열을 보려면 한 사람 앞에 나열된 직함만 가지고 줄세워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듦. 이엄탄핵표문만 봐도 일단 중감군>중호군>호군 으로 서열이 나뉘는 게 보이는데, 그 직함을 제하고 보면 편장군이 정서장군보다 높아보이는 당황스러운 현상이 일어남
이게 다 실은 한대의 관직과 장군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는 문제인데(...) 간단히 생각하면 앞에 붙은 게 진짜 직함이고 뒤에 붙은 장군호는 지휘할 수 있는 병권의 크기 같은 게 아닐까 싶긴 함. 아무튼 관직 이야기만 나오면 정줄상실
2012.9.9.
도겸에게 의탁할 무렵의 유비가 실은 유우 참살 사건과 관련해 일부러 공손찬을 떠난 거라 추측하는 이유 중 하나가 유비를 따른 오환 기병이다. 공손찬은 이민족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고 그들에게 인망이 있었던 유우를 죽이기까지 했으니까.
2012.8.22
趙雲(字 子龍) vs. 陸雲(字 士龍) 이 이름과 자는 역경의 雲從龍이란 구절에서 따왔을 테고, 육운은 육손이 죽고 한참 후에 태어난 손자니까 양자의 이름, 자가 겹치는 우연은 그냥 주유와 제갈근의 이름, 자가 겹치는 우연 같은 것. 그래도 재미지지.
왜냐면 상산남자의 출신에 대해 벼라별 망상을 일으키므로.(...) 조운문관설이 참 뒷목 잡게 하는 농담이긴 한데 가끔은 제대로 써먹어보고 싶어진다.(...)
만일 상산남자의 이름과 자가 내 가설(추측질)대로 역경에서 따온 거면 이름 지어준 양반이 경서 정도는 읽어봤다는 이야기다. 雲從龍이 군신관계를 빗댄 말이니 더더욱 확실해지지. 강동의 대 명문인 육씨에서 아무 이름자를 쓸 리도 없고
.
2012.8.21
운별전을 보고 있노라면 공손찬 앞에서 하는 소리에 왠지 중2의 향취가 느껴진다. 난 그때 상산남자가 20대 초반이었던 게 틀림없다고 믿는다. 160년대후반 출생으로 추정되는 장비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어리게 본다는 뜻이다! 이건 양보할 수 없어!
"세상이 요지경이라 옳은 놈 하나 없는데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댁이 더 나아보여서 온 거거든요? 딱히 원소가 싫은 건 아니거든요?" 동네 사람들의 추천으로 손찬이횽 편드는 의용군 대장님이 되어 가서 한다는 말 좀 보소.
원소가 한복을 뒤통수 친 191년 말 기주 사람들이 다수 공손찬 편을 들었는데 그때 상산남자가 갔다고 치면, 192년 1월 계교전투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이때 딱 스물이었다 치면 217~219 한중에선 40대 후반 한창나이. 매우 좋소
조콩의 본군을 상대로 능욕 수준의 무쌍을 펼치려면 그만한 체력은 있어야져. 아무나 염파 흉내를 낼 수 있는 건 아님.
@비밀계정님 넹 굉장하죠 그것도 최소 1만명 정도는 거느렸으리라 추정되니까요. 그냥 경기병 키우기도 어려운데 말이죠. 등자가 덜 발달된 그 시대 기준으론 아주 어릴 때부터 말 타니까 말 위에서 활질하던 이민족 수준에 근접했단 이야기ㄷㄷㄷ
전 계교에서 공손찬이 패한 게 공손찬 패망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 후로도 몇 년 간 두 사람은 계속 기주 동부와 청주에서 치고박고 싸웠거든요. 개인적으론 공손찬이 유우를 죽인 게 결정타 같습니다.
유우는 유주에서 한목 이민족 안 가리고 널리 인심을 얻은 황실의 큰어른이었으니까요. 유우가 공손찬 치겠다니까 무려 10만 병력이 모이더란 것만 봐도... 참고로 계교전투에서 공손찬군이 3, 4만쯤 됩니다.
원소 사망 시 기주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원소는 비록 기주를 얻을 땐 치사한 수를 썼지만 인심은 얻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흑산적 퇴치와 관련지어 생각합니다) 반면 공손찬은 유우를 죽인 때부터 점점 사람이 미쳐가는 느낌
넹 민심 잡는 것도 실패하고 원소와의 전투는 점점 밀려서 청주 뺏기고 기주도 다 내주고 아첨하는 소인배들 말만 듣다 우주방어 한다며 틀어박히고... 원래 공손찬이 출신이 한미한 입지적인 인물이란 걸 생각하면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실력과 배짱만으로 성공했던 사람이 하극상 일으켜서 직속상관격인 유우를 죽이고, 게다가 계속 실패를 경험하면서 추락한 것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그러니까 난 조운과 유비가 공손찬을 떠난 타이밍이 귀신같이 느껴진다니까. 심지어 유비는 조콩의 서주학살로 난리가 난 와중에 도겸을 돕는다는 명분까지 쥐고 나갔다. 조운은 유비가 평원상일 때, 즉 서주구원 가기 전에 이미 나갔고.
전해는 끝까지 공손찬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는데 도겸이 병력 조금 붙여줬다고 서주에 눌러앉는 유비를 그냥 내버려둔 것도 은근이 맛난 떡밥이다. 물론 유비의 세력이 당시 매우 미미하긴 했지만 일국의 상까지 시켜준 걸 차버리는데 곱게 보내주긴 어렵잖아.
유우 참살이 193년말, 유비의 도겸 귀부가 194년 여름. 그리고 역경 함락이 199년. 진짜 귀신같은 타이밍이고 혜안이었다니까. 상산전투가 193년인 것 또한 나에게 맛나는 떡밥을 선사하고 있지.ㅋ
ㅋ
2012.8.14
문득 강유가 무사히 말년을 보내고 계한보신찬 같은 걸 지었더라면 조운에 대해서는 어떻게 썼을지 궁금해졌다. 네놈이 지어바친 시호에 대한 책임을 져라 이 똥강아지야(...)
@비밀계정님 고견이라뇨...;;; 전 글쓴이와 대체로 같은 생각입니다. 운별전을 신뢰한다는 전제로, 조운은 의용군 대장으로서 공손찬에게 갔지만 정식으로 직함을 받은 건 아니었고 아무튼 작은 무리의 대장격이란 뜻에서 主자를 썼나 싶습니다.
한대에 흉노 대책으로 기병을 열심히 장려하긴 했지만 아직도 등자가 완성단계는 아니던 시절이라 특수하다는 이미지가 있네요. 백마의종 같은 것도 그렇고요. 해서, 유비한테도 기병이 많진 않았을 테고, 조운은 그중에서도 주력으로
뛸 정도의 기병이었다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요컨대 공손찬 밑에선 그냥 의용군 대장(벼슬없음)->유비 밑에서도 그냥 대장급 기병(벼슬없음 기병 적음) 이런 느낌? 아마추어 조운빠의 추측일 뿐이지만요.
넹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형의 장례를 핑계삼아 멋대로 공손찬을 떠나버리는 게 설명이 안 되죠. 아무리 막장이던 시절이라지만 일단 사관한 주인을 그런 식으로 버렸다면 유비부터가 좋게 평가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훗훗훗, 운별전을 신뢰한다는 전제지만, 나는 유비와 조운이 각각 공손찬을 떠난 이유가 유우 참살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질하지. 원소 대 흑산적의 상산 전투가 193년, 유우 사망이 193년 겨울, 유비의 도겸 귀부가 194년 여름.
2012.8.12
좌장군 영 익주목. 제갈량은 군사장군 서좌장군부사고 법정은 양무장군 촉군태수. 제갈찡은 좌장군부 직속이고 법효직은 익주목 직속인가, 생각하면 이것도 곤란한 게 주목직 자체가 군사권의 상징이잖아... 유비가 맘대로 좌장군부를 설치한 이상 한나라 때완
달리 유비의 좌장군직은 그냥 명예직은 아닐 터, 그런데 대체 거기서 뭔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네. 법정은 성도에선 태수, 출정하면 모사 노릇했고 제갈찡은 유비 출장기간동안 성도를 진수했는데. 으음 이 두 양반의 업무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 건지.
@올드캣님 음, 주목과 그 밑의 태수가 하는 일은 대강 짐작이 가는데 좌장군이 하는 일은 아리송해서 그렇습니다. 한중왕 된 유비가 익주목은 유지하면서 좌장군 인수는 반환한 것에 생각해볼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법정의 역할이라 하시니 북벌 때 등지가 양무장군이었던 게 괜히 떠오르네요. 법정도 양무장군, 등지도 양무장군.
생각해 보니 자사에 군권 더한 게 목이니까 어차피 주목이라고 해도 행정 쪽 일이 줄어드는 건 아니네. 그럼 좌장군부에 좀 더 군사적인 권한이 치우쳐 있었을까? 하지만 종군은 법정이 하고 제갈찡은 익주의 대장님 대리였는데. 뭐야 군사장군도 파야 하나;
領은 약간 하위인 관직을 겸할 때 붙이는 말이기도 하고, 좌장군>익주목인 건 확실하니 좌장군부에서 익주목의 일도 다 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까? 유비와 비슷한 예가 있으면 참고가 될 텐데. 조콩은 사공>거기장군이니 필요없네. 도움 안 되는 조콩.
2012.7.30. (7.23.트윗에 이어서)
214년 5월 손권이 환성 공격(오주전) 7월 조콩이 손권 공격(무제기) 문맥을 보면 역시 합비인덧. 그럼 익양대치는 조콩이 돌아가는 10월 이후의 일인가? 복씨 일족 주살이 같은 해 11월의 일인데 묘한 기분이 드네.ㅋ
2012.7.27.
내가 승상이고 백수로 성도에 갔더라면 도강언 하나만 가지고도 십수년은 파워덕질을 했을 것 같다. 이게 과학이고 진짜 인류의 유산이네. 너무 멋있다. 둑 하나로 사람을 감동하게 만들다니ㅠㅠ
*이 무렵에 하라는 리퀘는 안 하고 트위터에서 도강언 핥았음(...)
2012.7.23.
떡밥으로 가득한 운별전이 좋으다. 역시 상산남자는 순수한 군바리는 아니고 권력의 핵심에 접근해 있었던 것 같은 감이 온다. 그런데 본인은 정치엔 어쩌다 간언의 형태로만 참가하고 끝까지 군부 쪽에 집중한 것 같다는 느낌도. 으헤헤헤 이거이 나의 상산남자
입촉 때 진군로에 대해서도 약간은 생각할 거리가 있는덧. 고립(?)된 유비가 정말 다급한 상황이었으면 제갈량이 바로 유비 쪽에 가지 군을 쪼개 남부부터 정리하면서 올라가진 않았겠지. 그나저나 유비는 입촉하고 나서도 엄청 바쁘게 돌아다녔네.
낙성 함락은 오주전 참고할 때 아마도 여름5월 무렵이나 그후. 제갈근이 한번 성도에 간 것 같고, 그 다음 익양대치. 조콩 때문에 유비가 양보했는데, 무제기 의하면 장로 정벌은 215년 3월. 유비 돌아간 후 손권은 합비(치즈!) 가는데 그게 8월.
장로가 투항하는 건 11월. 그 무렵에 유비도 파중 제압. 12월부터 216년 1월 사이에 탕거 전투. 5월에 조콩 위왕 즉위, 겨울엔 또 손권 때리고. 217년 겨울은 바야흐로 한중전 개막. 아무튼 유비는 생각보다 성도를 자주 비운 듯도.
*블로그에 유파 관련 메모를 끄적이기 앞서 트위터에 떠오르는 대로 끄적인 혼잣말
2012.7.16.
전에 예장 지역의 동광에 대한 링크를 잡아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울 승상의 예장 시절은 길지 않았지만 후에 촉에서 화폐 찍은 건 그 시절의 경험에 바탕했다 상상해볼 법도 하다.
ttp://pinkpung359.blog.me/90063684759
오왕 유비가 소금 굽고 돈 찍었다는 게 저래서 가능한 이야기였구나. 염철론도 그렇고. 스크랩한 건 10년초인데 2년 반이 지나고서야 내용을 이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