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3



시절이 하 수상하다보면 힘없는 사람들은 누군가 힘 있는 자가 나서서 자신들의 문제를 시원스레 날려주길 바라게 된다. 영화 스파이더맨을 보라. 스파이더맨이 개인적인 문제로 잠시 폐업(?)하자 범죄율이 자그마치 75% 증가했단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아예 없던 시절은 잊어버린 채 스스로 뭔가 하고자 하지 않고 스파이더맨 한 명이 돌아와 도시를 구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것이 만화이고 영화니까 자꾸 잊어버리는 게 있다. 스파이더맨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자라 해도 그가 손을 뻗을 수 있는 건 뉴욕이라는 도시 하나 뿐이고, 그 혼자서는 모든 범죄를 막을 수 없으며, 모든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영웅을 바라지만 결국 픽션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저 체념하고 당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는 수밖에 없음을 안다.

<불멸..> 9화는 위에 잘 보이기 위해 뇌물을 바치느라 정작 국세를 내기 어려워진 아산 현감이 새로 염세를 거둔 사건이 중심이 된다. 이전에 아산 현감의 물밑공작으로 그 아들이 실력 없이 장원이 되고 장원으로 점 찍힌 이순신은 기묘사화의 일로 트집잡혀 낙방했더랬다. 세상이 어지러워도 재주 있으면 쓰임 받으리라고 ‘원칙’을 믿었던 순진한 도령은 세상이 실제로는 원리원칙보다 돈과 권세에 굽힘을 절감하자 사냥꾼들과 거칠게 내달리며 울분을 풀려 했다. 하지만 염세 거두는 일로 친구의 아버지가 무고하게 장을 맞고 돌아가자 다시 원리원칙을 신봉하는 도령으로 돌아가 현감에게 대항하려 한다. 그러나 힘없는 백성들은 천수의 아버지가 끌려갔을 때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듯이 혹여 화라도 당할까 두려워하며 그를 돕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현감의 비리를 조사해내 고발하려던 그를 소금 굽는 백성 중 하나가 밀고해 관아에 잡혀가게 된다. 백성들은 그때서야 관아로 몰려가 그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민란을 두려워한 현감이 일시방편으로 그를 풀어주어 일은 일단락되지만, 이순신은 아산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이것은 물론 픽션일 것이다. 이순신이 아산에서 보낸 청년기에 대해 우리는 아는 바가 없고 알려진 바도 거의 없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는 바뀌어도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드라마 속의 인물들과 지금의 우리가 다를 바는 없다. 다만 상황이 약간 다를 뿐이다. 드라마 작가인지 소설 작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9화의 의기충천한 이 도령으로부터 ‘영웅’을 구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봤다.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원리원칙이 우습게 여겨지는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만 이웃에게 떨어진 불행에 숨죽이고 있는 것이 능사라고 여기는 무리나 자기 이익에 양심을 팔고 밀고하는 저 비겁한 민초가 우리가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그네들은 이 도령처럼 세금 안 내는 양반이 뭘 아냐며 비웃고 외면했다. 그네들은 공권력을 빙자한 악 앞에서 자신들이 무력함을 너무 잘 알기에 체념한지 오래다. 그런 그들을 위해 원리원칙을 세우려고 아등바등하며 혼자서 공권력에 맞선 이 도령은 아직도 너무 순진하다. 그는 앞으로도 죽는 그 날까지 끝없이, 더더욱 아프게 깨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런 이 도령이다. 자신들은 뒤에서 손을 놓고 체념한 주제 누군가 하나, 고결한 의인이 나타나 원리원칙과 정의를 부르짖으며 대항해주길 ‘은근히’ 바란다. 대체 잡혀간 이 도령을 꺼낸 게 누구란 말인가. 민초 하나하나는 그야말로 잡초나 마찬가지지만 뭉치면 뿌리가 얽히고설켜 태풍 앞에서도 표표히 서있을 수 있는 민중이 된다. 왜 부당한 걸 부당하다 할 수 없는 것인지? 왜 ‘공권력’ ‘힘 있는 자’라 하면 무조건 몸을 사리도록 사회화-좋게 말해서 그렇고 내 보기엔 세뇌다-된 건지..? 그렇게 어린 양 하나를 잡으면 자신들의 구속이 잠시는 풀린다는 믿음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들한테는 유전자처럼 전해 내려오는 모양이다. 정부보다 시민이 더 강하다고 우기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경제가 어렵네 국가안보가 어쩌네 여기저기서 잘난 척 떠들 수는 있어도 결국은 각자 밥벌이가 바쁠 뿐 앞으로 나설 마음들은 없어 보인다. 하기야 저렇게 순진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생계조차 걸릴 수 있는 문제에 함부로 덤비겠는가. 더군다나 이 도령이 양반이 아니었더라면 백성들이 몰려오기도 전에 입막음을 위해 현감에게 매 맞아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양반이니까 고이 옥에 모셔놓았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하야- 구국의 영웅이 되기까지의 앞으로의 길은 끝까지 험난하겠습니다, 이순신 장군.




내가 두려운 게 있다면 나 역시 남의 등 뒤에 숨는 비겁자가 되어버리고 그걸 합리화한 채 웃고 마는 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부러지더라도 올곧게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은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 이 '긍지'를 자랑스럽게 지니고 갈 것인지..?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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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9/26



6화는 일단 패스. 원균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로.


7화를 보고나니 갑갑했습니다. 이순신은, 아시다시피 원리원칙에 투철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원리원칙에 투철하면 고지식하다, 꽉 막혔다는 소리만 듣기 십상이요 매사 손해보기 일쑤지요. 원리원칙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것이 낫다고들 하더이다. 그걸 융통성있다고 말하지만, 어쩐지 말꼬리가 슬그머니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융통성이 있는 건 물론 능력면에서 필수적인 것이죠. 하지만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항상 잡초처럼 적당히 휘며 오래도록 보신하는 처세술이 정말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살리는 삶인 것인지. 부러지더라도 뻣뻣이 살겠다는 생각은 남산골 딸각발이나 할 법한 물정 모르는 바보의 소치인지.
생각건대 사람이 융통성을 갖춰 적당히 휘는 게 아니라 당연한 원리원칙이 부조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휘는 것 같습니다. 그걸 쓴웃음 짓더라도 그러려니 용납할 수 있는 게 어른이 된다는 것 같고요.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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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9/19


1. 기차놀이 하느라 본방송은 못 보고, 오늘(일요일) 낮에 재방으로 봤습니다. 오늘밤 또 신선조와 이순신 사이에서 갈등할 걸 생각하니 골 아프구만요.;

2. 나 역시 이순신 자살설 지지자이긴 하지만, 이렇게 가버리시는 건 좀 곤란합니다요 장군님. 적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나 죽었소 하고 그냥 보여주면 어떡합니까요, 게다가 주위에 아무도 없다니! 하다못해 송희립이나 조카님이라도 옆에 있어서 방패를 들어야는 것 아닙니까요.; 이래서야 그 유명한 유언도 허구가 되버리는구만요. 뭐 상관 없으려나.

3. 쓰러지신 장군님이 과거회상을 하시어, 드디어 이야기는 1555년으로 돌아갔습니다. 1598년에 54세 되시니 이때면 10살 11살의 어린 아이군요. 또다시 정형이 팍팍 깨져, 어린 이순신은 동네의 덩치 큰 아이들에게 겁쟁이에다 운동도 못하는 꼬마로 따돌림당하고 있더이다. 심지어 골목대장은 원균이고 이순신은 용감한 어린이로 인정받고 싶어서 원균과 친하게 지내려 하는군요.; 성룡 형님은 저런 녀석들과 어울리지 말고 공부좀 하라고 타이르고 있더이다. 왜 웃기게 들리지?;

4. 골목대장 원균과 나약한 이순신을 보고 떠오른 건 임진왜란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설정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자신보다 못하고 항상 형님형님 따라다니던 꼬맹이가 나이들고 보니 자기한테 명령하는 위치가 되어있더라면, 여간 배포 유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배알이 뒤틀리지 싶더이다. 원균도 나름대로 사려있는 장수였다는 건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이래서야, 잘못 가다간 잘났는데 어딘가 꼬여버린 사람이 되는 건 아닌지, 더 잘못 가다간 미화의 극치를 달리는 건 아닌지 싶습니다. 흐음, 역사의 라이벌 어쩌고 하는 두 사람이 어린 시절 형님과 부하의 관계라.; 그나저나 훈련원 훔쳐보기를 그렇게 좋아했다는 설정이라니, 나중에 무과 급제해 훈련원 봉사가 되면 감개무량의 정도가 넘쳐 어찌 되시려오? 장군.;

5. 유성룡은 정확히는 이요신인가 이희신의 친구로 이순신은 친구의 동생이었을 겝니다. 그래봐야 겨우 3살 차이인데 이순신을 친동생 이상으로 아끼고 감싸고 보듬고 말이 아니군요. 원균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그와 가까이 하는 것도 경계하다니 무슨 누이를 생각하는 오라버니도 아니고.; 아무튼 이순신은 원균에게 인정받았고 원균은 유성룡에게 인정받았습니다. 셋이 친한 사이가 된다니, 묘한데요.-_-;

6.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젊은 시절 흥선대원군 저리 가라할 난봉꾼으로 묘사되더군요. 그것도 한이 쌓이고 쌓여 속이 새카맣게 타버린. 舜臣이라는 이름을 풀이하면서 순임금이 없으니 그런 임금의 신하도 없는 거라며 처절하게 비뚤어진 웃음을 짓는 이정은 선조의 두려움과 겹쳐 무서워졌습니다. 그 이름자는 할아버님인 이백록이 꿈에 나타나 전했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저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싶었습니다. 이순신의 형제들은 모두 요순 같은 명군의 신하라는 의미의 이름이지요. 돌림자는 오행의 글자가 변으로 들어간 걸 쓴다던데 신자 돌림은 해당이 안 되더군요. 아무튼 조광조의 일로 할아버지가 억울하게 파직당했던 집안의 자식이 나랏님에 대해 한이 조금도 없으면 이상하다는 걸 처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순신 전기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해석이지요... 차라리 자식을 바보로 키우는 게 세상 평안하게 살게 하는 거라며 우는 것처럼 웃던 이정을 보니,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도 너무 굴곡진 생을 살았던 이순신은 지나치게, 지나친 게 넘치도록 우직하게 살았다고 새삼 느낍니다.

7. 들어보니 이 드라마는 100화는 된다던데 얼마나 늘어질지 좀 무섭군요. 신선조는 48화인가에서 끝나는데.; 하기사 그쪽이 다루는 이야기는 몇 년이 안 되긴 합니다. 짧으면 곤도 이사미가 참수당하는 데까지, 길면 하코다테에서 히지카타 토시조가 전사하는 데까지겠지요. 아무튼,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Posted by 양운/견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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