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점에서 여제만 37화는 유료 연재분이니 공개분을 보는 분들께 자칫 미리니름이 되리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여제만이 어떤 만화냐고 묻는다면 여제만 37화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다 끝날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에피소드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과 작가의 생각과 그것에 대한 표현방법을 포괄적으로 관통하는 힘이 있다.
37화의 소재는 유엽이 아버지의 첩을 살해한 사건이다. 삼국지 유엽전에서는 유엽이 7세일 때 어머니가 유엽과 유엽의 두 살 위 형에게 남편의 첩을 죽여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한 것, 유엽이 13세가 되었을 때 그 일을 실제로 행했다는 것, 유엽의 아버지 유보가 노해서 사람을 보내 추격하자 유엽은 어머니의 유언을 실행한 것이니 "감히 함부로 주살하는 징벌을 받을 수 없다"고 항변한 것,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진수는 서술자인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런 사건이 있었다 라고 간결하게 적는 선에서 끝냈지만, 이 일화에는 진수가 적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넘쳐 흐른다. 남자가 첩을 들이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풍경, 남자에게 사랑받는 첩이 횡포를 부릴 수 있는 풍경, 본처가 아직 10세도 되지 않은 어린 자식들에게 그 첩을 살해해달라고 유언할 정도로 걱정과 증오를 품는 풍경,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벌할 때 "주살"까지 할 수 있었던 풍경, 살인이 일어났지만 죽은 사람의 신분이 "시비"에 불과하기 때문인지 관이 개입하지 않아 살인자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처벌을 받지 않은 풍경 등등. 37화에서는 이렇듯 문자로 적히진 않았지만 행간에서 서성거리는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유엽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첩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재구성한다.
1) 본처와 첩, 그리고 남편
작중에서 유엽의 아버지와 처첩 사이의 관계를 대비시켜 드러내는 장치가 경제권이다. 2세기의 중국에서는 여자의 경제활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도, 보호받지도 못했다. 여자가 생계를 꾸리려면 결혼해서 처첩 중 하나가 되거나, 수입은 적고 노고는 큰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엽의 아버지는 본처가 생활비 및 자식 교육비처럼 가족의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지출을 위해 돈을 요청할 때는 싫은 소리를 하면서 첩이 사치품에 쓸 돈을 요청할 때는 곧 들어주는 모습을 보인다. 가족의 생활을 위한 지출에 들어가는 돈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사치품에 지출한 돈은 쉽게 주목을 끈다. 본처의 생활비 지출보다는 첩의 사치품 지출에서 자신의 재력과 위신을 "과시"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출에 더 만족한 것이다. 작중에서 유엽의 아버지가 보인 태도의 차이는 그런 것이다.
이런 시대에 여자가 생계를 꾸리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엇이 좋을까? 남편에 종속된 가족구성원 안에서 지위만 그럭저럭 인정될 뿐 합당한 권리를 요구해도 싫은 소리를 듣는 본처가 좋을까, 살해당해도 살인자가 처벌되지 않을 정도로 비천한 지위지만 남자의 과시욕이 유지되는 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첩이 좋을까, 그냥 허드렛일을 하며 자기 손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이 좋을까? 한 가지 함정은 저 시대의 여자가 결혼하지 않거나 자식, 특히 아들이 없는 경우 비참한 취급을 당했으니 적은 소득이나마 독신으로 살아가는 선택지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경우는 여자에게 충분한 생활비를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 경우가 전제되며, 좋은 사람끼리 만나 둘 다 열심히 살면 다행이지만 남편이 불성실해서 사실상 아내의 수입이 가족 전체의 수입인데 취급은 부잣집 첩만 못할 경우도 높은 확률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같은 소설을 보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19세기말까지도 결혼 초기에는 다정하고 성실했던 남자가 평생 그렇진 않은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여자의 인생은 그런 불확실한 남자운에 결정적으로 좌우되는 꼴이 흔했던 모양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여자 개인에게는 어떤 삶이 행복할까? 첩이 계속해서 사치품 지출을 요구하고 안락하게 사는 모양새는 분명 가부장제에 기생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저 시대의 여자가 첩의 삶을 택한다 해서 그 "개인"에게 도덕적 비난을 집중시키는 것은 도덕적인가?
2) 침묵과 기억의 공백
위와 같은 묘사에서 유엽의 어머니가 보이는 반응도 주목할 만하다. 전업주부인 어머니가 생활비와 자식 교육비 문제로 아버지에게 돈을 요청했다가 핀잔만 듣는 장면이 그리 낯설지 않았던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20세기말, 21세기초인 지금 우리 어머니들이 똑같이 경험하고, 경험하는 중이며, 우리 세대가 자라면서 목격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권에 대한 의식 면에서 지금과 비교도 될 수 없는 2세기 중국에 그 장면을 붙여도 위화감이 없다는 것은 신랄한 맛을 자아낸다. 이 "흔한" 광경에서 어머니가 가슴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말문이 막혀버리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도, 2세기 중국에 대입하는 데 그다지 위화감이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던데, 지나치게 일반화를 단행하는 그 말을 좀 더 완화해서 표현하면 역사는 "지배계급 남성 중심의 기록"이라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기록이 남지 않았을 뿐 인간이 지구상에 살면서 남겨온 역사에는 가슴 속에 말을 꾹꾹 눌러담은 채 침묵하다 잊혀진 여성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침묵하다 잊혀진 소수자 소속의 남성들의 삶도 있었다. (여기서 소수자라는 것은 숫자상으로 소수라는 의미가 아니다. 피지배민족, 인종차별, 배우지 못한 평민, 노예, 성년이 되지 못한 아들, 환관, 동성애자 등등등등 제도가 인정하는 적법한 권력 분배에서 소수인 사람들을 뜻한다. 물론 참정권과 소유권 기타 경제권이 독자적으로 인정되기 전의 여자들은 왕족 정도 되지 않는 한 전부 여기에 들어간다) 이들의 삶과 생각과 감정은 문자로 적히지 않았다 해서 없었던 일이 되거나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자신의 불평불만을 적극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해서 기쁘게 지배자 중심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아무 괴리감 없이 기쁘게 순종하기만 한 것도 아닐 것이다. 이들도 사람이라면, 자신이 겪는 것을 생각하고, 그건 잘못됐다 말하고 싶고, 그렇게 설치고 싶었을 것이다. 배우지 못했기에 어찌 항변해야 할지 몰랐거나, 배웠더라도 함부로 드러냈다간 사회적으로든 생물적으로든 살해당하니 가만히 있었던 것이지. (실존인물 유엽도 아버지의 첩을 죽이는 식으로 어머니의 바람을 실행했다가는 아버지가 "벌"로 자신에게 죽음을 명할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13살이었는데.) 남편과 사별하면 따라 죽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괴상한 인식이 퍼지던 조선 후기에 과부가 된 젊은 여자들이 그 규범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기쁘게 자진했다면 열녀문 경쟁을 하느라 가문과 마을에서 죽음을 강요하더라며 비판하는 기록이 남았겠는가. 그거 참, 정작 유가의 시조 되시는 공씨 어르신께서는 사람 대신 인형을 쓰더라도 "순장"이라는 풍습 자체가 악랄하다는 생각으로 지독한 욕을 퍼붓더라만.
적극적, 공식적으로 기록을 남기진 못해도, 주정을 부리고 싸움질을 하고 자녀들 앞에서 한숨을 쉬는 식으로 표현은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자로 된 기록이 불완전하듯이, 조부모에서 부모에게로,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갖가지 "표현"을 통해 전달되는 기억도 불완전하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납치당해 아메리카 노예로 팔려간 조부모 세대와 조부모 세대가 미국에서 낳은 부모 세대가 자신들이 겪은 일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쿤타 킨테의 경우에는 다행히 증손뻘 되는 후손에게도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전달되어 실제 후손이 자기 뿌리가 되는 부족을 찾아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성공적으로 전달된 이야기보다는 전달되지 못하고 흩어진 이야기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운 좋게 전달된 이야기도 그 일을 겪은 사람 자신과 이야기를 전달해준 사람들의 기억이 불완전하기에 왜곡되거나 빠뜨린 부분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젊은 시절 겪은 일을 모르며, 심지어 우리 자신이 학창시절 누군가와 싸운 사건조차도 왜 싸웠는지는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아는 것은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백들을 상상하면서 재구성된 것이다. 작중의 유엽이 자신의 기억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중 유엽의 어머니가 느끼고 표현한 이야기들은 실존인물 유엽의 삶에서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을까? 진수가 기록한 유엽전은 유엽이 그 사건과 관련해 실제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온전히 담아 전달하고 있을까?
3) 원전이 있는 픽션의 방법론
이번 편과 관련해 지인의 블로그에서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과거에 대한 "공백"과 "포착"과 "재현"에 대한 묘사에서 화봉요원과 여제만에 닮은 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면 이런 것이 고전의 재해석을 시도하는 작품들의 요즘 경향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분이 트위터에서 <절대미각 식탐정>이라는 작품의 한 장면을 인용했는데 "원전"이 있는 작품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내 생각과 일치하기에 끌어온다.
고전 또는 원전의 재해석, 재창조라는 게 고전 자체가 목적이 되기보다는 자칫 작가의 단면적인 주의주장을 설파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를 종종 본다. 사실 둘의 경계는 미묘하다. 내가 읽어서 마음에 들면 재창조, 재해석이고 안 들면 작가 혼자만의 개똥철학을 진실이라 우기는 걸로 생각되는 건가, 싶어 나 스스로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작가가 자신이 만든 이야기야말로 유일한 "진실"이라 주장하는 경우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분명히 인식하고 들려주는 경우는 읽는 사람에게도 다르게 다가오더란 것이다. 물론 나는 후자를 좋아한다.
에피소드 별로 가끔 기복이 보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작가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어떤 식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한다. 나는 이 작품이 참 마음에 든다.
유기가 병들어 죽자 군하(群下-뭇 부하)들이 선주를 추대해 형주목으로 삼고 공안을 다스렸다.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을 시집보내 우호를 굳건히 했다. 선주가 경(京口)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고, 은기를 주무했다.
<오주전>
14년(209년),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이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삼았다. 유비는 표를 올려 손권에게 거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하고 서주목을 겸임하도록 했다. 유비는 형주목을 맡아 공안에 주둔했다.
<주유전>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토록 했다. 하준, 한창, 유양, 주릉을 그의 봉읍으로 삼게 하고, 강릉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 유비가 경까지 와서 손권을 알현했을때 주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불러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 땅에 있도록 한다면, 아마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어 끝내 연못 속의 물건이 안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가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10년
<주유전> 이 당시 유장은 익주목에 임명되었는데, 밖으로는 장로의 약탈과 침략이 있었다. 주유는 경으로 가서 손권을 알현하고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분위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와 행장준비를 하고 파구를 지날 때 병사했다.
<오주전>
15년(210년), 예장을 분할하여 파양군을 만들고, 장사군을 나누어 한창군을 두었으며, 노숙을 태수로 임명하여 육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선주전>
손권은 사자를 보내 함께 촉을 취하자고 했다. 어떤 이가 의당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오는 끝내 형 땅을 넘어 촉을 소유할 수 없으니 촉 땅은 가히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형주 주부 은관이 진언했다, “만약 오의 선구(先驅)가 된다면, 나아가서는 능히 촉을 이길 수 없고, 물러나서는 오가 이를 틈탈 것이니 일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지금 다만 그들이 촉을 치는 것을 도와주는 것처럼 하되, 우리가 새로이 여러 郡을 점거하여 군을 일으켜 움직일 수 없다고 하면, 필시 오는 감히 우리를 넘어 홀로 촉을 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퇴지계를 이처럼 하면 가히 오, 촉의 이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선주가 이에 따르자 손권은 과연 (촉을 칠) 계획을 그만두었다. 은관을 올려 별가종사로 삼았다.*
*헌제춘추 :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미적(米賊) 장로는 巴, 漢 땅에서 왕 노릇하며 조조의 눈과 귀가 되어 익주를 노리고 있소. 유장은 불무(不武)하여 능히 스스로를 지킬 수 없으니 만약 조조가 촉을 얻으면 형주가 위험해집니다. 지금 먼저 유장을 취하고, 진격하여 장로를 토벌하려 하니,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게 하고, 오, 초를 하나로 한다면, 비록 10명의 조조가 있다한들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이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익주민은 부강하고 토지는 험조하니 유장이 비록 약하다 해도 스스로 지키기에는 족하고, 장로는 거짓으로 꾸미는 것으로 조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요. 지금 촉, 한으로 무리하게 출병하면 전운이 만 리에 이르니, 싸워서 이기고 공격해서 차지하고자 하면 비록 실리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이는 오기라 해도 정하지 않을 계책이고 손무라 해도 그 일을 잘 해낼 수 없을 것이오. 조조가 비록 무군지심을 품고 있으나 군주를 받든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소. 의논하는 자들이 조조가 적벽에서 실리하여 그 힘이 꺾이고 다시 멀리 올 뜻이 없다고 하나, 지금 조조가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장차 창해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오, 회계에서 관병(觀兵-무력을 과시함. 열병)하려 하니 그가 어찌 가만히 앉아 지키며 늙기만을 기다리겠소? 지금 동맹 사이에 까닭 없이 서로 공벌(攻伐)하여 조조에게 차추(借樞-대세의 관건을 넘겨줌)하는 것은 적들이 그 틈을 타도록 하는 것이니 장계(長計)가 아니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211년
<선주전> 건안 16년(211년) ... 선주는 제갈량, 관우 등을 남겨 형주를 지키게 하고는, 보졸(步卒-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오주전>
16년(211년), 손권이 관소를 말릉으로 옮겼다.
<조운전> *운별전 : 선주가 익주로 들어가며 조운에게 유영사마를 겸하게 했다. 이때 선주의 손부인은 손권의 여동생으로 교만하고 횡포하여 오의 관리와 병사들을 여럿 거느리고 거침없이 법을 어겼다. 선주는 조운이 엄중하니 필시 이를 정제할 수 있으리라 여겨 특별히 내부의 일을 맡겨 관장하게 했다. 손권은 유비가 서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배들을 대거 보내 여동생을 영접하게 했는데, 손부인이 은밀히 후주를 데리고 오로 돌아가려 하니 조운이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가로막고는 후주를 구해 돌아왔다.
<법정전> 어떤 이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법정이 촉군에서 지나치게 종횡하니 장군께서 의당 주공께 여쭈어 그의 위복을 억누르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주공께서 공안에 계실 때 북쪽으로는 조공의 강성함을 두려워하고 동쪽으로는 손권이 핍박함을 꺼렸으며, 가까이는 손부인이 곁에서 변고를 일으킬까 겁내시었으니, 그 당시는 진퇴가 낭발(狼跋)하였소. 그러다 법효직이 주공의 보익이 되어 높이 날게 하고 다시 남의 제약을 받지 않게 했으니, 어찌 법정을 금지해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겠소!” 당초, 손권은 여동생을 선주에게 시집보냈는데, 여동생은 재기가 있고 강맹하여 여러 오라버니들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시비 백여 명이 모두 도를 잡고 시립하니 선주가 매번 들어갈 때마다 내심으로 늘 늠름(凜凜-두려워함)해했다. 제갈량은 또한 선주가 법정을 매우 경애하고 신임함을 알았기에 이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212년
<선주전>
다음해(212년), 조공이 손권을 정벌하자 손권은 선주에게 구원을 청했다.
<오주전>
다음 해, 석두성을 수축하고 말릉을 건업으로 고쳤다. 조조가 장차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수오를 만들었다.
214년(촉 평정 완료)
<목황후전> 유비의 목황후는 진류군 사람이다. 오라버니 오일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오일의 부친이 유언과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유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 유언은 남다른 의지를 품고 있었는데,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목후의 모습을 보고 고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유언은 그 당시 아들 유모에게 자신을 따라오도록 하여 유모를 위해 목황후를 아내로 맞이해 주었다. 유모가 죽은 후, 목황후는 혼자 기거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손부인은 오나라로 돌아갔으므로,* 신하들은 유비에게 목황후를 맞이하도록 권유했다.
*한진춘추 : 유비가 익주로 들어가고, 오나라는 사자를 보내 손부인을 맞으려고 했다. 손부인은 태자를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고 했다. 제갈량은 조운에게 병사를 지휘하도록 하여 장강을 끊어 태자를 남도록 하였다.
<오주전>
19년(214년) ... 이 해,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돌려주겠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 반장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형주를 나누어 장사, 강하, 계양 동쪽 지역을 손권에게 돌려주고, 남군, 영릉, 무릉 서쪽 지역을 유비에게 귀속시켰다.
트위터 메모
19년(214년)..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오주전) 그러니까 왜 유비가 자력쟁취한 땅도 "돌려주도록" 요구한 걸까. 유비는 또 거기에 항의도 못하고. 하긴 적벽 때까지 유비는 남의 현 하나에 빌붙은 객장 처지였고 그나마도 유종이 항복하면서 잃은지라. 강동을 가진 손권이 땅 한뼘 없는 유비를 자신과 대등한 군주로 생각하기 어렵긴 했겠지. 노묘님과 이야기했듯이 이념전은 별로 생각 안 하는 동네인 데다. 오주전, 주유전 같은 데서 적벽과 강릉공방 같은 걸 적어놓은 대목을 보다 보면 당시 손권은 유비를 주유와 비슷한 급으로 취급한 건가 싶을 지경이다. 유비 자신도 주유한테 군사 1천, 2천을 빌려 쓰는 처지였고. 장송이 오기 전까지 레알 바늘방석이었을겨
역시 손권이 211년경 손소매를 돌아오게 한 건 유비의 입촉에 강력히 항의한 표시로 봐야겠지? 그 이듬해(212년)에 조콩이 손권을 치자 손권이 유비한테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이 무렵의 손권은 열받긴 했어도 동맹을 깰 생각까진 안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